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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카방고 델타 하늘 위를 날으는 아프리카 물수리
 오카방고 델타 하늘 위를 날으는 아프리카 물수리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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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 여행 피로증에 걸리다

오카방고 델타에서 모코로 여행을 한 다음날은 여행 중 가장 귀찮은 날이었다. 오전 7시쯤 눈을 떴으나 정말 일어나기 싫었다. 벌써 여행이 50일을 넘기면서 전체 여행 일정의 3분의 2가 지나자, 긴장감이 풀리면서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왔다. 육체적 피로 뿐 아니라 정신적 피곤함이 겹쳐서 나를 주저앉히고 있었다.

새로운 것을 찾아 끊임없이 이동하기를 좋아하는 내가 이렇게 떠나기가 싫은 적은 없었다. 그냥 주저앉고 싶은 마음뿐이다. 몸이 천근만근 무거워진다. 땅이 나의 발을 붙잡는다. 20일째 한 번 느낀 여행 피로증이 50일이 되자 다시 찾아왔다. 여행을 가능하게 했던 내 마음 속의 다이너마이트 같은 힘은 어디로 사라졌는가.

가야할 길은 남아 있고, 발길은 바쁘다. 신발 끈을 다시 동여 메고 떨어지지 않는 발을 일으켜 세운다. 배낭을 메니 여행의 관성법칙이 작용한다. 마운 시내의 버스정류장에 가니 마침 수도 가보로네로 가는 직행버스가 있었다. 마운을 출발한 지 30여분 지나자 '마칼라마베디 가축검역소'가 나왔다. 모든 승객들이 내리고 신분증명서 검사를 한 뒤 다시 탑승한다. 역시 아프리카 물소 울타리인 '버펄로 펜스'가 쳐져 있었다.

도로 속도제한 표시판에는 "최고시속 120km"라고 되어 있다. 그만큼 도로 포장이 잘 되어 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는 최고 시속이 80km였다. 보츠와나는 나라 전체가 깨끗하고 깔끔하다. 이정표가 있다. 버스는 나타로 가는 길이 아니라, 라콥스와 오라파로 가는 오른쪽 길로 빠져 달린다. 나타와 프란시스타운을 거쳐 가는 것이 아니라, 지름길로 바로 가보로네로 가는 길이다. 중앙칼라하리사막을 세로로 종단해 내려간다.

보츠와나 국립공원 지도(가운데 파란 부분이 중앙칼라하리 동물보호구역)
 보츠와나 국립공원 지도(가운데 파란 부분이 중앙칼라하리 동물보호구역)
ⓒ 보츠와나 관광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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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인부족에게 내몰린 중앙칼라하리사막의 부시맨 산족

잠시 뒤 차는 라콥스(Rakops)에 도착했다. 중앙칼라하리 동물보호구역(중앙칼라하리 자연보호구역·Central Kalahari Game Reserve)'이라고 쓰인 팻말이 서 있다. 중앙칼라하리 자연보호구역으로 들어가는 마츠웨레 출입구로 가는 길목이다.

중앙칼라하리 동물보호구역은 바로 산족의 고향이다. 칼라하리사막에 사는 가장 유명한 부족으로 우리에게는 영화 <부시맨>으로 잘 알려진 부족이다. 덤불 속에 산다고 해서 부시맨(Bushman)으로 알려진 산(San)족은 주로 사냥을 통해 살아간다. 산족은 보츠와나에서는 츠와나어로 '바사르와(Basarwa)족'이라 불린다.

산족은 현재 5만5000명 정도 살아 있는데, 보츠와나의 중앙칼라하리 사막을 중심으로 60%가 살고 있고, 나미비아의 칼라하리사막에 35%, 그리고 5%정도는 앙골라 동남부와 남아공의 크갈라가디 트랜스프론티어 국립공원 주변에서 살아간다. 산족은 남부 아프리카의 원래 주인이었다. 석기시대인 2만 년 전부터 남아프리카 남동 바닷가에서 사냥과 고기를 잡으며 평화롭게 살고 있었다.

