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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미비아 누르두베르 국경사무소의 모습
 나미비아 누르두베르 국경사무소의 모습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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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남아공으로 돌아오다

나미비아와 남아공의 국경은 대부분 24시간 열려 있어 편리하게 오갈 수 있다.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나미비아로 갈 때는 비울스드리프 국경을 건넜지만, 나미비아에서 남아공으로 올 때는 나코프 국경을 넘었다. 남아공 땅으로 들어선 버스는 어핑톤(Upington)을 향해 달려간다. 어핑톤에 도착했을 때는 아침 6시 30분. 일단 승객들은 어핑톤에서 내린 뒤 한 시간 정도 기다렸다 요하네스버그로 출발하는 새로운 인터케이프 버스로 갈아타야 했다.

버스 사무실 근처의 거리로 나가 슈퍼마켓에서 음료수를 산 뒤 어핑톤 거리를 둘러보았다. 이른 아침이라 차들도 거의 돌아다니지 않는 조용한 도시였다. 슈퍼마켓과 가구점들이 눈에 많이 띄고, 거리는 도로가 넓고 시원했다. 오렌지 강 언덕에 위치한 어핑톤은 와인으로 유명하다. 어핑톤이란 도시 이름은 영국 케이프식민지 총독인 토마스 어핑톤의 이름을 딴 것인데, 굳이 옛날 식민지 관리의 이름을 그대로 도시 이름으로 놔둘 필요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핑톤을 출발한 버스는 오렌지 강을 따라 올라갔다. 2시간 30분 정도 달려 오전 10시께  카투(Kathu)라는 작은 마을의 쉘(Shell) 주유소의 정류장에 정차했다. 정류장 앞 도로 옆에 타이어회사인 트렌타이어(Trentyre)사가 3m 이상의 대형 타이어와 대형 타이어를 끼운 덤프트럭, 화물크레인을 전시해 놓았다. 광고용으로 설치한 것. 트렌타이어는 미국의 유명한 ‘굿이어 타이어회사’의 자회사이다. 타이어가 얼마나 큰지, 호기심에 내가 가서 크기를 재봤으나 큰 키에 속하는 나도 타이어의 절반밖에 미치지 못했다.

대형타이어는 카투 지역을 소개하는 책자에도 등장하는 등 마을의 상징이 될 정도로 유명하다. 대형 포클레인에는 ‘시센(Sishen)’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시센은 카투 근처의 유명한 철광산이다. 시센과 카투 지역이 철광산 도시다 보니, 큰 타이어를 끼운 대형 덤프트럭에 포클레인으로 철광석을 실어 나르는 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전시인 것 같다. 도시의 특징을 가장 잘 드러낸 광고물인 셈이다.

남아공 카투 마을에 전시된 대형 타이어
 남아공 카투 마을에 전시된 대형 타이어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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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빙스턴이 처음 선교사로 부임한 크루만을 지나다

나무들이 거의 자라지 않는 황량한 들판에 작은 도시가 나타났는데, 크루만이라는 지역이다. 남아공 칼라하리 사막지대에 위치한 크루만은 사막의 오아시스 같은 ‘크루만의 눈(The Eye of Kuruman)’이라고 부르는 깨끗한 연못으로 유명하다. 일 년 내내 깨끗한 물이 솟아나는 연못 ‘크루만의 눈’은 크루만 시민들에게는 생명과도 같은 상수원이다. 크루만은 유럽인들에게는, 특히 영국인들에게는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도시이다.

아프리카 초기 선교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던 영국 스코틀랜드 선교사 로버트 모파트가 세운 선교기지인데다 1841년 탐험가 데이비드 리빙스턴이 선교사로 처음으로 부임한 곳이기도 하다. 리빙스턴은 이곳에서 선교사 모파트의 딸 메리를 만나 사랑을 하고 결혼을 하게 된다.

버스는 남아공 최대의 쇠고기 생산지로 ‘남아공의 텍사스’라 불리는 농업도시 브라이버그를 지난다. 브라이버그는 케이프타운에서 킴벌리를 거쳐 짐바브웨의 빅토리아 폭포로 가는 기차가 서는 곳이기도 하다. 내가 짐바브웨 불라와요에서 빅토리아 폭포까지 타고 간 열차도 바로 이 철길과 연결된다. 영국의 제국주의자 세실 로즈가 건설한 철길은 케이프타운에서 시작해 킴벌리, 브라이버그, 마피켕를 거쳐 보츠와나의 가보로네와 프란시스타운, 짐바브웨 불라와요와 빅토리아 폭포, 그리고 잠비아의 리빙스턴과 루사카를 거쳐 아프리카 북쪽으로 뻗어간다.

