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보츠와나 국경을 넘어 남아공 출입국사무소에서 입국신고를 하는데, 처음으로 별도의 비자를 받지 않고 그대로 통과했다. 남아공은 우리나라와 비자면제 협정국가여서 비자 없이 여권만으로 입국할 수 있다. 비자 없이 입국수속을 밟으니 편리하다. 비자는 여행에서 가장 신경 쓰이는 일이다. 남아공 쪽에는 개인 환전상이나 행상들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보츠와나 국경을 넘어 남아공에 들어서자마자 마치 유럽에 온 듯 착각이 들 정도이다. 보츠와나도 다른 동부 아프리카에 비하면 훨씬 앞서 있는데, 남아공은 국경선 하나 차이로 보츠와나와도 너무나 달랐다. 신형 차량뿐 아니라 도로의 포장상태나 도로 팻말, 주변의 집과 건물들도 모두 현대식의 깨끗한 시멘트 건물들이다.

어디에도 동부아프리카에서 보아왔던 모습들은 볼 수 없었다. 폐기처분 일보직전의 오래된 구식 자동차와 비포장도로, 둥근 형태의 아프리카 전통적인 오두막 흙집인 론다벨(Rondavel), 땔감을 머리에 이고 가는 아낙네들, 빵과 과일, 물고기를 파는 길거리의 행상들은 먼 나라의 얘기처럼 남아공에 들어서는 순간 완전히 사라졌다.

'아프리카의 유럽' 남아공에 들어서다

땅도 기후도 다르다. 보츠와나의 작렬하는 뜨거운 햇살과 끝없는 사막지대는 뒤로 밀려 났다. 봄날의 따뜻한 날씨가 나를 반기고 언덕과 푸른 나무, 작은 산들이 나타났다. 보츠와나 마할라피에의 남회귀선을 지나면서 열대건조지대에서 온대성기후대로 바뀌었다. 내가 지나온 아프리카 국가의 기후는 여러 가지 요인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적도와 남회귀선을 중심으로 한 위도와 지역의 해발고도, 인도양과 대서양의 거리 등에 따라 다양한 기후대를 보였다.

적도인데도 고도가 낮은 가봉과 카메룬, 콩고민주공화국 등 서부아프리카는 고온다습한 전형적인 열대성 기후를 나타내지만, 지대가 높은 동부 고원지역인 에티오피아와 케냐, 우간다, 르완다, 탄자니아, 짐바브웨 등은 서늘한 고산기후대를 보이며, 칼라하리사막의 보츠와나와 나미비아는 건조성 기후대, 남아공은 온대성기후대로 나눠진다.

국경에서 1시간 정도 가자 작은 도시가 나왔다. 니에트베르디엔드라는 도시이다. 미국의 세계적 패스트푸드점인 ‘케이에프시(KFC)’도 있고, 현대식 주유소도 보이고, 도로변의 슈퍼마켓 등도 마치 유럽이나 미국의 도시를 온 것 같은 느낌을 준다. 버스가 속도를 내면서 왼쪽으로 그리 높지 않은 작은 산과 호수가 보이고, 오른쪽에는 오렌지 재배 단지들이 보이는데 농가들도 목가적인 유럽풍 전원주택이다.

땅도 다르고, 기후도 다르고, 차도 다르고, 도로도 다르고, 집들도 다르고 남아공은 모든 것이 다르다. 에티오피아에서 케냐와 우간다, 콩고민주공화국, 르완다, 탄자니아, 잔지바르, 말라위, 모잠비크, 짐바브웨, 잠비아, 보츠와나 등을 거쳐 왔지만, 이렇게 다를 수가 없다. 남아공은 땅은 아프리카 대륙에 있지만, 겉모습은 유럽 국가이다. 남아공의 도시는 대부분 식민지 시절 영국과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건설했기 때문에 도로와 철도 등 모든 인프라와 집, 건물 등을 유럽식으로 지은 것.

요하네스버그 업저버토리 애브뉴 거리의 주택가 모습
 요하네스버그 업저버토리 애브뉴 거리의 주택가 모습
ⓒ 김성호

관련사진보기


3시간마다 교대하는 남아공 버스 운전사들을 보니 생명의 안도를 느낀다

버스의 여자 승무원이 커피를 차안에서 서비스해준다. 커다란 쓰레기봉투를 들고 승객들이 마신 종이 커피 잔과 콜라병, 음식물 등 쓰레기를 수거해간다. 다른 아프리카에서는 쓰레기를 그냥 길거리에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버스는 정확히 3시간을 달린 뒤 그루트 마리코(Groot Marico)라는 도시의 주유소 겸 슈퍼마켓에 다시 정차했다. 여승무원이 미리 휴게소에서 20분간 정차한다고 알려준다. 미국 고속도로의 휴게소와 같은 주유소와 슈퍼마켓, 화장실 등을 갖춘 최초의 정식 버스 휴게소이다.