서기 1세기 무렵에는 북쪽에서 내려오는 반투족에 쫓기고, 14세기에는 남아공의 츠와나족(보츠와나 최대부족)으로부터, 19세기에는 백인 이주민으로부터 쫓기면서 가장 열악한 칼라하리사막으로 내몰렸다. 150cm로 키가 작은 산족은 황갈색의 주름진 피부에 광대뼈가 튀어나왔는데, 옛날 생활터전이었던 동굴 속에 많은 바위그림을 남겨 놓았다. 문자는 없었지만, 대신 그림으로 자신들의 삶을 표현했다.

산족은 왜 이처럼 다른 흑인부족과 백인들에게 쫓기는 신세가 된 것일까. 싸움다운 전쟁도 해보지 않고. 대규모 부족 단위로 모여 살지 않는 사회체제와 어찌 보면 그들의 온순한 성품 탓이다. 서너 가족이 공동으로 소규모 집단생활을 하다 보니 다른 흑인부족처럼 족장이나 추장이 없다. 문제가 생기면 전쟁이나 싸움보다는 대화와 타협으로 해결한다. 그들에게는 백인이나 다른 흑인이 적이 아니라 공존의 대상일 뿐이다.

산족의 유일한 천적은 가뭄이다. 야수의 얼굴을 한 백인 제국주의와 부족제일주의에 빠진 다른 흑인들에게 인간의 얼굴을 한 산족이 외치는 평화와 공존은 약자의 비굴함으로 들렸을 뿐이다. 무리를 지어 패를 가르지 않고, 자신의 목적을 위해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산족에게 설 땅이 없었다. 아프리카의 그 척박한 사막조차에서도.

나무와 풀로 지은 보츠와나의 둥근 전통집인 론다벨(Rondavel)
 나무와 풀로 지은 보츠와나의 둥근 전통집인 론다벨(Rondavel)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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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족이 중앙칼리하리사막에서 쫓겨난 이유는...

서양 영화의 구경거리로 전락했던 산족이 최근 다시 국제적 관심을 끌기 시작했다. 보츠와나 정부가 이들을 중앙칼라하리 동물보호구역에서 내쫓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보츠와나 정부는 지난 1995년부터 산족을 중앙칼라하리 동물보호구역 밖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보츠와나 정부가 내세우는 이유는 자연호보구역 안의 관광자원인 야생 동물보호.

그러나 실제 이유는 산족이 사는 칼라하리사막에 매장된 것으로 추정되는 엄청난 양의 다이아몬드 때문이라는 국제적 비판을 받았다. 다이아몬드 탐사에 이들이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실제로 산족이 사는 중앙칼라하리 동물보호구역 인근에 세계적 다이아몬드 산지인 오라파(Orapa) 광산이 있다. 백인과 다른 흑인에 이어 이제는 다이아몬드에 의해 산족은 마지막 고향에서 쫓겨 나고 있다.

유엔과 국제민간단체 등이 산족을 돕기 위해 나섰다. 유엔인종차별철폐위원회(UNCERM)는 지난 2002년 8월 산족에 대한 토지 박탈과 편견적 차별에 우려를 표시했다. 전통적인 삶의 터전과 방식을 잃어버릴 뻔 했던 산족은 결국 정부를 상대로 한 싸움에서 이겼다. 내가 여행을 하고 돌아온 뒤 언론을 통해 산족이 보츠와나 정부를 상대로 한 법적 소송에서 승소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산족은 2006년 12월 국제적 민간단체의 지원 등으로 "정부의 강제 이주정책은 불법"이라는 법원의 판결을 끌어냈다. 칼라하리사막의 고향으로 되돌아 갈 수 있는 희망이 생겼다. 그러나 보츠와나 정부는 판결 이후에도 산족이 가축을 데리고 돌아가는 것을 막고 있다. 사냥을 할 수 없는 산족에게 가축은 살아가는 데 필수적이다. 야생 동물보호를 내세워 사냥을 하지 못하도록 하면서 가축도 데려가지 말라는 정부의 속셈은 무엇인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말거나, 아니면 고향으로 돌아가 굶어 죽으라는 불순한 의도이다.