아주 작은 도시인 오토스달을 지나 금광도시이자 노벨 평화상 수상자인 데스몬드 투투 대주교가 태어난 클레르크스도르프를 거쳐 버스는 빠른 속도로 틀로크웨(옛 포체프스트룸)에 이르렀다. 교육도시인 틀로크웨는 초기 아프리카너(보어인)들이 세운 트란스발공화국(남아프리카공화국(ZAR))의 수도로서 잠시 사용되기도 했다.

남아공 카투 마을에 전시된 덤프트럭과 화물크레인
 남아공 카투 마을에 전시된 덤프트럭과 화물크레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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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부로 갈라진 요하네스버그의 두 얼굴

오후 5시 해가 저물 무렵 “요하네스버스 22km”라는 도로 팻말을 지나쳤다. 요하네스버그 변두리에 차가 들어서면서, 대표적인 흑인 빈민가인 소웨토(Soweto)를 지나고 있다. 작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것이 저소득층의 밀집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단층가옥에 10평도 채 안 되어 보이는 사각형의 똑같은 모양의 집들이 나란히 줄 지어 서 있다. 일부 허름한 철판 판자촌도 보이지만, 대부분 크기는 작지만 시멘트 건물에 붉은색 지붕으로 깨끗하다.

도로변의 집부터 주택개량사업으로 깔끔하게 변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도로변 뒤쪽에는 우리네 달동네와 같은 판자촌들이 많다. 나무 울타리로 담을 쌓아 빈민촌을 가려놓았다. 방음효과를 노린 것 같지만, 빈민촌의 사생활 보호와 도시미관을 고려한 커튼용 울타리로 보였다. 나무 울타리로는 방음효과를 그리 기대할 수 없을 테니까.

소웨토 언덕을 지나면서 요하네스버그 시내의 모습들은 순식간에 달라진다. 집들도 크고, 정원도 잘 가꾸어진 부자촌 마을이다. 소웨토와 언덕 하나 너머로 도시의 모습이 천양지차다. 빈부격차의 현장이기도 하고 요하네스버그의 두 얼굴이기도 하다. 정치적 아파르트헤이트는 철폐되었지만, 경제적 아파르트헤이트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숙제로 남아 있다.

흑백간의 빈부격차와 세계 최고의 범죄율, 교통사고 사망률, 에이즈 문제 등은 남아공 민주정부가 해결할 최대 과제이다. 그러나 경제적 빈부격차는 장기적 계획에 따라 점진적으로 해결할 문제이지, 짐바브웨의 무가베처럼 성급한 해결의 유혹에 빠지면 커다란 후유증을 불러올 수도 있다.

요하네스버그 소웨토의 초저녁 모습
 요하네스버그 소웨토의 초저녁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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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에 낚시하러 온 미국 젊은이

요하네스버그에 내리면 숙소를 어떻게 잡아야 할까 하는 나의 걱정은 자연스럽게 해결됐다. 인터케이프 버스를 타고 오면서 친해진 ‘루이스’라는 이름의 미국 남자 여행객이 미리 예약해 놓은 여행객 숙소로 같이 갔다. 워싱턴에 사는 30대 중반의 루이스는 나미비아 스와콥문트에서 버스를 탔다. 버스를 타는데 낚싯대를 들고 있어 눈에 띄었다. 나는 속으로 “아프리카에 사파리 하러 오는 여행객은 있어도 낚시하러 오는 사람은 처음 보네”라고 생각했다. 내 앞 좌석에 앉아 버스에서는 이야기하지 못했지만, 중간에 휴게소에 내릴 때 궁금해서 물어봤다.

“낚싯대는 왜 갖고 다니느냐.”
“낚시하러 왔다.”
“아프리카에 낚시하러 오는 여행객은 처음 본다.”
“워낙 내가 낚시를 좋아한다. 잠베지 강에서 낚시하는 것이 오랜 꿈이었다.”