버스가 출발할 때 보니 흑인운전사 대신 백인 운전사가 운전석에 앉았다. 3시간마다 운전사가 교대한다. 흑인운전사가 먼저 운전한 뒤 뒷좌석에 타고 있던 백인운전사가 교대해 운전대를 잡는다. 보츠와나 가보로네에서 승객들이 탑승할 때 승차권을 검사했던 백인 남자는 승무원이 아니라 바로 운전사였던 것이다. 여자 승무원은 승객 서비스를 담당하고, 승차권 검사는 운전하지 않는 다른 운전사가 승무원 역할까지 하고 있었다. 나의 생명을 10시간 이상 혼자서 운전대를 잡은 아프리카의 젊은 운전사에게 맡겨야 했던 동부 아프리카와는 다르다.

톨게이트에서 만난 '삼성'

요금을 받는 고속도로 톨게이트가 나왔다. 요하네스버그로 가는 고속도로에 들어섰다. 아프리카에서 요금을 받는 도로는 처음이다. 톨게이트 위에 설치된 건물의 환기용 에어컨을 보니 영어로 우리나라 대기업 '삼성(Samsung)'이라는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고원지대를 달리던 버스가 언덕길을 내려오자 루스텐버그(Rustenburg)에 도착했다. 마갈리스버그 산맥의 끝자락을 달려왔다. 언덕 위에 십자가가 세워져 있고, 그 밑에 '1838-1938'이라는 숫자가 새겨져 있다. 루스텐버그는 초기 네덜란드계 백인들인 아프리카너(Afrikaner, 또는 보어인(Boer))에 의해 건설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희생된 아프리카너들을 추모하거나 보어인들이 세운 네덜란드개혁파 교회의 역사를 말하는 것 같았다.

붉은색 지붕과 푸른색 지붕의 벽돌집이 나란히 들어서 있어 유럽의 전원주택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루스텐버그는 아프리카너의 언어인 아프리칸스(Afrikaans)로 ‘휴식의 도시(Town of Rest)’라는 뜻이다. 고속도로가 이중삼중으로 연결된 교통의 요지였다. 주유소 겸 휴게소에서 하차할 사람은 내려주는데, 버스 짐칸에서 짐을 내려 줄때 운전사와 여자 승무원이 일일이 꼬리표를 확인하고 승객으로부터 짐을 받았다는 표시로 사인을 받고 있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에서는 도난 우려 때문에 배낭을 짐칸에 넣지 못하고 항상 무릎 위에 올려놓고 타야 했다. 좁은 공간에 사람에 치이고 배낭에 신경쓰다 보니 고생이 말이 아니다. 남아공만 같다면, 일년 내내 편히 배낭여행을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너무나 험한 여정을 달려왔기 때문에 동아프리카 여행과 비교하면, 솔직히 남아공은 배낭여행객에게 식은 죽 먹기이다.

도로 표지판도 완전 미국과 유럽식이다. 'R24 크루거스도프(Krugersdorp)'와 '1230 더비(Derby)' 등으로 도로가 숫자로 표시되어 있다. 찾기가 쉽다. 도로 곳곳에 지역 이름과 호텔, 게스트하우스, 시민센터, 유적지 팻말들이 구체적으로 표시되어, 버스를 타고 가면서도 지역의 특성을 한 눈에 알 수 있다. 크루거스도프는 옛날 남아공연방이 구성되기 전 아프리카너들의 독립국이었던 트란스발 공화국의 대통령이었던 폴 크루거의 이름을 딴 광산도시이다. 모잠비크와 접해 있는 남아공 최대의 크루거 국립공원을 비롯해 남아공의 크루거라는 지명은 대부분 폴 크루거의 이름을 딴 것이다.

츠와니 추장의 구리상
 츠와니 추장의 구리상
ⓒ 츠와니시

관련사진보기


행정수도 프리토리아의 이름이 츠와니로 바뀐 이유

버스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요하네스버그에 다다랐다. 힐팍스와 트레이트센터라는 이름의 중저가 대형 쇼핑몰이 보였기 때문이다. 이런 대형 쇼핑몰은 대개 대도시 교외에 있어 요하네스버그가 그리 멀지 않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왼쪽으로는 ‘프리토리아 북쪽’이라는 표시판과 오른쪽으로는 ‘블룸폰테인 북쪽’이라는 표시판이 있는데, 버스는 프리토리아와 반대인 아래쪽의 블룸폰테인 표시판이 있는 곳으로 꺾어 달린다.