보츠와나 정부는 지난 2002년에는 산족을 내쫓기 위해 마을 우물을 폐쇄하기도 했다. 탄자니아 세렝게티 초원의 마사이족처럼 산족들도 가축사육과 함께 산족 마을의 관광 상품을 통해 더 나은 삶을 살아갈 수 있지 않을까. 산족의 전통문화를 유지하면서 야생 동물을 보호하는 일을 결코 모순되는 일이 아니다. 누구하고라도 배척보다는 공존을 좋아하는 산족이라면 충분히 해낼 수 있겠지. 정부가 방해하지 않고, 도움을 준다면.

오카방고 델타와 모코로 나무배
 오카방고 델타와 모코로 나무배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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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아몬드의 도시 오라파

모피피라는 지역을 지나자 '도로공사 주의(ROAD WORK AHEAD)'라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앞서가는 도로 행정이다. 2차선 도로에 아스팔트를 까는 공사를 하고 있었다. 르완다에서 대학살 현장을 찾아가는 길에서도 도로공사에 먼지가 날리지 않도록 물을 뿌리고 있었다. 보츠와나나 르완다에서나 볼 수 있지,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아예 도로에 신경을 쓰지 않을 뿐 아니라, 돌멩이 몇 개로 공사표지를 해놓았다.

얼마 되지 않아 오라파(Orapa)가 나왔다. 1967년 세계적 규모의 다이아몬드 광산이 발견된 곳이다. 오라파의 다이아몬드 발견은 보츠와나 경제를 빠르게 성장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다이아몬드 도시인 오라파는 나미비아 뤼데리츠의 다이아몬드 광산지역과 마찬가지로 도시 전체가 철조망으로 둘러 처져 있다. 다이아몬드 산업발전을 위해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는 것이다.

중앙칼라하리사막의 도로 중간에 있는 정류장에는 간이매점이 있었다. 나는 닭고기와 감자튀김을 사서 차안에서 점심으로 때웠다. 또 다시 가축검역소가 나왔는데, 가보로네로 가는 도중 몇 차례 더 가축검역소와 검문소가 있었다. 내가 탄 차량은 '마르코폴로(MARCOPOLO)'사의 65인승 대형버스였다. 말라위에서 모잠비크를 거쳐 짐바브웨 하라레로 가는 버스도 같은 회사 버스였다. 남아프리카의 대형버스는 대부분 남아공 자동차 회사인 마르코폴로사 제품이었다. 그러나 정작 남아공에서는 볼 수 없었다.

세로웨라는 마을이 나타났다. 현대식 건물에 깨끗하고 정돈된 도시이다. 낮은 언덕을 따라 아담한 집들이 들어서 있다. 1902년 은과토족의 카마 3세 왕이 세로웨로 이주해온 이래 은콰토족의 수도였다. 보츠와나는 다른 아프리카와 달리 도로포장 등 인프라가 잘 갖춰져 있다. 버스정류장도 깨끗한 현대식 건물이고, 대형 슈퍼마켓도 많이 있다.

나미비아 솔리테어에서 웰비스 베이로 가는 길의 남회귀선 표지판
 나미비아 솔리테어에서 웰비스 베이로 가는 길의 남회귀선 표지판
ⓒ 로렌스 스미스(나의 우간다 여행 동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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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회귀선을 지나면서 종교와 과학을 생각한다

팔라피에를 거쳐 마할라피에를 지나자 특이한 팻말이 도로에 서 있다. '남회귀선(Tropic of Capricorn)'이란 표지판이다. 나는 아프리카 종단 여행을 하면서 우리나라에서는 할 수 없는 적도와 남회귀선을 통과하는 색다른 경험을 했다. 적도와 남회귀선은 지리교과서를 통해 머릿속에만 있었지, 눈으로 보는 것은 처음이다. 눈으로 봐야 만져지지, 머리로만 생각하면 피부에 와 닿지가 않는다. 머릿속에서 빙빙 돌다 개념 자체가 사라져 버린다.