키가 2m나 되는 장신인 루이스는 엔지니어로 일하고 있는데, 미국에서도 주말이면 곳곳을 돌아다니며 낚시를 하는 낚시광이다. 여름휴가를 맞아 미국에서 접는 낚싯대를 가지고 와서 잠비아의 빅토리아 폭포를 구경한 뒤 잠베지 강에서 낚시를 즐기고 돌아가는 길이었다. 루이스는 텐트를 들고 다니는 ‘짠돌이’ 배낭 여행객이었는데, 나와 같이 묶은 숙소에서도 돈을 아끼려고 캠핑장에서 잤다.

숙소는 아주 싼 데 자면서도 루이스는 핸드폰을 들고 다녔다. 나는 루이스의 핸드폰 덕을 톡톡히 봤다. 버스 안에서 루이스의 핸드폰을 빌려 요하네스버그에 특파원으로 나와 있는 언론사 후배기자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내가 아프리카 여행 중 아는 사람에게 전화를 한 것 자체가 처음이다. 나는 여행 중에는 ‘누구라도 가능한 만나지 않는다’는 나만의 배낭여행 원칙을 갖고 있다. 철저히 여행 그 자체에 매몰되기 위해서이다. 다음날 마다가스카르로 가는 비행기를 타러 가는 탐보 국제공항에서 후배 기자와 만나기로 약속했다.

요하네스버그 기차역 겸 버스 정류장인 파크 스테이션에 내리자 루이스가 예약한 숙소의 차량이 기다리고 있었다. 픽업트럭인데 베엠베(BMW)이다. 루이스는 요하네스버그에 거의 도착할 무렵 버스 안에서 차량이 나오는지를 숙소로 확인한 뒤 나에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숙소에서 차가 나오기로 했다는 것이다.

루이스도 요하네스버그의 치안에 대해서는 꽤 걱정하고 있었다. 자신의 미국 친구가 몇 년 전 요하네스버그에서 강도를 당한 이야기를 하면서 “택시도 잡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한 도시”라고 말했다. 요하네스버그에 배낭여행을 온 자신의 친구가 대낮에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데, 강도가 허리에 칼을 들이대고 돈을 빼앗아갔다고 한다. 더 놀라웠던 것은 주위 사람들이 아무도 도와주지 않고 그냥 지켜보고 있더라는 것이다. 요하네스버그는 외국인이라면 누구나 두려워하는 공포의 도시이다.

요하네스버그 기차역 2층 주차장 앞의 리식 거리
 요하네스버그 기차역 2층 주차장 앞의 리식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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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식당에서 저녁 먹기

루이스가 예약한 숙소는 버스정류장에서 국제공항 가는 쪽으로 10분 거리의 전망이 좋은 곳에 위치해 있었다. ‘브라운 슈거 백패커스’라는 숙소인데, 높은 언덕인 업저버토리 애브뉴 거리에 있어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마치 옛날 중세시대 유럽의 성 모양을 딴 하얀색 숙소이다. 루이스는 야외의 캠핑장에서 텐트를 치고 자고, 나는 11인용 기숙사식 도미토리방에서 잤다.

11인용 도미토리방에는 우리나라 남자 대학생 한 명이 혼자 묶고 있었다.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문화인류학을 전공하는 학생은 여름방학을 맞아 소웨토를 방문하러 왔다고 한다. 학생은 “방학 때마다 현지인의 삶을 체험하고 현장조사를 위해 외국을 방문한다”고 말했다. 케냐의 나이로비에서 만난 관광경영학과 학생과 마찬가지로 배낭여행을 통해 자신의 전공을 살리는 것.

나는 학생과 루이스와 함께 밖에 나가 저녁을 먹기로 의기투합했다. 주택가여서 치안이 그리 나쁘지 않은데다, 남자 3명이 함께 나가니 크게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숙소에서 언덕길을 내려와 20분 정도 걸으니 중국인 밀집지역인 작은 차이나타운이 나왔다. 중국음식점들이 여러 개 모여 있다. 깨끗해 보이는 한 중국음식점으로 들어가 새우와 생선, 야채, 상어 지느러미로 만든 삭스핀 수프를 맛있게 먹었다.

