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리엇 호스머, <메두사>1854년, 대리석, 미국 미니애폴리스 인스티튜트 오브 아트
해리엇 호스머
그렇다면 다시 아테나를 보자. '사람 메두사'를 조각해나가면서 호스머는 궁금했을 것이다. 왜 아테나는 성폭행 가해자 포세이돈이 아니라 희생자인 메두사를 벌했을까. 왜 일명 '명예남성'이 되었던 걸까.
기원전 5
세기에 아이스킬로스가 쓴 비극 <에우메니데스> 속 아테나의 대사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나에게는 나를 낳아준 어머니가 없기 때문이니라. 나는 결혼 외에 모든 면에서 진심으로 남자 편이며, 전적으로 아버지 편이니라."
아테나가 고백하듯, 그녀는 어머니 없이 아버지인 제우스의 머리에서 태어난 신으로 아버지의 법을 내면화하면서 성장했다. 남성 신이 권력의 대부분을 잡고 돌아가는 올림포스에서, 아테나는 남성의 가치를 대변했고 그에 따라 주요한 신으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랬기에, 포세이돈과 메두사의 일을 마주했을 때 내뱉은 아테나의 말은 의미심장하다. "메두사의 아름다운 머리카락만 아니었어도 신이 품은 탐욕의 대상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테나는 당연한 수순인 듯 포세이돈 대신 메두사를 벌함으로써 가부장제와 공모하고, 뒤이어 페르세우스를 도와 메두사를 기어이 죽인다. 아테나는 그렇게 자신이 다른 여신하고는 다르다는 것을 증명했다.
명예남성이 갖는 한계
'나는 메두사가, 괴물이 아니야. 나는 페미니스트가 아니야. 나는 기센 여자가 아니야.' 21세기가 되었지만 우리 주위에는 여전히 아테나가 많다. 아테나가 살았던 올림포스가 그랬듯, 명예 남성이 되어야 사회에서 생존할 확률이 높아지는 권력 구조가 여전히 굳건하기 때문이다.
앞서 이야기했듯 나도 '작은 아테나'였다. '살아남으려면 어쩔 수 없다'고 자위하며 스스로 '대세'를 따랐다. 자, 그렇다면 열심히 명예 남성으로 살았던 내 기자 생활은 어떻게 됐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답하자면 내 첫 번째 사회생활은 무참하게도 실패했다. 기를 쓰며 버티던 중, 허탈하게도 엄마가 지나가듯이 한 말에 온몸에 힘이 빠져버렸기 때문이다. "남자에게 적당히 져주면서 원하는 걸 얻는 게 현명한 거야. 너무 애쓰지 마."
원래 의도와는 다르게, 엄마의 조언은 나의 퇴사 결심을 굳히게 했다. 명예 남성이 빠지는 함정을 명백하게 짚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다. 명예 남성은 다른 여성들에 비해 승승장구하는 듯 보였지만, 또렷한 한계가 있었다.
잘나되, 남성들을 위협할만큼 잘나지 않도록 알아서 조심할 것. 그렇게 '적당히 져주는' 기술이 필요하다는 것. 명예 남성의 지위는 남성에게서 위임된 것이기에, 수틀리는 순간 남성 권력이 언제든 걷어갈 수 있다는 것 말이다.
그렇게 나는 가슴 위에 얹어진 가짜 훈장을 진저리치며 떼어버릴 수 있었다. 나는 아테나일 수도 메두사일 수도 있었다. 하지만 절대 페르세우스는 될 수 없었다. '아테나 분장을 한 채 페르세우스의 칼을 들고 자기 자신의 목을 치는 메두사'. 이것이 '명예 남성'의 본 모습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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