적도와 남회귀선이 그렇다. 적도는 푹푹 찌는 더위로 다가오고, 남회귀선은 미국 작가 헨리 밀러의 <북회귀선> <남회귀선>으로 떠오른다. 나는 아프리카에서 적도와 남회귀선을 내 머릿속이 아니라, 내 눈으로 보았다. 적도는 케냐와 우간다에서 두 번 버스를 타고 지나가고, 남회귀선은 보츠와나와 나미비아에서 4번에 걸쳐 통과했다. 물론 그중에 세 번은 깊은 밤에 버스를 타고 가다 잠결에 지나쳤지만.

남회귀선은 열대와 온대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남위 23° 27'(23도 27분)의 위선을 말하는데,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경사도와 같다.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지지 않았다면 태양은 항상 적도를 수직으로 내리 쬘 텐데, 지구의 지축이 23° 27' 기울어 자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돌게 되니 태양이 수직으로 내리쬐는 지역이 바뀌게 된다. 태양이 지구에 대해 수직으로 비추는 남쪽 끝이 남회귀선이고, 북쪽 끝이 북회귀선이다.

우리 북반구에서는 태양이 남회귀선에 수직으로 햇볕을 내리 쬘 때를 동지라 부르고, 거꾸로 북회귀선에 수직으로 떠 있을 때를 하지라 부른다. 태양은 남회귀선보다 절대 밑으로 내려가지 않고, 북회귀선보다 더 위로 올라가지 않는다. 태양은 바로 북회귀선과 남회귀선 사이에 있는 지역을 1년 마다 왔다 갔다 하면서 수직으로 지구를 비추는 것처럼 보이게 된다.

물론, 태양은 움직이지 않고 지구가 자전하면서 태양 주위를 도는 공전을 한다. 설마 내가 지동설을 모르겠는가. 500여 년 전만 해도 옛날 사람들은 태양이 지구를 돈다는 천동설을 믿었다. 종교가 지배하던 당시에는 하느님이 창조한 인간이 사는 지구를 중심으로 모든 것이 돌아간다는 창조론만이 진실이었다. 아니, 진실로 받아들이도록 강요되었다.

이탈리아 천문학자 갈릴레오 갈릴레이는 코페르니쿠스의 지동설을 따랐다가 종교재판에 끌려갔다 나오면서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외쳤다. 종교가 종교의 영역을 넘어서 정치로 들어올 때 십자군 전쟁이 일어났고, 과학의 영역으로 침범하면서 진리의 입을 막아버렸다. 정교일치 국가인 중동의 일부 이슬람국가에서 벌어지는 인권침해와 여성차별 등도 종교가 정치의 영역으로 넘어오면서 일어나는 치명적 후유증이다. 칼이 부엌에 있으면 식칼이 되지만, 부엌을 떠나면 흉기가 되는 법이다. 모든 것은 제 자리에 있을 때 빛을 발한다.

지구의 지도상에는 5개의 중요한 위도선이 있는데, 남극과 북극(66° 33′), 남회귀선과 북회귀선, 적도선(0°)이다. 적도와 남회귀선은 우리가 사는 북반구에서 볼 수 없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적도와 남회귀선을 그냥 지나치는 것은 평생에 다시 못 볼 기회를 놓치는 셈이다.