아프리카에서 중국 음식을 먹기도 처음이다. 우리 옆에서는 두 팀의 중국 손님들이 있었는데, 역시 목소리가 크고 시끄러웠다. 어느 나라 사람이나 많이 모이면 시끄럽지만, 특히 중국인은 발음의 높낮이가 있는 4성이란 발음법 자체 때문에 더욱 크게 시끄럽게 들리는 것 같다.

숙소로 돌아오는데 갑자기 빗줄기가 뿌려 뛰어 와야 했다. 비는 숙소에 도착하기 전에 금세 그쳤다. 마치 지나가는 비처럼 갑자기 쏟아졌다 갑자기 그친다. 숙소에는 보통 돼지보다 더 큰 독일 경비견인 셰퍼드가 있는데, 별로 짓지도 않고 순하기가 이를 데 없다. 전 세계의 배낭 여행객들을 만나다 보니 셰퍼드가 낯을 가리지 않나보다.

요하네스버그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요하네스버그의 밤은 정말 아름답다. 밤 12시가 넘도록 곳곳에 밝은 전등이 켜져 있다. 다른 아프리카 국가의 수도와 달리 전기도 풍부하고, 경제적으로 앞서 있다는 것을 전깃불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렇게 멋진 야경의 수도를 사람들이 마음대로 걸어 다닐 수 없다니 안타깝다.

요하네스버그는 겉모습만 보면 크고 멋진 도시이지만, 속을  들여다 보면 치안 불안과 빈부 격차가 심각한 불편한 도시이다. 대낮에도 사람이 자유롭게 걸어 다닐 수 없을 정도로 치안이 문제라면 그것은 이미 사람이 사는 도시공동체가 아니라, 정글의 법칙이 지배하는 야성의 숲일 뿐이다.

로벤아일랜드 교도소에 있는 넬슨 만델라와 월터 시술루의 사진
 로벤아일랜드 교도소에 있는 넬슨 만델라와 월터 시술루의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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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에 상관없이 존경받는 만델라

아프리카 여행의 마지막 목적지인 마다가스카르로 가는 날이다. 결코 짧지 않은 아프리카 대륙 종단여행을 마치고 섬나라인 마다가스카르로 간다고 생각하니, 마치 졸업을 앞둔 고3의 마음 같다. 한편으로는 특별한 사고 없이 여행을 마쳐간다는 안도와 함께, 시간에 쫓겨 빠뜨렸던 여정에 대한 아쉬움이 엇갈린다.

아침 7시에 일어나 요하네스버그 국제공항에서 이름이 바뀐 O.R. 탐보 국제공항으로 갔다. 숙소의 픽업트럭을 타고 공항으로 달린다. 공항으로 가다보니 마침 출근시간이라 교외에서 요하네스버그 시내로 들어오는 출근 차량들로 붐빈다. 대도시 출근시간대의 교통 혼잡은 서울이나 요하네스버그나 뉴욕이나 다르지 않다. 교통 혼잡으로 차량이 정차하자, 도로 중앙까지 아침 신문을 팔려는 젊은이 두 명이 뛰어든다. 두 손에 신문을 가득 들었다.

나를 태우고 간 숙소차량 운전사는 산티아라는 30대 초반인데, 줄루족이다. 남아공 제3의 도시이자 인도양 항구도시인 더반이 고향이라고 한다. 그는 “제 1언어는 줄루어이지만, 요즘 젊은 사람들은 보통 영어를 많이 쓴다”고 했다. 더반은 줄루족이 많이 사는 콰줄루-나탈 주의 대표적인 도시이다.

예전부터 샤카 왕국을 세운 줄루 족은 호전적으로 유명하며, 현재 1000만 명 이상으로 추정되는 남아공 최대 부족이다. 일부 줄루족 정치인들이 1820년 강력한 왕국을 건설했던 샤카의 줄루왕국 부활을 꿈꾸며 야당인 인카타자유당(IFR)을 결성해 줄루족 독립 국가를 추구하고 있다. 당연히 여당인 아프리카민족회의와 반목하면서 흑흑 갈등의 소지가 있다.

나는 산티아에게 넬슨 만델라를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물었다. 줄루족인 그가 코사족 출신인 만델라에 대해 인종적 시각이 있는지 솔직히 궁금했다. 나는 이럴 때면 예전 나의 직업이었던 기자 본연의 취재 욕구가 되살아난다. 아프리카 여행 중 여행 일정과 여정, 느낌을 꼼꼼히 기록하고, 궁금증이 있으면 참지를 못하고 마치 사회부 기자가 현장에서 취재하듯 물어봤던 것도 숨겨져 있는 기자적 본능 때문이다.

