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수께끼를 풀다: 효의 상징, 시흥행궁 복원은 역사적 당위성을 갖는 후손들의 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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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민규(zkzk753)등록 2024.10.18 15:38
시흥행궁

조선의 22대 왕 정조(1752~1800, 재위 1776~1800)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배양하기 위해 길을 떠났다. 특히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기념하기 위해 을묘년(1795년)에 진행한 대규모 행차를 한다. 정조대왕이 즉위 20년 해인 1795년 윤2월 9일부터 16일까지 8일간 혜경궁 홍씨의 회갑을 맞아 행한 것으로 '을묘원행'이라고도 한다.

한양 창덕궁을 출발하여 한강 지금의 노량진을 건너서 당시 경기도 시흥군(금천구)을 거쳐서 수원군에 있는 아버지 능인 융릉으로 가서 참배를 하였다. 능행 중에 수원 화성행궁과 시흥행궁에 머무르면서 백성들과 만나는 행사와 함께 정사를 보기도 하였다. 이는 정조가 1800년에 붕어(崩御)할 때까지 이어졌으며 정조는 붕어 후 아버지의 융릉 옆에 있는 건릉에 안장되었다.

수원의 행궁은 그 터가 확인되어, 복원되었지만 시흥군의 행궁 터는 정확한 위치가 연해 파악되지 않고 있다. 이는 지자체에서 좀 더 확실한 고증과 연구가 필요한 부분이다. 국가유산청은 행궁 터가 확인되지 않으면 추진하기 어렵다는 입장이다.

정조를 호위했던 채제공 남겼다는 시문에는 정확한 위치가 표시되어 있지 않지만, 일제에 의해 훼손된 것으로 짐작하는 위치는 여러 곳으로 짐작된다. 현재 버스 종점 부근이라는 말도 있고 관아가 있었던 은행나무를 주변으로 하는 지역이라는 점 등 금천구청에서는 도무지 어느 곳인지 이를 밝혀내려는 노력은 등한시하고 있다.

민족의 성도이고 효의 상징인 원행 길에 백성을 만나서 '격쟁'이라는 정무를 보았던 시흥행궁 금천구청은 서둘러 그 위치를 밝히는데 최선을 다하고 작금의 민주주의 성지로 복원시켜야 한다. 지자체 차원의 노력과 더불어 문화유산 학자들과 교류를 넓히고 그 위치를 가늠할 수 있는 모든 자료를 취합하여 이를 통한 정확한 위치 파악에 주력해야 한다.

원행 길에 대한 행사는 시흥행궁이 복원되지 않는다면 말 그대로 허울뿐인 행사로 전락할 것이다. 금천구의 발전을 위해서라도 금천구가 당시 서울 남부권의 중심도시였다는 것을 밝혀내려면 금천구는 시흥행궁 터 찾기에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덧붙이는 글 이 기사는 cpn문화유산에도 실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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