보츠와나 추장 특사 3인이 새겨진 100풀라 지폐
 보츠와나 추장 특사 3인이 새겨진 100풀라 지폐
ⓒ 뱅크노트닷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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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의 독립을 지킨 '보츠와나판 헤이그 특사 3총사'

남회귀선을 지나면서 수도인 가보로네는 훨씬 가까이 다가왔다. 가보로네 입구에 들어서자 왕복 4차선 넓은 도로 중앙에 있는 가로등 2개가 양쪽 도로를 밝게 비춘다. 12시간이나 걸려 도착한 시각은 저녁 7시 30분. 현대식 건물이 높이 솟은 가보로네 시내는 어둠이 짙게 깔렸다. 버스에서 내려 택시를 타고 여행객숙소인 보이케틀로 게스트하우스로 갔다. 숙소의 저녁식사에 호박 찐 것이 나와 맛있게 먹었다. 아프리카 호박에서도 옛날 어릴 적 시골에서 어머니가 쪄 주던 그 맛이 났다.

겨울에 우리는 점심을 호박과 고구마로 때웠다. 그때는 시골에서 다 그랬다. 고구마는 너무 텁텁해서 목구멍으로 잘 넘어가지 않아 시원한 동치미국물이 필요했지만, 호박죽은 달면서 부드럽게 잘 넘어가고 고구마와 달리 소화도 잘된다. 나는 지금도 서울의 백화점 지하 음식점 코너에 가면 제일먼저 호박죽 가게로 간다. 아프리카에서는 호박을 그냥 쪄서 고구마처럼 숟가락으로 파먹는다.

가보로네는 1966년 영국의 보호령인 '베추아날란드'에서 보츠와나라는 이름으로 독립하면서 수도로 건설되었다. 40여년 밖에 안 된 신생 도시이다. 보츠와나의 원주민은 나미비아와 마찬가지로 부시맨으로 알려진 산족과 호텐토트로 알려진 코이코이족인데, 최근에는 언어계통이 같기 때문에 산족과 코이코이족을 합쳐 코이산족으로 부른다. 호텐토트(Hottentot)라는 말은 네덜란드어로 '말을 더듬는 사람'이라는 뜻으로, 초기 네덜란드 백인이주민들이 얕잡아 부른 말이다.

보츠와나 독립에서 중요한 인물은 츠와나족의 3인 추장이다. 3인의 추장은 현재 보츠와나의 100풀라 지폐에 얼굴이 그려져 있는 카마 3세와 바토엔 1세, 세벨레 1세다. 역시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의 손길이 보츠와나에 뻗쳤다. 남아공의 네덜란드 출신 백인이주민인 보어인들이 침략해 오자 당시 추장들은 1885년 영국에 보호령을 요청했다.

베추아날란드라는 영국 보호령 아래 자치권을 행사하고 있었으나 이번에는 금광을 노리던 세실 로즈가 '영국남아프카회사'에 강제 합병하려고 나섰다. 베추아날란드의 츠와나족 3인 추장이 1895년 영국에 파견되었다. 보츠와나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영국의 도움을 청하러 런던에 파견된 특사였다. 영국의 보호령 아래 그대로 있게 해달라는 요청이었다. 19세기 유럽제국주의 앞에 힘없는 약소국의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일본 제국주의 침략 앞에 국가의 운명이 흔들리던 우리 구한말 시대와 너무나 닮았다. 조선의 독립을 국제사회에 호소하기 위해 1907년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열린 만국평화회의에 파견됐던 헤이그 특사사건을 떠올리게 한다. '헤이그 특사 3총사'였던 이준과 이상설, 이위종. 카마 3세 등은 '보츠와나판 헤이그 특사 3총사'이다. 조선의 특사 파견은 결국 실패해 나라를 일본에 빼앗겼으나, 보츠와나는 성공해 그대로 영국의 보호령으로 있다가 1966년 완전독립을 이루게 된다.