산티아에게 그렇게 물어보는 것이 약간은 미안하기도 했지만, 질문하려는 나의 욕망을 억누를 수 없었다. 그러나 그는 서슴없이 “넬슨 만델라를 가장 존경한다”고 말했다. 그는 “넬슨 만델라 대통령은 은퇴했지만 남아공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고 존경받는 인물”이라며 “지금도 음베키 현 대통령보다 만델라 전 대통령이 무슨 말을 하는지를 더 지켜본다”고 했다.

전직 대통령이 현직 대통령보다 훨씬 더 영향력이 있다는 뜻이다. 그에게는 특별한 인종적 편견이 없는 것처럼 보였다. 실제로 인종적 지역적 갈등은 보통 사람보다는 정치인들이 부추기는 측면이 많은 것도 어디나 똑같다.

로벤 아일랜드에서 토끼가 풀을 뜯고 있는 모습
 로벤 아일랜드에서 토끼가 풀을 뜯고 있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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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팅포트를 넘어 ‘샐러드볼 국가’로 나아가는 남아공

아프리카 국가의 최대 내적 문제였던 부족주의도 민주주의 발전과 함께 급속도로 완화되고 있었다. 탄자니아는 오래전 니에레레 초대 대통령에 의해 부족주의가 타파되었고, 최근 소수파인 투치족 출신의 르완다 대통령 폴 카가메도 “투치도 후치도 없는 오로지 르완다 국민만 있다”며 국가통합을 이뤄내고 있다. 부족개념을 뛰어넘어 국민개념이 정착되고 있다.

옛날 아프리카 부족주의는 권력자들이 권력유지와 쟁탈을 위해 이용한 측면이 강하다. 어느 나라나 국민통합 없이 국가발전을 기대할 수는 없다. 하나의 민족으로 구성된 나라라면 민족을 그대로 국민의 개념으로 끌어올려 단일민족 국가라는 정체성을 확립하기가 쉽지만, 다민족 국가라고 해서 국가 정체성 확립이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미국은 다민족국가이지만, 하나의 ‘미국 국민’이라는 확고한 개념으로 국가 정체성을 만들어내고 있다.

남아공의 실험은 미국을 뛰어넘는 새로운 길이다. 미국이 다수인 백인 주도의 ‘멜팅포트(인종의 용광로) 국가’라면, 남아공은 다수파 흑인 주도의 ‘무지개 국가’이다. 남아공의 무지개 나라는 단순히 인종을 뛰어넘어 하나의 국민이라는 ‘멜팅포트’에 머물지 않고, 각 부족의 문화 다양성을 인정하면서도 국가 정체성을 확립하는 ‘샐러드볼(Salad Bowl. 각각의 맛을 유지하면서 하나의 그릇에 담은 샐러드를 의미)’ 국가를 추구하는 길이다.

다민족 다문화 국가로 나아가고 있는 세계화의 흐름에 맞추면서 국가 정체성을 확립해 가면 된다. 다민족, 다부족, 다문화라고 해서 국가 정체성이 없으면 국민통합을 이룰 수 없다. 국가의 인적 구성이 문제가 아니라, 국가 정체성의 확립과 국민통합이 중요하다. 부족주의는 아프리카가 민주주의로 나아가는 길에서 극복해야 할 커다란 장애물임에 틀림없다.

케이프반도 볼더스 비치의 주택가에 있는 병솔나무
 케이프반도 볼더스 비치의 주택가에 있는 병솔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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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디와 홍수환을 생각나게 한 더반에서 온 운전사

운전사인 산티아도 나에 대해 궁금했나 보다.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데, “차이나(중국)에서 왔냐”고 묻는다. 내가 “한국에서 왔다”고 하자 그때서야 고개를 끄덕인다. 그는 “더반에 살 때 인도인과 아시아인들을 많이 봤다”고 한다. 실제로 더반에는 인도인이 전체의 20% 정도로 많다.

