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년 7월 23일 수석·보좌관회의에서 자영업담당비서관 신설 사실을 알리는 문 대통령의 모습.
연합뉴스
문재인 대통령이 직원들에게 잘해준 이유가 있었다. 시쳇말로 '빡세게' 부려 먹으려고 그랬다. '불편함이 없게 해줄 테니 힘내라, 공은 다 당신들 몫이다.' 잘해줄 때 알아봤어야 했다.
그는 자신을 쥐어짜 일을 했다. 그리고 직원들을 독려했다.
술이든 골프든 좋아하는 일을 양껏 하고, 쉴 때 다 쉬다가 일 터졌을 때 아랫사람을 닦달하는 보스도 있다. 책임을 밑에 떠넘기고 사람을 잘라 실패를 마무리하는 리더도 있다. 그런 보스 말이 밑에 통할 리가 없다. 문재인 대통령은 자신을 혹사하다시피 하면서 직원들을 독려했다. 말을 안 들을 도리가 없었다.
대통령을 가장 가까이서 보좌한 이들이 제1부속실장이다. 임기 초반 송인배, 조한기 부속실장이 곁을 지켰다. 이들은 한숨과 함께 "뭐 하나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다"라고 말하곤 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담론을 배격했다. 구체적인 정책과 제도를 요구했다. 보고서를 올리면 관련 자료를 찾아 올리라는 지시가 수시로 떨어졌다. 정확한 수치와 배경, 경과 등 구체적인 내용을 확인했다.
대통령이 추상(抽象)이 아닌 구상(具象)을 요구하자, 참모와 공무원들도 그 방향에 맞춰 일을 했다. 이는 스케치하는 것과 설계 도면을 작성하는 일만큼이나 차이가 났다. 스케치는 조금 삐뚤어도 덧칠해서 맞추면 된다. 설계 도면은 눈금 하나만 잘못 그려도 전체가 엉클어진다. 일은 많아지고 힘들어졌다.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 회의 때 벌어진 한 사건은 청와대 참모들을 긴장케 했다. 어음 제도 개선책이 보고됐다. 중소기업과 소상공인을 위한 대선 공약 중 하나다. 보고는 10분 만에 끝났다. 좋은 취지고, 무리 없는 내용이었다. 그렇다고 뾰족한 수를 내지도 않았다.
문재인 대통령이 질문을 던지기 시작했다. 담당자가 답변하면 두 번째, 세 번째 질문을 또 던졌다. 어찌나 집요하던지 재판정의 신문(訊問) 같았다. 상황은 20여 분간 지속됐다. 회의장 분위기는 차츰 얼어붙었다. 두 사람 간 질의응답 말고는 속기사 두 명이 자판 두드리는 소리만 들렸다.
어음은 기업이 자금을 융통하는 수단이다. 약자인 납품·하도급 업체는 울며 겨자먹기식으로 받아야 한다. 문 대통령은 변호사 시절부터 소상공인과 하도급 업체의 하소연을 들었다. 대선 공약으로 채택했다. 제도의 허점을 잘 파악하고 있었다.
담당 비서관은 그렇지 않았다. 열심히 준비했겠지만, 맡은 여러 정책, 지원책 중 하나였다. 정책 차원에서 접근했기에 현장 일에는 밝지 못했다. 만족스러운 답을 내지 못했다. 결국 다시 보고하도록 했다.
이날 일로 청와대 긴장도도 함께 올라갔다. '좋은 취지와 방향'으로 준비하던 보고를 '구체적 목표와 대책'으로 바꿔야 했다. 국민에게 끼치는 영향이 뭔지 구체적으로 답해야 했다.
2017년 7월 25일 국무회의에서다. 서민 부담 경감 대책이 보고됐다. 문재인 대통령은 "담론보다 구체적 방안이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이어 "중산층과 서민 소득을 높이고 필수 생계비를 낮추는 구체적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라면서 "(보고서에 있는) 도시가스 요금 1~9% 인하, 이런 게 아주 도움이 되는 구체적 방안"이라고 말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늘 팩트(fact), 수치, 통계를 요구했다. 나도 경험했다. 2019년 1월 28일 대통령 주재 수석·보좌관 회의를 앞뒀다. 인사말 원고를 준비하며, 설 명절을 소재로 삼았다. 명절 자동차 사고 경각심을 높일 발언을 골랐다.
말씀 자료를 올렸더니, 피드백이 왔다. 원래 원고에서 '사고가 줄었지만'이라는 대목에 연필로 줄이 그어져 있었다. 문 대통령은 그 위에 물음표(?)를 그려놓았다. 아차 싶었다. 수치를 확보했다. 원고를 고쳐 다시 보고했다. 문 대통령 실제 발언은 이랬다.
"설 연휴를 앞두고 특별히 당부하고 싶은 것은 안전 문제입니다. 교통사고, 화재, 산재 등 3대 안전사고 사망자가 한 명도 없는 설 명절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특히 강조하고 싶은 것은 교통안전입니다. 우리 정부 들어 2017년과 2018년 연이어 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가 많이 줄고 있고, 설 연휴 기간 교통사고 사망자 수도 2016년 60명, 2017년 43명, 2018년 37명으로 크게 줄었지만, 아직도 적은 숫자가 아닙니다. 올해 설 연휴 이동 인원은 매일 700만 명, 특별 교통 대책 기간 7일 동안 5,000만 명에 육박할 것으로 예측되고 있습니다."
숫자를 넣자 위험이 구체화했다. 왜 조심해야 하는지 피부에 닿았다. 교통 당국과 경찰 및 소방에도 명확한 목표가 제시됐다. '안전을 도모하라'가 아니라 '사망자를 줄이라'고.
문재인 대통령은 연설에서도 추상과 관념보다 실례(實例)를 짚어냈다. 2017년 8월 15일 그는 취임 후 첫 광복절 경축식 기념사를 낭독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빌어먹고, 친일을 하면 3대가 떵떵거린다'라는 말이 있다. 이 말이 현실임을 증거로 들려줬다.
"경북 안동에 임청각(臨淸閣)이라는 유서 깊은 집이 있습니다. 임청각은 일제 강점기 전 가산(家産)을 처분하고 만주로 망명하여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무장 독립운동의 토대를 만든 석주 이상룡 선생의 본가입니다. 무려 아홉 분의 독립투사를 배출한 독립운동의 산실이고, 대한민국 노블레스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상징하는 공간입니다. 그에 대한 보복으로 일제는 그 집을 관통하도록 철도를 놓았습니다. 아흔아홉 칸 저택이었던 임청각은 지금도 반 토막이 난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상룡 선생의 손자·손녀는 해방 후 대한민국에서 고아원 생활을 하기도 했습니다.
임청각 모습이 바로 우리가 되돌아봐야 할 대한민국의 현실입니다. 일제와 친일의 잔재를 제대로 청산하지 못했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우지 못했습니다.
역사를 잃으면 뿌리를 잃는 것입니다. 독립운동가들을 더 이상 잊힌 영웅으로 남겨두지 말아야 합니다. 명예뿐인 보훈에 머물지도 말아야 합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이 사라져야 합니다. 친일 부역자와 독립운동가의 처지가 해방 후에도 달라지지 않더라는 경험이 불의와의 타협을 정당화하는 왜곡된 가치관을 만들었습니다."
생생한 실례가 관념, 개념보다 백배 낫다. 주로 말로 전달하는 연설, 설명, 프레젠테이션에서는 더욱 그렇다.
대통령의 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