오카방고 델타에서  모코로 삿대질을 하는 바예이족 여인
 오카방고 델타에서 모코로 삿대질을 하는 바예이족 여인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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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식 도시 가보로네

가보로네에서 하룻밤을 보낸 나는 다음날 아침 일찍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인터케이프 버스정류장은 숙소에서 5분도 안 걸리는 거리인데, 한참을 헤매다 간신히 찾았다. 새벽 6시, 어둠이 시내를 여전히 감싸고 있어 어느 건물인지 제대로 분간이 안 되었기 때문.

내가 탄 인터케이프는 깨끗한 대형 고속버스다. 아프리카 여행 중 처음으로 제대로 된 고속버스를 탔다. 좌석 45명만 태우고 입석은 물론 없다. 가운데 통로가 있고 좌우 양쪽으로 좌석 2개만 있고, 앞 뒤 좌석 공간도 넓고, 좌석 밑 공간도 충분해 배낭을 짐칸에 놓지 않고 좌석 밑에 넣고 갈 수 있었다. 의자도 안락의자다. 다른 아프리카의 대중버스가 한 줄에 보통 좌석 5개에 입석을 꽉 채우는 것과는 달랐다.

깨끗한 제복을 입은 안내양이 마이크로 안내방송을 하고, 승객들도 떠들지 않고 조용하다. 중간에 승객을 태우는 경우도 없다. 반드시 표를 사무소에서 미리 사야 한다. 출발과 도착시간도 엄격히 지킨다. 마치 완행열차를 타다가 새마을 열차를 건너뛰고 바로 케이티엑스(KTX) 고속열차를 타는 느낌이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나미비아 웰비스 베이와 다시 나미비아에서 남아공 요하네스버그로 되돌아 올 때도, 인터케이프는 나의 편안한 발이 되어 주었다. 남아공을 중심으로 나미비아와 보츠와나의 가보로네를 가는 데는 인터케이프는 여행객들에게 가장 편리한 교통수단이다.

가보로네 시내도 어둠이 거치면서 제 모습을 드러냈다. 가보로네는 도시 건물이나 포장도로, 대형버스 운행 등이 완전히 유럽식이다. 보츠와나와 나미비아는 오래전부터 남아공의 영향을 받아 남아공과 시스템이 비슷하다. 남아공이 형님 같고, 보츠와나와 나미비아는 동생 같다. 이들 3개국은 '남아공 3총사'다. 동부아프리카에서 남부아프리카로 종단여행을  하다 보면 남아공 3총사는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확연히 다르다는 걸 알게된다.

대통령 비판 글을 실은 2006년 8월 4일자 <보츠와나 가디언>신문
 대통령 비판 글을 실은 2006년 8월 4일자 <보츠와나 가디언>신문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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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기사를 싣는 보츠와나 신문의 '용기'

버스 안에서 보츠와나 영자신문 <보츠와나 가디언(Botswana Guardian)>를 읽다가 깜짝 놀랐다. 버스를 타기 전 정류장 매점에서 나는 3.25풀라를 주고 신문 한부를 샀다. 국제면 기사에 짐바브웨가 최근 화폐개혁과 함께 국경에 민병대를 배치해 화폐유출을 막고 있다는 기사였다. 내가 떠나온 지 1주일사이에 짐바브웨는 화폐개혁으로 엄청난 소용돌이를 치고 있었다. 짐바브웨를 일찍 탈출한 것을 위안으로 삼았다.