영국이 더반을 식민지 도시로 본격적으로 건설하면서, 1860년부터 인도인들은 사탕수수 밭의 노동자로 몰려와 더반을 중심으로 살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전 유럽국가에 의해 아프리카와 인도, 아시아의 식민지에서 사실상 노예로 끌려간 인도와 중국인 노동자를 ‘쿨리(Coolie)’라고 부른다.

더반하면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은 바로 인도의 위대한 사상가이자 건국의 아버지인 마하트마 간디다. 간디는 1893년 변호사로 일하기 위해 더반에 온다. 간디는 인도인들이 백인으로부터 부당한 박해를 받는 것을 목격하고, 자신도 직접 인종차별을 당한다.

더반에서 츠와니(프리토리아)로 가는 기차를 타고 가던 간디는 1등칸 표를 가지고 1등칸에 탔으나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강제로 기차에서 끌어내려진다. 인종차별 반대투쟁을 위해 1894년 ‘나탈 인도 의회’라는 단체를 만들어 투옥까지 당하면서도 1914년까지 줄기차게 영국의 식민정부에 대항했다.

남아공에서 최초의 조직적 인종차별 반대 투쟁이었다. 간디가 이때 펼쳤던 운동이 바로 “진실과 사랑의 힘”이라는 ‘사티아그라하(비폭력 저항운동 또는 시민 불복종운동)’이다. 나중에 인도의 독립을 가져온 간디의 위대한 사상인 비폭력 시민 불복종 운동은 바로 남아공 더반에서 태어났다.

간디의 인종차별 반대 투쟁은 흑인들의 의식을 일깨워 아파르트헤이트 반대 투쟁의 한 계기가 된다. 넬슨 만델라도 초기 인도인들의 비폭력 불복종 운동에 커다란 영향을 받았다. 알브레히트 하게만이 쓴 영문 <넬슨 만델라 평전(28쪽)>에도 “만델라는 1946년 나탈 주에 있는 인도인들이 절도 있는 무저항 불복종 운동을 벌이는 것을 보고 크게 감명 받아 (만델라가 창설한) 아프리카민족회의 청년연맹의 투쟁수단으로 생각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우리에게 머나먼 남아공의 더반이 널리 알려진 것은 바로 “엄마, 나 챔피언 먹었어”라는 권투선수 홍수환의 순박했던 말 때문이다. 1974년 더반에서 아놀드 테일러를 꺾고 세계복싱협회(WBA) 밴텀급 챔피언이 된 홍수환은 어머니와의 전화통화에서 타이틀 획득의 기쁨을 이렇게 천진스럽게 표현했고, 여기에 어머니도 “오냐, 대한민국 만세다”라고 맞장구를 쳤다.

홍수환과 어머니의 말은 오랫동안 유행어가 되었고, 우리 국민들 마음 속에 지금도 사랑을 받고 있다. 유신시절 정치적 억압 속에서 특별히 즐거운 일이 많지 않던 시절, 홍수환과 어머니의 단순하지만 인간적인 대화는 많은 국민들의 마음에 즐거운 추억을 남겨주었다. 남아공은 영국 총독의 이름에서 따온 더반이란 이름 대신 줄루족 이름인 ‘이테퀴니(eThekwini)’라고 부르고 있다.

요하네스버그 업저버트리 애브뉴 숙소에서 바라본 야경
 요하네스버그 업저버트리 애브뉴 숙소에서 바라본 야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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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배 언론사 특파원과의 만남

탐보 국제공항 입구의 도로에는 우리나라 기업인 “엘지 노트북(LG Notebook)” 광고판이 목 좋은 곳에 2개나 잇따라 서 있다. 공항에 도착해 2층 레스토랑에 올라가니 요하네스버그 특파원으로 활동하고 있는 후배 기자가 기다리고 있었다. 남아공에는 우리나라에서 공영 뉴스통신사인 <연합뉴스>만이 유일하게 상주 특파원을 파견하고 있었다. 나는 후배 기자와 토스트와 커피로 아침식사를 하면서 나의 배낭여행 이야기와 후배 기자의 아프리카 생활 등에 대해 이야기를 나눴다.

후배 기자는 “혼자서 어떻게 아프리카 종단여행을 하느냐”고 놀라워했고, 나는 “옛날 신문사에 갓 입사해 새벽부터 경찰서와 병원을 돌아다니며 취재해야 했던 사회부 수습기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고 했다.

