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의 옛 화폐 500마르크 지폐에 그려진 마리아 지빌라 메리안의 초상화
마리아지빌라메리안
메리안의 결혼생활은 불행했다. 그녀는 18살이던 1665년, 8살 연상의 화가 요한 안드레아스 그라프(Johann Andreas Graff, 1637~1701)와 결혼식을 올렸다. 그라프는 메리안의 새아버지이자 화훼 화가인 야곱 마렐의 제자 중 한 명이었고, 베네치아와 로마 등 여러 곳을 돌면서 견문을 넓힌 후 막 귀국한 터였다.
모두가 보기에 그라프는 결혼 후 아내와 같이 착실히 판화작업을 하고 그림을 그리며 잘 살 수 있을 것으로 보였다. 메리안은 여자였기에 당시 그라프처럼 스승을 찾아 돌아다니며 도제 수업을 받을 수는 없었지만, 집안의 영향으로 이미 11세 때부터 동판화 제작기술을 완벽하게 익혀왔기 때문이다. 그뿐 아니라 그녀는 그림도 정식으로 배워 꽃과 곤충을 멋지게 그릴 수 있었다.
부부 예술가로 성실하게 살림을 꾸리겠다는 계획은 메리안 혼자만의 꿈이었다는 사실은 오래지 않아 밝혀졌다. 그라프는 갑자기 천하태평형의 술주정뱅이가 되었다. 성실한 아내가 그의 '믿는 구석'이었던 걸까. 그는 좀처럼 일하려 들지 않았고, 어쩌다 들어온 동판화 일도 성의 없이 처리하는 바람에 그나마 있던 주문까지 뚝 끊겨버렸다. 술과 담배에만 찌들어있는 남편을 대신해 가장의 역할을 해야 했던 것은 메리안이었다. 메리안은 뉘른베르크 귀족 딸들에게 자수와 스케치, 수성 및 유성 물감 사용법을 가르치고, 방수염료로 색을 칠한 식탁보를 제작해 귀족에게 납품하며 돈을 벌었다.
생계 활동만 해도 벅찬 나날이었지만, 이와 동시에 메리안은 경이로운 창작력도 발휘한다. 1675년 28세 나이에 식물도감인 채색 동판화 화집 <꽃 그림책>을 출간한 것이다. 메리안은 이 책 서문에서 "따라 그리고 색칠하기 위해, 바느질하는 여성들에게 자수 도안을 제안하기 위해, 예술 애호가들에게 즐거움과 유익함을 제공하기 위해, 내가 가지고 있는 도안을 모두에게 기꺼이 내놓았다"고 적었다.
처음 내는 화집이었지만, 이 책은 당장 좋은 평가를 받았다. 화가이자 미술사가인 요하임 폰 산드라르트(Joachim von Sandrart)는 같은 해 <독일 예술 아카데미>라는 책을 냈는데, 여기에 메리안의 그림을 실은 뒤 "그녀의 스케치와 수채화, 판화에서 엄청난 기술과 섬세함, 그리고 지성이 엿보인다"고 극찬했다. 메리안을 일컬어 '미네르바에게 자신의 재능을 바친 여인'으로 평가할 정도였다.
이는 메리안의 화가 경력에는 순조로운 출발이었지만, 결혼생활에는 안타깝게도 악재가 되었다. 잘 나가는 아내에게 열등감을 느낀 것이었을까. 그라프에게 애인이 있다는 소문이 메리안의 귀에까지 흘러들어왔다. 이때 메리안의 선택은 무엇이었을까. 뜬금없게도 그녀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다. 첫딸을 낳은 지 무려 10년 만의 임신이었다.
책 <나는 꽃과 나비를 그린다>의 저자 나카노 교코는 이 임신에 대해 "피임에 실패한 결과이거나 혹은 거의 무너지기 직전인 부부관계를 어떻게든 회복해보려는 마지막 수단이었는지도 모른다"고 진단한다. 어쩌면 메리안은 가족이 늘어나면 남편도 다시 일에 대한 의욕을 되찾고, 외도도 그만둘 거라 기대했던 것 같다. 그러나 이 기대는 곧 산산이 깨진다. 31살에 차녀 도로테아를 낳았지만, 변한 것은 그녀가 책임져야 할 입이 하나 더 늘었다는 사실뿐이었다.
그런 극한 상황 속에서도 메리안은 아이를 낳은 이듬해인 1679년, 이번에는 나비와 나방, 잠자리, 모기 등 186종의 곤충을 관찰해 기록한 곤충도감 <애벌레의 경이로운 변태와 그 특별한 식탁>까지 출간한다. 이 책은 애벌레의 먹이가 되는 식물뿐 아니라 알, 애벌레, 번데기, 성충 순서로 곤충이 변태하는 과정을 한 면에 한꺼번에 그려낸 획기적인 화집이었다.
이 당시 대중들은 축축한 진흙 웅덩이에서 생명이 저절로 생긴다는 '자연 발생 이론'을 여전히 믿었고 마녀가 악마의 비법으로 벌레를 만든다고 생각했다. 심지어 나비조차 '여름새'라고 부르던 시절이었다. 그랬던 시대였으니 곤충이 시간이 지남에 따라 변하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는 이 책이 던진 충격은 어마어마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메리안이 곤충을 채집해 직접 기른 다음, 이를 관찰해 양피지에 정성껏 그린 결과물이라 더 높은 평가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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