위쪽의 프리토리아는 대통령 집무실과 행정부처가 있는 남아공의 행정부 수도이다. 옛날 백인인 아프리카너(보어인)들이 영국의 케이프식민지와 별도로 1852년 세운 트란스발 공화국의 수도였던 프리토리아는, 짐바브웨의 하라레와 같이 봄에 가면 보라색 자카란다 꽃이 활짝 핀 멋진 장면을 볼 수 있다고 하여 ‘자카란다 시티’라고도 불린다. 자카란다 꽃은 남아공 토착식물은 아니고, 처음 브라질과 호주에서 들여와 가로수로 심었는데 아프리카 토양과 궁합이 맞으면서 지금은 오히려 아프리카의 상징 꽃이 되었다.

행정부 수도의 이름이었던 프리토리아는 지난 2005년 ‘츠와니(Tshwane)’로 이름이 바뀌었고, 프리토리아는 츠와니의 한 구역(우리의 구) 이름으로만 남아 있다. 예전 이름 프리토리아(Pretoria)는 옛 아프리카너의 트란스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M. W.프레토리우스(Pretorius)가 자신의 아버지 A.프레토리우스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이다.

새로운 이름인 ‘츠와니’는 백인들이 오기 전에 살고 있던 프리토리아 지역의 흑인 원주민 지도자인 추장 이름이다. 츠와니 시청은 ‘츠와니’는 “우리는 같다”는 뜻이라고 설명해 흑백의 공존과 화합을 상징하는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다. 17세기 츠와나족과 은데벨레족의 전통의상을 입은 모양의 츠와니 추장의 구리상이 시청 앞에 세워져 ‘프리토리아’에서 ‘츠와니’로 새롭게 탄생한 도시의 상징으로 자리잡고 있다.

‘프리토리아’에서 ‘츠와니’로 수도 이름을 변경한 것은 인종차별 정책인 아파르트헤이트 백인정권이 종식된 이후 지난 1994년 최초의 다수파 흑인정권이 들어선 민주화 이래 펼치고 있는 ‘남아공판 역사 바로 세우기’의 하나이다. 옛날 백인들이 멋대로 붙인 유럽식 이름을 흑인의 역사 관점에서 아프리카식 전통 이름으로 바꾸고 있다. 츠와니 시장이 이름 변경에 대해 “아파르트헤이트의 죽음과 민주주의 탄생”이라고 의미를 부여한 것은 정확한 의도를 보여주고 있다.

프리토리아를 츠와니로 바꾸고, 츠와니와 요하네스버그 등이 포함되는 주의 이름을 옛날 트란스발에서 가우텡으로 바꾸고,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의 이름도 O. R. 탐보 국제공항으로 바꾸었다. 새로운 국제공항 이름은 ‘아프리카민족회의(ANC)’의장을 역임한 탐보(1917~1993)를 기리기 위한 것. 그는 넬슨 만델라 남아공 전 대통령과 함께 아파르트헤이트 철폐를 위해 평생을 바친 대표적 인물이다.

인도양에 접해 있는 콰줄루-나탈 주의 항구도시인 더반에 있는  ‘더반 국제공항’의 이름도 ‘킹 샤카 국제공항’으로 이름을 바꿔 새로 건설하고 있다. 더반은 1835년 나탈공화국 당시 영국 식민지 총독인 더반의 이름을 딴 것이다. 더반은 애초 나탈이라고 불렸는데, 나탈(Natal)은 포르투갈의 탐험가 바스코 다 가마가 1497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도착했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나탈은 포르투갈어로 크리스마스이다.

더반 국제공항의 새로운 이름인 ‘킹 샤카(샤카 왕)’는 네덜란드계 백인인 보어인과 영국의 백인들이 나탈 지역으로 오기 전 남아공 주요 인종인 줄루족의 전설적 지도자이다. 콰줄루-나탈 주는 애초 줄루족의 본거지이다. 샤카(1787?~1828)는 1820년대 나탈 지역을 중심으로 강대한 줄루 왕국을 건설하면서 주변 부족을 정복해 나갔다. ‘검은 나폴레옹’으로 불린 샤카의 침략은 무자비했는데, 이를 피해 주변 부족들이 대거 이동하면서 남아공뿐 아니라 보츠와나, 나미비아, 짐바브웨, 잠비아, 말라위 등 남부 아프리카 전 지역에 아프리카 부족의 대이동을 불러 오면서 엄청난 혼란과 부족간의 세력변화를 가져왔다.