1988년 <한겨레신문> 창간 초기에 경찰서를 출입하던 신참내기 기자였던 나는 서울 구로공단 여성 노조원들의 파업을 취재하다 경찰에 끌려가 두들겨 맞고 유치소에 노조원들과 함께 구금되기도 했었다. 당시 “한겨레신문 사회부기자”라고 말해도 경찰들은 “한겨레신문은 빨갱이신문인데, 기자는 무슨 기자냐”며 나를 두들겨 패고 유치소에 여성 노조원들과 함께 내팽개쳤다. 신문기자도 경찰에 두들겨 맞으며 취재를 하던 시절이 엊그제 일이다. 아프리카가 아니라 우리나라 얘기이고, 나의 얘기다.

<연합뉴스>는 내가 처음으로 언론사 생활을 했던 곳이어서 상주 특파원은 언론사 후배이기도 하지만, 내가 신문사를 옮긴 뒤에는 서로 다른 언론사지만 정치부 기자로 오랫동안 국회를 같이 출입했던 사이다. 요즘 아프리카와 우리나라의 관계에 대해 물었다. 특파원만큼 현지 사정을 잘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후배기자는 “우리나라도 최근에는 아프리카에 많은 관심을 기울이고 있지만, 중국이나 인도에 비하면 한참 멀다”며 좀 더 적극적인 아프리카와의 유대와 진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아프리카는 엄청난 발전 잠재력이 있는 대륙인데, 그동안 이념상 문제(옛 냉전시대 때 대부분의 아프리카 국가는 사회주의 경향을 띠었다)나 지리적 거리, 서방 언론에 의한 왜곡된 보도 때문에 잘못된 이미지가 형성되어 아프리카에 대한 교류와 진출이 부족했다”고 지적했다. 우리는 기자출신답게 왜곡된 아프리카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언론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입을 모았다. <연합뉴스>에서 아프리카에 특파원을 파견하는 이유도 바로 서구의 시각이 아닌 우리의 독자적인 시각으로 아프리카를 보기 위한 것이다.

CNN 효과를 극복하자는 아프리카 지도자들의 외침

후배 기자는 최근에 아프리카 지도자들 사이에서도 서구 언론에 비쳐지는 아프리카의 부정적 이미지를 없애기 위한 대책을 세워야 한다는 주장이 나와 특파원 기사로 내보냈다고 했다. 한마디로 “시엔엔(CNN) 효과를 극복하자”는 움직임이다.

2006년 5월 31일 남아공 케이프타운에서 열린 ‘세계경제포럼(WEF) 2006 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아프리카의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현재와 같은 서구 언론의 부정적인 이미지 보도를 불식시켜야 한다는 주장을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공식적으로 제기했다고 한다. 대표적 언론이 미국의 24시간 뉴스전문 유선 텔레비전 채널인 시엔엔이기 때문에 시엔엔의 아프리카 보도를 바로잡자는 것이다.

시엔엔 등 서구 텔레비전에 나오는 아프리카 보도는 내전이나 기아 등으로 죽어가는 어린이 모습 등 부정적인 이미지 일색이고, 최근 아프리카의 빠른 경제성장 등은 거의 보도하지 않고 있다는 불만이다. 이와 달리 아시아는 경제성장의 대표적 사례로 묘사되는 등 아프리카 보도와 뚜렷이 대비된다고 지적했다.

후배 기자는 “경제성장을 위해서는 외국인 투자가 중요한데, 아프리카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는 외국인의 투자를 꺼리게 하는 요인으로 작용하는 것이 분명하다”며 “실제와 다른 서구 언론의 지나친 부정적 보도는 아프리카 경제성장에 걸림돌이 된다”고 말했다.

아프리카 지도자들이 아프리카를 제대로 알리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인식하기 시작한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이른바 세계 4대 통신사인 미국의 에이피(AP)와 유피아이(UPI), 영국의 로이터(Reuters), 프랑스의 에이에프피(AFP)는 모두 미국과 서구의 뉴스통신사로 서구적 시각의 보도에 치우친다는 비판이 있었다.

