음•••제목을 딱 보고 '이 영화는 내가 안 보겠구만' 생각했다.
일제 강점기 인간을 다룬 영화는 내 기준 〈밀정〉에서 최고점을 찍었고, 강제징용이나 일본군 '위안부' 역사를 그린 작품은 열심히 폭력을 재현하는 장삿속을 애국심으로 포장하는 경우가 많았다. 노동 문제를 전면으로 다룬 작품은 거의 '세상이 이런 현실을 몰라서 그래'하는 치기어린 계몽주의자의 주입식 교육같이 느껴지는 때가 많았다. 그래서 '억지로 참석해서 봐야 하는 노동조합 행사'가 아니면 이런 소재는 찾아보지 않는다. 집회나 교육에서 생각이 필요 없는 '폭력 묘사 공연'을 한 후에 '설명'을 덧붙여 분노를 '선동'하는 걸 보면 '왜 예술가로서 자기 자신을 더 괴롭히지 않고 보는 사람을 괴롭히는 거냐!' 화가 치미니까.
그런데 조선인+여공이라니? '대체 또 뭐냐.' 하며 영화 정보를 찾아봤는데 '응? 좀 다른 듯?' 좀 궁금해졌다. 담당하는 부서 일과도 연관 있는 주제라 톡방에 공유했더니 다들 관심있어 한다. '그래. 참고가 될 만한지 한번 보자. 영 아니면 남들한테 봤다고 말하지 말자'하는 마음으로 일삼아 극장으로 향했다.
"자 우리 여공들이여. 오늘 일과를 말해보자"로 시작하는 노래가 있었다. 멜로디는 못 찾고 가사만 남았다. 영화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1983년 발간된 동명의 책¹에 남은 여공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만든 다큐멘터리로, 1910~40년대에 가족을 부양하기 위해 오사카의 방적 공장에서 일했던 조선인 여공들의 고난과 존엄을 기록한다. 재일조선인 4세 배우들이 여공의 구술 기록을 낭독하고, 재연 장면에서 배우들은 경상도와 제주도 사투리를 쓴다. 8~90세가 넘은 여공 당사자의 인터뷰는 의외로 생기가 넘치고, 일본인 관리자와 노동운동가의 구술 기록을 낭독하는 부분, 일본인 연구자들의 겸손한 열정도 꽤 인상적이었다.
일가족 중 밥벌이할 사람이 11세 자신밖에 없어 높은 게다를 신고 13세인 척 방적 공장에 취직했다는 한 여공은 별명이 "밥통"이었단다. 온 식구가 먹고살 밥을 버니까 밥통, 나이가 너무 어려 언니들이 많이 예뻐했다며 치아가 듬성듬성한 90의 소녀가 웃었다. 10대 초중반에 바다를 건너 공장/기숙사의 벽돌과 철조망에 갇혀서, 속눈썹 위까지 소복이 눈처럼 쌓인 솜먼지를 마시다 폐병으로 죽어가며 "나 죽거든 절대 화장하지 말라." 울부짖었으나 한 줌 재가 되어 사라져간 여공들의 삶 이 빼곡하게 담겨 있었다. 돈도 먹을 것도 없었거니와 돈이 있어도 조선인에게는 썩은 생선만을 내어주던 차별에 더해 일본 기업과 결탁한 조선인 남성 조폭 집단으로부터 강간과 인신매매에까지 내몰렸던 식민지 최약자의 겹겹의 고난을 더듬어갔다. 그러나 그들은 먹을 게 없으면 일본인이 내다 버리던 소·돼지의 내장을 주워다 구워 먹고, 가족과 편지를 주고받기 위해 스스로 한글 공부를 조직하고, 30년대에 가서는 대 규모 여공 파업을 주도했다. 파업에는 일본인 여공들도 합류했다. 파업 요구에는 급료, 식사, 위생, 안전, 여성의 재생산 권리뿐만 아니라 일본인 관리자 아주머니의 해고를 철회하라는 것까지 있었다. 파업은 실패 했지만 이들은 빨간 댕기를 묶어 굴복하지 않는 마음을 표시하고 어깨를 당당히 펴고 출근했다고 한다.
