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고향 파주는 집안 어르신이 생신을 맞으면 동네 잔치를 했다. 넉넉한 집일수록 크게 벌였다. 그때마다 계란 한 꾸러미, 내복 두 벌, 신문지로 싼 고기 두 근, 정종 한 병 등이 선물로 들어왔다. 부모님 장롱에 백0, 쌍0울 같은 내복 상자가 몇 개나 쌓였다. 고무줄을 갈고 기워 입을지언정 좀처럼 새 내복을 입지 않으셨다. 관상용처럼 쳐다보면서 흡족해하셨다. 생신은 해마다 돌아오니 다음 해가 되면 새옷에 밀리는데도 말이다. 그 마음을 요즘에야 알겠다. 나도 새 양말을 사면 비닐 봉지를 벗기지도 않고 서랍에 넣어둔다. 보기만 해도 흐뭇하다. 아무리 조심스레 신어도 금방 때 묻고 늘어나서, 다른 낡은 양말과 똑같아지기 일쑤니 낡은 양말만 계속 신는다. 사람도 그렇지 않을까?하는 마음이 든다. 어떤 사람은 보는 것만도 아까운 사람이 있고, 어떤 사람은 늘 편해서 그냥 함부로 대하는 사람이 있다. 어쩌면 물처럼 공기처럼 티 내지 않고 편하게 있는 사람이 제일임에도 예쁘고 반짝이고 부수어지기 쉬운 사람을 중시하면서 그냥 떠받들고 산다. 쩔쩔매어도 그게 좋단다. 대지(펄벅)를 원서로 읽을 때였다. 번역책을 읽을 때는 빠르게 읽히니까 그런 마음이 덜했는데 원서로 천천히 읽으니 왕룽의 행동에 더욱 촉각이 세워졌다. 그 중 조강지처인 오란을 함부로 대하고 유곽의 여자였던 연화는 애지중지한다. 그리고 오란이 단 하나 지니고 있던 패물인 진주 귀걸이까지 뺏어다가 안긴다. 선택권을 준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까? 상자 속에, 비닐 속에 담겨서 관상용으로 기쁨을 주는 존재처럼 사는 삶이 좋을까? 낡았다고 하대해도 본연의 자기 역할을 하면서 포근함을 주고 늘 곁에서 필요한 존재처럼 사는 삶이 좋을까? 새것이면 새것인 대로, 낡았으면 낡은 대로 그 역할에 맞춰 자연스럽게 살다가 스러지는 삶이 제격이겠지만, 양말 하나도 때가 탈까 아끼는 마음을 지닐진대 다른 것은 말해 무엇할까? 자연스러운 마음을 잘 따르는 자연스러운 몸을 지니기란 참으로 지난하다. #양말 이 기사는 생나무글입니다 생나무글이란 시민기자가 송고한 글 중에서 정식기사로 채택되지 않은 글입니다. 생나무글에 대한 모든 책임은 글쓴이에게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