샤카 왕의 정복전쟁으로 일어난 19세기 초의 아프리카 부족의 대이동을 ‘음페카네(Mfecane. 또는 디파카네(Difaqane))’라고 부른다. 음페카네 중에도 도망가지 않고 줄루족에 맞서 싸운 부족이 바로 소토족과 스와지족인데, 지금 남아공에 둘러싸여 작은 왕국을 이루고 있는 레소토와 스와질랜드는 바로 이들이 만든 나라이다.

경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본 요하네스버그 고급 주택가
 경비행기를 타고 내려다본 요하네스버그 고급 주택가
ⓒ 로렌스 스미스(나의 우간다 배낭여행 동료)

관련사진보기


백인에게는 축복, 흑인에게는 재앙이었던 요하네스버그의 금광

요하네스버그에 가까이 다가오자 파란 하늘에 하얀 구름이 뭉게뭉게 떠있다. 하얀 면화송이가 낮은 하늘을 뒤덮고 있는 모양이다. 파란 하늘을 항해 언덕을 넘자 30~40층의 고층빌딩들이 여기저기 서 있고, 차량들이 붐비며 정체가 빚어진다. 마침내 요하네스버그 시내에 들어선 것이다. 마천루처럼 높이 솟아 있는 현대식 초고층 빌딩과 복잡한 도로망, 북적거리는 차량, 분주히 움직이는 사람들은 마치 미국이나 유럽의 한 도시를 떠올리게 한다. 8백만 이상의 인구가 밀집해 있는 남아공의 최대 도시답게 경제와 공업의 중심지이다.

요하네스버그를 포함해 옛날 프리토리아, 비트바터스랜드, 베리니힝 등을 포함한 트란스발 주는 민주화 이후 가우텡(Gauteng. 또는 하우텡으로 발음)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트란스발(Transvaal)은 옛날 아프리카너들이 ‘발강(Vaal River)의 건너편’에 세운 공화국이라는 뜻에서 붙인 것이다. 새로운 이름인 가우텡은 흑인 부족인 소토어로 ‘금이 나는 곳’이다.

요하네스버그는 금광의 발견과 함께 발전해온 도시이다. 1886년 요하네스버그 인근의 비트바터스랜드(Witwatersrand)라는 지역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엘도라도를 찾아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당시 트란스발 공화국의 최대 도시로 급속히 성장하게 되었다. 뒤이어 북케이프 주의 킴벌리가 1869년 다이아몬드가 발견되면서 발전했던 것처럼.

남아공의 화폐단위인 ‘랜드’는 바로 세계 최대의 금광지대였던 비트바터스랜드에서 따온 것이다. 비트바터스랜드는 줄여서 그냥 ‘랜드’라고도 부른데, 화폐단위인 랜드는 바로 이 지명을 그대로 딴 것이다. 랜드는 아프리칸스어로 산등성이(Ridge)라는 뜻이다.

금의 발견은 이주민인 백인들에게는 축복이었지만, 원주민인 흑인들에게는 재앙이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처럼 총칼을 앞세운 백인들이 금광으로 몰려들면서, 원주민인 흑인들은 쫓겨나야 했다. 요하네스버그도 애초 케이프타운을 비롯해 남아공의 다른 지역처럼 2만 년 전부터 수렵생활을 하던 코이산족의 땅이었으나 3세기부터 반투어를 쓰는 부족이 콩고분지에서 내려왔으며, 15세기부터는 다양한 흑인 부족이 여러 곳에 정착해 살고 있었다.

주로 츠와나족과 은데벨레족이 살고 있었으나 1834년 네덜란드계 백인인 보어인들이 영국 의 케이프식민지로부터의 간섭을 피해 새로운 땅을 찾아 내륙으로 대이동을 시작하면서 기존 흑인부족들의 영토를 침범하기 시작했다. 요하네스버그를 포함한 지역을 중심으로 흑인들을 내쫓은 뒤 1852년 트란스발 공화국을 세운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금광을 발견하자  영국의 케이프식민지가 눈독을 들이면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경비행기로 내려다본 흑인 집단거주지인 소웨토
 경비행기로 내려다본 흑인 집단거주지인 소웨토
ⓒ 로렌스 스미스

관련사진보기


금과 다이아몬드를 두고 싸운 영국과 네덜란드 백인의 보어전쟁

이미 영국은 당시 네덜란드계 보어인의 오렌지 자유국에 속해 있던 킴벌리에서 다이아몬드가 발견되자 1871년 강제로 영국령으로 빼앗았다. 먼저 케이프타운에 이주했던 보어인들은 뒤늦게 들어온 영국에 쫓겨나자 내륙으로 들어가 흑인 원주민 땅을 정복하여 트란스발공화국과 오렌지자유국을 건설했고, 다시 영국이 다이아몬드와 금이 탐나 보어인들이 세운 공화국을 정복하기 위해 차례로 전쟁을 일으켰다.