식민지 최약자. 그들의 삶을 되갚아야 할 민족의 원한이 아니라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존엄한 인간, 자기 운명의 개척자로 소환한 노력이 빛났다. 감독은 영화를 통해 반드시 그러리라고 다짐한 것 같았다. 세상에 이런 이야기가 있구나 싶었다. "세상 사람들이 다 몰라도 이 이야기를 기억해야 할 누군가가 있다면 그게 바로 너 아닐까?"라고 여공들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애국주의니 계몽주의니 헛소리 그만하고, 이 얘기나 퍼뜨려 이 짜식아."
영화 안에서 여공들을 "운명의 개척자"라고 말하는 사람은 일본인 연구자다. 그는 또한 "오늘날의 일본이 존재하게 된 데에 그들의 기여와 노고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어? 신선한 시각이었다. 한국에서 벌어지는 이주민 차별에 대해 "우리도 옛날에 핍박받은 이주민이었어." 하는 단순 비교를 하고 싶지는 않았는데, 어쩔 수 없이 마음이 단숨에 아리셀 참사 현장으로 차원 이동한다. 아리셀 참사 유가족이 똑같이 저렇게 말했기 때문이다. "우리도 한국의 경제를 떠받 치는 사람입니다."
지난 6월 24일 경기도 화성의 리튬 배터리 제조사 아리셀에서 발생한 화재로 23명이 사망하고 8명이 다쳤다. 합동분향소가 설치된 화성 시청 앞에는 평일 저녁 7시에 매일 추모문화제가 열린다. 피해자 중 이 주민 노동자가 다수이고, 그중 대부분이 중국 동포다. 정주민이든 이 주민이든 생명이 스러진 자리에서 마이크를 잡는 건 언제나 누구에게 나 어려운 문제겠지만 이번엔 훨씬 조심스럽다. 한국인이 "코리안드림을 이루러 와서 위험한 일을 하다 죽어 나가는 이주 노동자"라고 얘기할 때 유족의 어깨가 더 작아지는 것 같다. "이런 현장을 방치하고 책 임자를 비호하는 정권을 탄핵하자. 다 윤석열 때문"이라고 얘기할 때는 '아니 이분들한테 뭐 어쩌라고?' 싶은 의문과 함께 부끄러움이 밀려왔다. 가족을 잃은 사람들 앞에서 '오랜만에 의미 있는 투쟁에 모인 자신들을 치하하는' 사람들의 반가운 인사와 보람에 찬 웃음도 신경을 긁었다. 전에는 지긋지긋해도 그러려니 했던 '투쟁의 언어들'이 전부 뜨악해졌다. 그렇다고 뭐 나한테 다른 수가 있냐고 물으면? 모르겠다. 다만 피해 당사자의 투쟁과 치유의 장을 만들고 지탱해줘야 할 우리가 참가자 머릿수와 참가 조직 수가 비슷한 자리를 만들어 마이크를 잡는 현실이 괴롭다.
