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한 곳 들춰 보면 / 불씨들 살아날까"(어때요 이런 고요) 용인의 한 카페에 걸린 조명이 눈길을 끌었다. 철사로 만든 물고기 조명이었는데 비어 있는 몸속에 전구 다섯 알이 붙어 실내를 밝히고 있었다. 속 빈 물고기와 속없이 다정한 사람을 엮어보았다. 시인은 고요한 마음의 아궁이를 뒤적이고 있다. 재밖에 보이지 않아도 불씨들이 별처럼 눈을 깜빡이며 깊이 묻혀 있다. "…살아온 발자욱에 / 오늘이 흐트러진다"(깨진 얼굴) 나이가 들면 자신의 얼굴에 살아온 삶이 떠오른다는 말을 들었다. 두려워하며 오늘을 살아야 하는 이유이고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포용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먹이 주는 새한테 매달리는 봄 … 멀리 있는 새 꺼내면 떠난 사람 날아와 / 서로를 위로하면서 아득한 곳에 닿는다"(새의 이름 꺼내면) 김춘수 시인의 <꽃>이 생각나는 시이다. 내가 만나 알게 된 꽃들의 이름, 잊혀진 꽃들의 이름, 날 떠나가거나 내가 떠나온 이름들이 날아왔다. 먹이를 나누듯 위로와 공감을 함께 먹었던 사람들의 기억을 안고 아득하고 무한한 곳을 향하는 인생 길. "…바스락대는 제자리 소리조차 물렁해져 / 아직은 살아있는데 날마다 죽어가는"(스티로폼 후생) 나도 스티로폼이었다. 스티로폼처럼 나를 가볍고 하찮게 여겨 버린 적이 있으며 나를 살아있는 것도 아니고 죽어있는 것도 아닌 존재로 생각했던 적이 있다. 나 자신에 대한 병적인 무책임으로 소중하거나 스쳐 가는 인연들을 소홀히 다뤘다. 그 결과는 외로움과 허무함이었다. 나는 버릴 수도 없고 껴안을 수도 없는 애물단지였다. "…유일한 해결책은 또다시 상처나는 것 … 참아내느라 순해지는 봄처럼 / 종이칼 내게 와서 온몸이 공손해졌다"(종이칼) 상처날까 곪을까 아플까 두려워 도망친 시간들이 쌓여 비겁이 되었다. 용기있게 살라는 아버지의 유언 앞에 당당하지 못한 나를 본다. 고통의 순간에 나와 타자에 대한 포용과 이해, 연민의 꽃이 피어난다. 쇠 칼이든, 종이 칼이든, 말의 칼이든 당당하게 맞서기를 소원한다. "…불(火)행 속으로 끌려간 한덩이 외로움 / 너무 빨리 식어가는 초저녁을 삼킨다 / 살아도 끝나는 관계 불씨만 남는다"(화(火)끈) 노을 앞에서 사람의 영혼은 그만큼 커다랗고 뜨거운 외로움의 바다에 함몰된다. 왜 수십 년의 세월을 부대끼며 살아내고서도 오롯이 나만 남게 되는 걸까. 나와의 화해, 타인과의 소통의 불씨를 인생의 재 속에서 찾다가 마침내 나 역시 재가 돼버리겠지. 보이는 내가 사라지면 무한한 내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쓰레기통을 몰랐다 쓰레기가 될 줄은 … 마음껏 / 텅 빈 얼굴로 / 살지 못한 내 이름"(버려진 쓰레기통) 수년 전에 타인의 텅 빈 얼굴을 몰래 훔쳐보고 유령처럼 생각돼 대낮임에도 두려움에 사로잡힌 적이 있다. 나는 풍부한 얼굴을 원했지만 무심한 얼굴이 대부분이었다. 마음의 소리로 가득 찬 침묵을 오히려 시끄럽게 느끼듯 내 얼굴엔 소란스러움이 가득했다. 와글와글한 세상에서 고요하고 텅 빈 조경선 시인의 얼굴을 만날 수 있었던 건 행운이다. "날마다 새들로 꽃들로 꽉 찬" 조경선 시인의 하루들을 열어볼 수 있어서 유쾌하고 향기로웠다. 기다리는 것이다 별들의 세계 밑에서 살아있는 순간까지 큰 눈을 뜨고서 철저히 제 빛이 바래도록 서 있는 것이다 저 아래 누구 없는데 마중나온 사람처럼 기다리는 것이다 내가 닿은 거리까지 내일이 도착하기 전 걸음을 밝혀둔 채 <이런 가로등> 전문 찔릴 거 다 알면서도 순한 얼굴의 유혹에 하얗게 속으며 빠져드는 조경선 시인의 매력에 빠져든 시간이었다. 마지막으로 <볼 수 없는 꽃>을 보고 싶다. 죽어서도 더욱 뜨겁게 살아 있는 우리의 어머니가 건네는 사랑의 꽃이다. 이승과 저승에 걸쳐 피는 꽃이다. 여기서 <어때요 이런 고요>로 이승에서 피어났으니 조경선 시인의 어머니는 저승에 핀 꽃을 마음껏 향유하리라. #어때요이런고요 #조경선시인 #여우난골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