금과 다이아몬드를 사이에 두고 1899년부터 1902년까지 케이프식민지의 영국과, 트란스발 공화국 및 오렌지자유국의 네덜란드계 백인 사이에 벌인 피비린내 나는 싸움을 보어전쟁이라 부른다. 영국의 전멸작전으로 결국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굴복하는데, 이 과정에서 집단수용소에 수용된 어린이를 포함해 2만6천명 이상의 네덜란드계 백인들이 죽었다. 금과 다이아몬드의 원래 주인인 흑인들은 제쳐둔 채 침략자인 영국과 네덜란드가 남의 재산을 갖고 다툰 셈이다.

다른 아프리카와 또 다른 남아공의 비극은 서로 다른 두 백인 제국주의자들이 오랫동안 흑인들의 땅에서 주인자리를 다투고 싸움으로서 흑인들은 철저히 소외되었다는 점이다.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바로 흑인을 제외시킨 채 네덜란드계와 영국의 백인끼리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다.

백인들의 식민지정책에 저항하다 희생된 흑인들의 숫자도 엄청나다. 현재 콰줄루-나탈 지역의 은코메강(Ncome River)에서는 1838년 네덜란드계 보어인과 줄루족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결과는 흑인들의 참패였다. 강력한 총으로 무장한 보어인은 단지 3명이 가벼운 부상을 입었는데, 줄루족은 무려 3천명이 몰살당했다. 은코메강은 오랫동안 줄루족의 피로 물들였는데, 보어인들은 승리의 상징으로 은코메강을 ‘피의 강(Blood River)’이라고 불렀다.

은코메강 전투를 승리를 이끌었던 인물이 바로 행정수도였던 프리토리아의 이름의 연원이 된 A. 프레토리우스이다. 트란스발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M. W. 프레토리우스(Pretorius)의 아버지이기도 하다. 백인정권하의 아프리카너에게는 전쟁영웅이지만, 흑인들에게는 제국주의자이자 학살자인 프레토리우스의 이름을 딴 프리토리아를 그대로 존속시킬 수는 없는 것이다.

요하네스버그 파크 스테이션 기차역 2층 주차장
 요하네스버그 파크 스테이션 기차역 2층 주차장
ⓒ 김성호

관련사진보기


버스정류장에서 뛰어가야 했던 10m 거리의 요하네스버그 기차역

고가도로 밑에 열차 차고가 보인다. 요하네스버그 중앙 기차역인 파크 스테이션이다. 중앙 기차역에 버스터미널이 붙어 있다. 기차역과 버스터미널이 같이 있어 갈아타기가 편리해서 좋다. 정확히 7시간 걸려 도착한 시각은 오후 1시 30분.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배낭을 메고 뛰듯이 기차역 안으로 들어갔다. 요하네스버그는 워낙 치안이 나쁘기로 유명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낮에도 길거리에서 강도를 당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이다.

나는 요하네스버그로 오는 버스를 타고 오면서 내내 치안에 대해 걱정했다. 버스터미널과 기차역 안이 10m 밖에 안 되는데도 치안에 불안을 느낄 정도로 심각하다. 특히 배낭여행객은 눈에 띄기 쉽고 더욱이 초보자에게는 정말 지옥의 문턱에 다가간 느낌이다. 여행정보 책자에도 그렇지만, 실제 여행을 했던 사람들의 생생한 정보도 요하네스버그는 무법천지이다. 요하네스버그는 나이로비와 함께 배낭여행객들에게는 악마와도 같은 도시인데도, 다른 도시로 가는 교통수단을 이용하기 위해 피해갈 수도 없는 도시이다.

특히 여행 막바지에 이르자 사고에 더욱 신경을 쓰게 된다. 이제 홀로 여행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는데, 여행은 오히려 더 조심스러워진다. 그동안 특별한 사고나 탈 없이 여행을 해온 것이 얼마나 다행인가.