최근 각 나라에서는 서구의 정보제국주의에 맞서 각 나라가 자신의 시각으로 국민들에게 뉴스를 전달하는 정보주권을 지키기 위한 움직임이 활발해지고 있다. 중동(서아시아)지역이 24시간 뉴스전문 위성방송인 알 자지라(Aljazeera)를 통해 중동의 시각으로 보도를 하기 시작했다. 아프리카도 지난 1983년 서구 언론의 정보독점과 왜곡보도에 대항하기 위해 세네갈 수도 다카르에 본부를 둔 ‘범아프리카뉴스통신사(PANA. Pan-African News Agency)’를 설립했으나 재정난으로 활발히 운영되지 못하고 있다.

내가 묵은 요하네스버그 '브라운 슈거 백패커스'
 내가 묵은 요하네스버그 '브라운 슈거 백패커스'
ⓒ 김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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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6개월 뒤에 날아온 남아공 카드 사기

비행기 시간 때문에 후배 기자와 오랜 대화를 나눌 수 없었다. 오전 10시 30분 출발하는 비행기를 타기 위해서는 미리 수속을 밟아야 했다. 나미비아 여행 중 영국에서 테러 시도를 적발했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공항 검색이 까다로울 것으로 생각했는데, 특별히 검사가 강화되지 않아 바로 수속을 끝내고 탑승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탐보 공항은 국제공항답게 크고 깨끗했다. 면세점에서 여행용 바지를 새로 샀다. 아프리카 여행가면서 입고 간 등산용 바지는 오래 입다보니 낡고 여기저기 흠집이 생겼다. 새로 산 카키색 바지가 마음에 들어 아예 가게에서 갈아입고 나왔다.

시간이 많이 남아 공항청사 안 서점에 들어가 영문판 책 몇 권을 샀다. 한 권의 아프리카 여행기와 영국의 역사학자이자 여행가인 존 맨이 쓴 몽골제국의 칭기즈칸 일대기를 다룬 <칭기즈칸(2005. 영국 반탐출판사)>, 체 게바라의 <모터사이클 다이어리(2004. 영국 하퍼 페레니얼출판사)>이다.

체 게바라의 대학시절 남미 여행을 다룬 <모터사이클 다이어리>는 2004년 영화 상영에 맞춰 새로이 책을 발간한 것이었다. 책의 겉표지에 영화 <모터싸이클 다이어리>의 홍보 포스터에 나오는, 체 게바라의 친구 알베르토 그라나도가 중고 오토바이를 몰고 게바라는 오토바이 뒤에 타서 두 손을 펼치고 가는 영화 장면을 실었다.

공항 면세점과 서점에서 남아공 화폐인 랜드가 모자라 비자카드를 사용했다. 남아공은 카드사기가 많다는 것을 여행정보를 통해 사전에 알았기 때문에 비상용으로 가져간 달러를 바꿔 현금으로만 계산했다. 카드로 현금을 인출하거나 결제를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남아공을 떠나면서 공항 면세점에서 사용한 카드가 나중에 결국 탈이 났다.

아프리카 여행에서 귀국한 뒤 6개월이 지난 어느 날 저녁 내 핸드폰으로 내가 거래하는 은행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내 카드로 “남아공에서 미국 돈 7.5달러가 결제되었다”는 통보였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와 우리나라에 있는 내가 어떻게 남아공에서 카드로 물건을 살 수 있다는 것인가. 다음날 거래은행에 전화를 해서 문의하니 남아공의 타이어 대리점 이름으로 달러 결제가 되었다는 것이다. 나는 은행 직원의 조언으로 바로 카드 해외 결제 중단을 요청했다.

결제 금액이 적어 그나마 다행이었다. 한 달 뒤 다시 거래은행으로부터 문자 메시지가 날아왔다. 남아공으로부터 나의 카드로 또다시 달러 결제 요청이 왔으나 해외 결제 중단으로 거부했다는 내용이었다. 내가 공항에서 사용한 카드 결제 내역을 가지고 계속 돈을 청구해 가로채는 카드 사기수법을 사용하는 것이다.

남아공은 이처럼 카드 사기가 빈번하다. 어떤 여행자는 카드로 현금을 결제 했는데, 나중에 보니 통장에 남아 있던 수백 만원의 현금이 모두 누군가 인출해갔다는 얘기를 여행자 정보를 통해 본 적이 있다. 남아공에서 카드를 사용하는 것은 조심해야 할 뿐 아니라 위험한 일이기도 하다.


태그:#남아공, #요하네스버그, #간디, #홍수환, #만델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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