▲ 방적 공장 생산 라인 모습 ⓒ 한국정책방송원
그러던 어느 날 한 사업장의 신입 조합원들이 문화제에 참가하겠다며 간부들과 아이들까지 40명이 문화제에 온 날이 있었다. 그들은 돈 봉투는 들고 오겠으나 마이크는 절대 주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하지만 아니나 다를까, 사회자는 즉석에서 지회장을 불러냈고 나는 그가 말실수하지 않을까 머리카락이 쭈뼛쭈뼛했다. 준비해도 어려운 자리인 데 준비되지 않은 말을 할 때는 평소 생각이 드러나기 마련이고, 우리 일상은 너무 안온하니까. "조직된 노동자로서 미조직 노동자의 권리를 위해서 우리가 충분히 역할을 하지 못해서 이런 일이 생겼기 때문에 정말 죄송한 마음이고•••끝까지 함께하겠습니다." 긴장했던 나는 웃음이 터져버렸다. 조직된 노동자라니! 우리끼리나 하는 말이지 그걸 누구 알아들으라고 하는 말이야! 난 평소에 조합원을 '조직된 노동자', 무노조 노동자를 '미조직 노동자'라고 부르는 것에 강한 거부감이 있다. 내 가 그 입장이라면 나를 '미조직'이라고 부르는 게 정말 어처구니가 없을 것 같아서. 그런데 이날 우리 조합원에게 '조직된 노동자'는 매우 중요한 정체성이라는 걸 깨달았다. '인간답게 살고 싶다'라며 노조를 시작했던 때와는 선 자리가 달라졌고, '우리는 무권리 노동자를 위해 사 회 변화에 힘쓰는 뜻있는 사람들'이라는 정체성과 자긍심이 '나의 임금 복지'를 넘어서는 노동조합 활동을 만드는 저변이었다.(이 얘기는 나중에 기회가 되면 자세히~)
또 인상적이었던 점은 그가 '이주민', '이주 노동자'라는 표현을 전혀 쓰지 않고 오직 권리를 찾아야 할 '미조직 노동자'로 이들을 호명했다는 것이었다. 평소 '이주'란 단어가 그의 사용 단어 목록에 없을 수도 있겠지만, 어찌 보면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고 '아직 권리를 찾지 못한, 우리가 뒷배가 되어야 할 노동자'로, 존엄한 한 인간으로 보고 우리 할 일을 하면 되는구나 싶었다. 안 그래도 문화제 전에 박수, 웃음, 단어 등 '조심해야 할 목록'을 복잡하게 정리하던 나는 "조문하러 갈 때는 웃고 떠드는 거 아니잖아요. 오늘은 조용하게 집중합시다." 하는 지회장의 상식적인 멘트에 감탄해버리고 말았다. 그렇네. '인간의 도리'면 되는 거였네.
〈조선인 여공의 노래〉에서 누구보다 공감하게 되는 처지의 사람은 일본인 연구자들이었다. 가해국의 일원으로서 가해 행위를 앞장서 규탄 하며 자기만은 정의롭다는 유체이탈을 하지 않았고, 아직 역사적 책임을 다하지 않은 사회를 두고 대신 사과하는 오만도 부리지 않았다. 다 만 염치 있는 인간으로서 조선인 여공의 이름과 목소리를 찾는데 인간 의 도리를 다하는 모습이 감동적이었다.(감독이 그렇게 편집을 했는지 도 모르겠다.)
2024년 대한민국의 세계적 위상과 아리셀 화재 참사의 참혹함 사이에서 우리가 할 일은 손쉽게 동정하거나 얼척없이 피해자와 동일시하는 게 아니라, 염치 있는 인간으로서 우리 사회의 모습을 바라보고 다 하지 못한 우리 역할을 성찰하는 것 같다. 노동조합의 '노동 안전보건' 활동이라는 것이 우리의 담장 안에서만 벌어지지 않았는지 하는 성찰부터 사회 전체가 생명안전을 등한시하면 그중에 가장 취약한 집단이 먼저 죽는 문제이기에 아리셀 참사도 우리 모두의 일이라는 책임을 퍼뜨리는 것까지.
유치함을 감수하고 영화와 단순비교하자면, 우리는 중국 동포와 같은 피해자의 처지에서 가해자/책임자를 욕하는 위치에 머무를 수는 없다. 인간의 염치를 버릴 수 없어 조선인 여공에게 조금 마음을 썼다가 해고되었던 여공들이 파업에서 "해고를 철회하라."라고 외쳤던 그 아줌마의 위치에 가장 가깝지 않을까 싶다. 이 영화가 2024년 한국 사회에 던지는 메시지가 있다면 아마도 영화에서 잠시 스쳐 가는 '일본인 아줌마'의 마음에 대한 공감 아닐까 싶다. 염치 있는 뒷배가 되는 것이다.
1) 박찬정, 《조선인 여공의 노래 朝鮮人女工のうた》, 이와나미,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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