기차역 안에 들어가니 버스 승객과 기차 승객, 지하철 승객들이 뒤범벅되어 혼잡하기 이를 데 없다. 마치 가장 번화한 거리를 기차역 안으로 옮겨놓은 것 같이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인다. 요하네스버그 파크 스테이션에는 버스정류장과 장거리 기차역, 시내 지하철역이 같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기차역 안의 왼쪽 모서리에 있는 열차 매표소로 갔다. 기차를 타고 케이프타운으로 갈 생각이었다. 케이프타운 가는 열차는 다음날 낮 12시에 출발하는 것 밖에 없었다. 하루를 요하네스버그에서 자야 하는데, 치안 때문에 여행객 숙소를 찾으러 돌아다닐 수도 없다. 버스를 타고라도 당장 케이프타운으로 떠날 수밖에 없다. 짐바브웨는 인플레가 여행객을 내몬다면, 요하네스버그와 나이로비는 치안이 여행객을 내쫓는다.

기차역 안에는 인터케이프(Intercape)와 그레이하운드(Greyhound), 트랜스룩스(Translux) 등 대형 고속버스의 정류장이 같이 있어 편리하다. 우리로 치면 서울역과 강남고속버스 터미널을 한 건물에 합쳐 놓은 것과 같다. 기차가 없으면 바로 고속버스를 타고 가면 된다.

다시 돌아와 버스 매표소에 가니 맨 먼저 그레이하운드 매표소가 눈에 띈다. 오후 6시 30분에 가는 버스가 있다. 시간이 꽤 남았지만, 바로 표를 예매했다. 460랜드(미국 돈 65달러)였다. 비싼 편이지만, 케이프타운까지 무려 19시간을 쉬지 않고 달려야 하고 안전을 위해 대부분의 배낭여행객들이 이용한다. 이번에도 나의 목표는 ‘요하네스버그 탈출’이다.

요하네스버그 기차역 건너편의 철길과 멀리 보이는 현수교형 다리
 요하네스버그 기차역 건너편의 철길과 멀리 보이는 현수교형 다리
ⓒ 김성호

관련사진보기


요하네스버그에선 기차역만이 안전하다

기차역 안의 풍경은 한마디로 번화가를 옮겨 놓은 모습이다. 기차역 안은 우선 마음이 놓인다. 승객들로 북적이지만, 치안은 걱정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역 안에는 경찰복을 입은 경찰이 3~4명씩 한 조로 수시로 순찰을 하면서 치안을 뒷받침하고 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배낭여행객에게 안전한 곳은 오직 기차역 안과 숙소뿐이라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닐 정도로 요하네스버그의 치안은 엉망이다.

2층으로 된 역 안에는 은행의 자동현금지급기(ATM)와 슈퍼마켓, 식당, 매점 등이 있고, 화장실도 있다. 역시 화장실이 지저분하고 복잡한 것을 제외하고는 역 안에서 모든 것을 해결할 수 있다. 특히 스탠더드은행 등 각 은행들이 역 안에 자동현금지급기를 여러 대 설치해 놓아 돈을 찾기가 편리했다. 비자(Visa)와 시러스(Cirrus) 카드를 모두 이용해 남아공 랜드를 인출할 수 있었다. 남아공은 현금인출기 주변도 위험하다고 해서, 안전한 역 안에 있는 인출기에서 충분히 인출했다. 요하네스버그를 방문한다면 기차역인 파크 스테이션(Park Station) 안 현금인출기에서 돈을 빼내 사용하는 것이 안전하고 편리하다.

조금 정신 차리고 기차역 오른쪽 밖으로 나가보았다. 기차역 밖의 요하네스버그 길거리가 궁금했다. 길거리에 과일을 파는 행상들이 즐비하고, 도로는 오가는 사람들로 발 디딜 틈이 없다. 번화가이다. 더 걷고 싶은데 배낭을 메고 걷는 것은 위험하기 짝이 없는 짓이다. 역 주변만을 한번 둘러보고 바로 기차역 안으로 돌아왔다. 역 입구에 싸구려 옷가게가 보였다. 팬티를 15랜드에 사고 겨울용 점퍼도 50랜드에 사서 입으니 한결 따뜻하다. 그동안 얇은 등산용 점퍼로 에티오피아에서 남아공까지 내려오는 동안 추위에 떨어야 했다.

아프리카 겨울도 역시 겨울이다. 나는 얇은 점퍼로 지금까지 버텨왔지만 코감기가 들어 결국 옷을 샀다. 아프리카는 남반구여서 북반구인 우리와 계절이 반대이지만, 나름대로 사계절이 있다. 내가 여행한 6,7,8월은 아프리카로는 겨울이어서 밤에 잘을 잘 때 여러 번 추위에 떨어야 했다. 특히 아프리카의 겨울은 밤낮의 기온차가 심하기 때문에 아프리카 겨울을 만만하게 보았다가는 추위로 고생깨나 해야 한다.

