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새 끌어당기는 마음과 다투다가

말과 말 사이에는 발효의 시간이 필요하다

검토 완료

박희정(gloria70)등록 2024.10.15 16:41

사람을 만나 기운을 받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사람을 만나 기운이 빠지는 사람이 있다고 한다. 나는 십중팔구 기운을 받지만, 아주 드물게 기운을 잃는다. 어제 만난 모임은 후자에 속했다.

영혼의 단짝이라고 할만한 친구임에도 나는 끝없이 눈치를 보고 주눅이 들어 있었다. 요즘 들어 자주 잊는 고유명사를 서로 바로잡아주며 웃는 일은 예삿일임에도 혹시 내가 날카롭게 행동해서 비위 상하게 한 것은 아닌가? 내가 선택한 카페가 다소 맘에 안 드는 것은 아닌가? 견주고 또 견주느라 머리가 다 아파 왔다.

한두 번 만나는 사이도 아닌데 왜 그럴까? 우린 서로를 아끼고 때로 존경하면서도 그 사이사이 질투심이란 도깨비가 훼방을 놓기 시작하면 그에 시달린다. 누가 좀 더 예뻐보이고 어려보이나부터 누구 자식이 더 잘나가는지 누가 더 좋은 집으로 이사갔는지 누가 더 직장생활을 잘하는지로 자꾸자꾸 견준다. 어제는 밤도 아닌데 낮에 도깨비가 출몰했다. 주출망량이다.

집으로 돌아와 대화 중에 갸우뚱했던 이야기를 문자로 보내놓고 괜히 보냈다 후회하다가 새벽녘 빗소리에 잠이 깼다. 그때까지 답은 오지 않았고 나는 겨우 일어나 새벽운동을 다녀왔다.

친구에게서 쪽파 다듬고 딸아이 기다리느라 답이 늦었다는 문자를 받고서 드디어 마음이 가라앉는다.
우편으로 편지를 보내던 시절에는 오고 가는 시간 동안 사연이 발효되지만, 즉각적인 핸드폰 문자들은 날 것으로 전달된다. 온종일 무거운 머리로 업무를 보다가 내 마음을 조용히 들여다본다. 우체통도 없고 우편배달부도 없이 돌아보기 하나로 그 때 내 마음을 살살 말려본다.

푸른 곰팡이 -산책시1 이문재

아름다운 산책은 우체국에 있었습니다
나에게서 그대에게로 가는 편지는
사나흘을 혼자서 걸어가곤 했지요
그건 발효의 시간이었댔습니다
가는 편지와 받아 볼 편지는
우리들 사이에 푸른 강을 흐르게 했고요

그대가 가고 난 뒤
나는, 우리가 잃어버린 소중한 것 가운데
하나가 우체국이었음을 알았습니다
우체통을 굳이 빨간색으로 칠한 까닭도
그때 알았습니다 사람들에게
경고를 하기 위한 것이겠지요
* 이문재시집[산책시편]-민음사
  •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