또 나를 놀라게 하는 기사가 나왔다. '여론난(Opinion)'이었다. "모가에는 진실을 말하고 있지 않다"는 제목의 내용이다. '모가에'가 누구인가. 바로 현 보츠와나 대통령인 페스투스 모가에(Festus Mogae)를 말하는 것이다. 내용의 요지는 "모가에 대통령이 바사르와족(산족)에 대한 중앙칼라하리 동물구역로부터의 강제 이주에 대해 사실과 다른 말을 하고 있다"는 산족 보호를 위한 국제민간단체인 '서바이벌(Survival)'의 반박문이다.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내용의 글을 실은 신문의 용기가 대단하다. 짐바브웨 유력지라는 영자신문 <더 헤럴드>의 어용적 보도태도와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언론의 보도태도를 보면 그 나라의 민주주의 척도를 알 수 있다. 현직 대통령을 비판할 수 있을 정도로 보츠와나는 언론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누리고 있는 대표적인 아프리카 국가다. 보츠와나는 경제성장 뿐 아니라 국가 경쟁력과 환경지수, 공공기관 평가 등에서 아프리카 국가 중에서 가장 앞서 있다. 국제적 신용등급에서도 우리나라와 같은 수준이고, 그동안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웠던 세계적 에이즈 감염율도 상당히 줄어들고 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와 달리 부족 간 갈등이 거의 없고 독재 우려가 없는 정치적 안정이 경제성장과 언론자유, 민주주의 신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지난 1948년 대추장의 후계자인 세레체 카마가 영국 유학 중 백인여성과 결혼했다는 이유로 영국이 그를 추방시켜 정치적 혼란이 빚어졌으나, 1956년 카마의 귀국과 정치활동을 보장함으로써 안정을 누려왔다.

초대 대통령인 카마의 뒤를 이은 케투밀레 마시레 대통령이 4선 재임 중 1998년 스스로 장기 집권을 포기하고 물러남으로써 보츠와나 민주주의의 발판을 마련했다. 보츠와나는 그 후 5년 임기에 재선까지 허용하는 헌법개정을 통해 장기집권을 제도적으로 막았다. 보츠와나는 나미비아와 마찬가지로 의회에서 간선으로 대통령을 뽑는다.

소화되지 않은 채 나무가지가 그대로 배설된 코끼리 똥
 소화되지 않은 채 나무가지가 그대로 배설된 코끼리 똥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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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의 눈물>에 나오는 카센터와 도로 찾아봤는데...

내가 탄 버스는 시내의 '틀로크웽 거리(Tlokweng Road)'를 지나고 있었다. 남아공 국경으로 빠지는 길이다. 나는 틀로크웽 거리에 '스피디 모터스' 자동차 정비소가 있는지를 버스 차창을 통해 찾아보았다. 그러나 스피디 모터스란 이름의 정비소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첫 여행지인 에티오피아로 가는 도중 중간 기착지인 남아공의 요하네스버그 공항에서 여행 중 읽기 위해 몇 권의 영문 책을 샀다. 그중의 하나가 바로 보츠와나 가보로네를 배경으로 하는 탐정소설 <기린의 눈물(Tears of the Giraffe)>(2006년·영국 아바쿠스출판사)이었다.

짐바브웨 출신의 백인으로 보츠와나에서 살기도 했던 알렉산더 맥콜 스미스가 쓴 <기린의 눈물>은 탐정소설 '넘버원 여탐정 에이전시' 시리즈의 두 번째 책이다. 보츠와나와 짐바브웨의 아름다운 자연을 배경으로 자연스럽게 글을 전개하는 부담 없는 탐정소설이었다.

탐정소설의 반전 보다는 오히려 아프리카의 자연과 전통, 아프리카인들의 진솔한 이야기를 담담하게 표현하고 있었는데, 틀로크웽 거리의 '스피디 모터스'는 여주인공인 보츠와나 최초의 사립 여탐정인 음마 라모츠웨의 약혼자인 마테코니가 소유한 카센터 이름이다. 혹시 나는 실존하는 카센터인가 찾아보았으나 역시 소설 속 가상의 카센터였다.

두 번째 내가 찾으려던 '얼룩말 도로(Zebra Drive)'도 보이지 않았다. '얼룩말 도로'는 소설의 여주인공인 음마 라모츠웨가 살고 있는 집 앞의 도로 이름이다. 아프리카답게 참 멋있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여주인공 라모츠웨가 약혼자인 마테코니와 보금자리를 꾸미기로 한 집이기도 하다. 아프리카 대도시를 다니면서 동물의 이름을 딴 거리의 이름을 거의 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가보로네에서 '얼룩말 도로'를 잔뜩 기대했었다.