버스시간이 많이남아 역 안의 서점에 들어갔다. 영자 주간지 <타임. 2006.8.7~8.14>이 눈에 들어왔다. 겉표지에 이탈리아 여행가 마르코 폴로의 그림사진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베네치아 상인인 마르코 폴로는 1271년 동방여행을 떠나 원나라에서 17년간 살다 24년만인 1275년 베네치아로 되돌아왔다. 이탈리아에서 중국까지 가는 24년간의 세계일주의 모험과 탐험여행을 하는 놀라운 오디세이였다.

여름 여행 시기를 맞아 735년 전 마르코 폴로의 여행이 동서의 문명에 끼친 영향과 여행의 의미를 되새겨보자는 취지의 특집기사였다. 마르코 폴로의 여정을 쫓아가면서 “오늘날 동양과 서양은 어떻게 만나고 있는가(How East meets West today)”라는 제목의 르포기사이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동방견문록>의 역사적 의미를 “여행이 동서양의 문명교류의 다리역할”로 접근하고 있었다.

체 게바라의 젊은 시절 남미 오토바이 여행이 한 인간의 삶 자체를 바꾸어 놓았듯이,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 한권이 동서가 서로를 바라보는 시각을 획기적으로 바꾸어 놓았고, 문명교류를 발전시키는 계기로 만들었다는 것. 여행은 기본적으로 모든 장벽과 차별의 벽을 허무는 역할을 한다. 아프리카 배낭여행에서 내가 느낀 것도 피부색과 생긴 모습은 다르고, 나라마다 문화는 다르지만 인간이라는 본질적 측면에서는 다를 바가 없다는 사실이다. 자유와 인권을 원하고, 독립과 자존을 추구하고, 평화와 공존을 갈망하고, 평범한 사랑과 행복을 바란다는 점에서.

요하네스버그 기차역 2층 주차장 앞의 리식 거리
 요하네스버그 기차역 2층 주차장 앞의 리식 거리
ⓒ 김성호

관련사진보기


요하네스버그는 '성 요한의 도시'라는 뜻

파크 스테이션 기차역의 2층 주차장으로 나와 마주하게 되는, 언덕 위로 오르는 도로의 이름은 ‘리식 거리(Rissik St)’이다. 기차역의 오른쪽 아래 길과 뒤쪽의 공원은 ‘요우베르트 거리(Joubert St)’와 ‘요우베르트 공원’이다. 리식과 요우베르트는 현재 요하네스버그 이름을 지은 옛 트란스발 공화국의 감독관들이다.

19세기말 당시 트란스발 공화국의 국유지 감독관청의 감독관이었던 요한 리식(Johann Rissik)과 크리스티안 요하네스 요우베르트(Christiaan Johannes Joubert)가 토지조사를 나왔다가 자신들의 이름인 ‘요하네스(요한)’에다 도시라는 뜻의 ‘버그’를 붙여 요하네스버그로 이름을 지었다.

네덜란드어로 ‘요하네스(요한)’는 영어의 ‘성 요한(St. John)’을 의미하고, ‘버그’는 도시를 뜻하기 때문에 요하네스버그는 ‘성 요한의 도시’라는 의미를 갖는다. 요하네스버그의 이름은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처음으로 도시 이름을 지을 때 자신들의 이름을 따서 붙인 것이다. 그런데 발음은 네덜란드어와 영어의 짬뽕이다. 요하네스버그의 ‘요하네스’는 네덜란드어 발음이고, ‘버그’는 영국식 발음이 합쳐진 것이다. 순수한 네덜란드식 ‘요하네스부르크’도 아니고, 영어식 ‘조해니스버그’도 아니니 이런 혼란스런 지명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지 모르겠다.

남아공의 지명은 이처럼 네덜란드 백인과 영국 백인이 아프리카 역사나 전통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유럽 선조나 유럽 방식대로 멋대로 이름을 붙이다 보니 그 연원을 알기도 어렵고 발음하기도 어려운 도시들이 즐비하다. 대표적인 도시가 바로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이다. 고대 독일어에서 갈라져 나와 독일어와 발음과 뜻이 비슷한 네덜란드어를 바탕으로 한 아프리칸스어는 남아공에서 변형되다보니 더욱 복잡한 형태로 발전해왔다. 여기에 영국식 발음까지 더해지면서 한마디로 남아공 도시 지명 이름이 ‘잡탕’이 되었다.

남아공의 지명에는 지금도 네덜란드와 영국의 식민지 영향이 그대로 남아 있다. 남아공의 주인인 흑인의 역사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이름이다 보니 남아공 지명에서는 아프리카의 역사성은커녕 정체성도 찾을 수가 없다. 실제로 남아공의 도시나 유적지 이름은 현지인들도 제각각 부르기 때문에 통일이 되어 있지 않다. 말 자체가 짬뽕이기 때문에 발음도 잡탕일 수밖에 없다.

요하네스버그는 조하네스버그로도 부르고, 가우텡은 하우텡이라고 부르기도 하고, 비트바터스랜드는 비트바테르스란트 또는 위트워터스랜드라고 부르고, 후트만은 호우트만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남아공 역시 다른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고유문자가 없다보니 영어의 알파벳과 같은 로마자(라틴문자)를 빌어다 쓰고 있는데, 지명은 영어와 네덜란드어의 혼합이다 보니 발음이 영어식 발음과 네덜란드어식 발음이 섞여 어렵고 혼란스럽다.

남아공을 여행하다보면 우리에게는 낯선 독일식 발음과 비슷한 아프리칸스어 이름이 많이 남아 있다. 남아공 백인정권의 위임통치 이전 독일의 식민지였던 나미비아도 마찬가지이다. 후크(Hoek, 코너), 베르크(Berg, 산), 부르크(Burg, 타운, 작은 도시), 보스(Bos, 수풀), 브라이(Braai, 바비큐), 달(Dal, Daal, 계곡), 스타트(Stad, 도시), 스타지(Stagie, 역), 플라이(Vlei, 습지), 플라이스(Vleis, 고기), 폰테인(Fontein, 샘), 코피(Kopje, 작은 언덕), 도르프(Dorp, 마을), 크랄(Kraal, 요새화된 마을), 펠트(Veld, 평야),  바이(Baai, 바다의 만), 카프(Kap, 곶), 스트라트(Straat, 거리), 케르크(Kerk, 교회), 스트란트(Strand, 모래사장)….

남아공의 모든 지명과 발음은 하나의 통일된 기준으로 일관성을 갖춰야 한다. 기준은 오랫동안 원주민으로 살아온 대중들의 생활 속에서 나온 쉬운 발음이다. 원주민인 반투어를 중심으로 한 실제 발음과 통일된 문자화일 것이다. 세종대왕이 우리 글자인 한글을 창제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다른 나라 문자인 한자를 빌어다 쓰다 보니 대중의 실제 발음과 달라 어렵고, 통일성이 없어 혼란스러웠기 때문이다.

요하네스버그 경비행장의 모습
 요하네스버그 경비행장의 모습
ⓒ 로렌스 스미스

관련사진보기


2010년 월드컵대회 때는 요하네스버그 시내를 활보할 수 있을까

기차역 2층 주차장의 건너편 고가 밑으로는 기차가 지나가는 것이 보인다. 멀리 현수교형 고가다리가 보이고, 그 뒤에는 뾰쪽한 높은 철탑이 보인다. 통신용으로 사용되는 높이 239m의 ‘브릭슨 타워’이다. 주위에는 높은 빌딩들이 경쟁하듯 우뚝 솟아 있다.

하늘은 여전히 낮고 푸르고, 하얀 구름이 떠 있다. 요하네스버그는 마치 푸른 하늘이 구름과 함께 감싸 안은 도시 같다. 하얀 구름도 건물의 옥상 바로 위에 걸려 있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거리로 뛰어들어 마음껏 활보하고 싶다. 푸른 하늘과 넓은 도로를 보면 그런 충동이 느껴진다. 높고 낮은 빌딩과 크고 작은 길, 거미줄처럼 뻗은 철길, 낮고 푸른 하늘과 하얀 구름, 완만한 언덕길 등 기차역 주변의 요하네스버그 시내 풍경은 여행객에게 “어서 오라”고 부른다. 요하네스버그같이 아름다운 거리를 단지 치안 때문에 걷지 못하는 것만큼 슬픈 일은 없다.

요하네스버그의 현실은 배낭여행객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남아공은 2010년 단일종목으로는 세계 최대 스포츠행사인 월드컵축구대회를 개최하는데, 이렇게 치안이 불안해서 얼마나 많은 여행객들을 불러 올 수 있을 지 걱정이다. 나는 아프리카 여행을 통해 월드컵이 대륙과 나라, 인종과 언어를 뛰어넘어 전세계 젊은이들을 얼마나 열광케 하는가를 직접 눈으로 보았다. 2010년 월드컵대회 때는 전세계의 배낭여행객들이 월드컵도 구경하고, 배낭 메고 요하네스버그 시내를 마음껏 걸어 다닐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태그:#남아공, #요하네스버그, #프리토리아, #루스텐버그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