아프리카에 이런 도로 이름이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높은 빌딩이 들어서 하늘을 가리는 도로는 '기린 도로', 교외의 큰 대로변은 '코끼리 도로', 바위가 있는 작은 언덕길은 '이구아나 도로', 강물이 흐르는 강변도로는 '악어 도로', 늪지대의 웅덩이 도로는 '하마 도로', 시내 중심가의 가장 큰 도로는 '사자 도로', 큰 도로의 샛길 도로는 '하이에나 도로', 좁은 골목길 같은 작은 도로는 '가젤 도로'….

내 머릿속에 상상으로 그린 가장 아프리카다운 도시의 거리 이름이다. 도로의 특징과 사파리 동물의 특성을 연결시켜 아프리카 도로에 아프리카 동물 이름을 붙여 보았다. 내가 아프리카 도시를 여행하면서 동물 이름이 붙은 거리를 본 것은 오카방고 델타의 전초기지인 마운에서 보았던 '쿠두 도로(Kudu Street)' 뿐이다.

'기린의 눈물' 문양을 새겨 넣은 보츠와나 전통공예품 바구니
 '기린의 눈물' 문양을 새겨 넣은 보츠와나 전통공예품 바구니
ⓒ 보츠와나 공예품판매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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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린이 눈물을 흘리는 이유는...

내가 많고 많은 요하네스버그 공항의 책 중에서 <기린의 눈물>에 손이 간 것은 사실 제목 때문이었다. 실제 기린도 우는 것인가. 왜 기린이 눈물을 흘리는 것일까, 외로워서, 아니면 다리가 아파서. 탄자니아 세렝게티 초원에서 기린은 저 멀리 떨어져 혼자서 풀을 뜯거나 걸어 다녔다. 친구가 없다보니 외로울 수도 있다. 그리고 그 큰 덩치를 가는 다리로 버티려면 다리 관절에 무리가 올 법도 하다.

탐정소설의 제목인 <기린의 눈물>은 보츠와나의 전통 바구니 문양에서 따왔다. 보츠와나는 일상용품인 바구니와 항아리, 섬유제품에 '기린의 눈물' '황소의 오줌자국' '얼룩말의 이마' '제비의 비상' '거북의 무릎' 등을 상징하는 문양의 디자인을 새겨 넣는다. '기린의 눈물'은 바구니에 여러 개의 점이나 평행선으로 표현되는데, 사냥에 나서는 남자를 뒤따라가는 여자를 의미한다. 삼각형의 상징적 문양으로 그려지는 '참새의 비상'은 '풀라(비)'를 불러 오는 행운을 의미한다. '황소의 오줌자국'은 지그재그 선으로 표현된다.

작가가 왜 소설 이름을 <기린의 눈물>로 했는지는 끝에 나온다. 여주인공 음마 라모츠웨는 "우리는 누구나 남에게 뭘 줄 수 있는데, 기린은 달리 줄게 없잖아요. 눈물밖에"라고 말한다. 작가의 상상일 뿐이다. 아마도, 기린의 눈물을 통해 인간의 아픔, 특히 삭막한 칼라하리 사막에서 살아가야 하는 산족 여인네의 아픔을 바구니 속에 담은 것이 아닐까. 아프리카 여행하면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재미난 탐정소설이다.

가보로네 시내를 빠져나온 버스는 30분 정도 달려 남아공과의 틀로크웽(Tlokweng) 국경에 도착했다. 보츠와나 국경사무소는 현대식 건물에 매우 크고 넓다. 환전소가 있어 남은 100풀라를 줬는데, 남아공 돈으로 110랜드(Rand)로 바꿔준다. 보츠와나의 1풀라가 남아공의 1랜드보다 가치가 높다.


태그:#보츠와나, #부시맨, #산족, #칼라하리사막, #가보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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