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25 19:01최종 업데이트 24.08.26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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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초 한반도에 두 맥주가 있었다. 치열한 경쟁은 숙명이자 생존의 원천이었다. 비록 과거에 비해 힘은 빠졌지만 두 거인, 오비맥주와 하이트진로는 여전히 막강한 시장 지배력을 과시하고 있다. 한국 맥주 맛없다고 핏대를 세우는 사람도 열에 일곱은 두 회사 맥주를 마신다.

광복 후 두 맥주 회사는 근 80년 동안 대한민국 시장을 지배해 왔지만 해외 맥주와 비교하면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평을 받고 있다. 필스너 우르켈, 버드와이저 같은 유럽과 미국 맥주를 차치하더라도 타이거, 창, 칭따오, 산미구엘, 빈땅 같은 아시아 맥주보다 낮은 브랜드력을 갖고 있는 건 부정할 수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두 맥주 브랜드가 방구석 여포에서 벗어나 K-비어의 문을 열 수 있을까? 열쇠를 찾기 위해서는 과거를 봐야 한다. 그래야 한국 맥주가 대동강 맥주보다 맛없다는 이상한 프레임에 휩쓸리지 않는다. 상대를 제대로 알아야 진정성 있는 비판도 가능한 법이다.

먼저 오비맥주부터 시작해 보자. 누군가는 오비맥주를 한국맥주라고 하면 고개를 갸우뚱할 것이다. 내가 좋아하는 카스가 한국 맥주가 아닐 수 있다고 하면 충격을 받을지도 모른다. 오비맥주를 어떻게 봐야 할까. 답은 각자의 몫이지만 그 단초는 역사에서 얻을 수 있다.

영등포에 남아있는 오비맥주 공장의 담금솥 ⓒ 서울시


한국 맥주, 출항하다

적산(敵產), 일본이 패망 후 본국으로 도망치며 남기고 간 재산. 1933년 일제는 조선을 병참기지로 만들며 서울 영등포에 소화기린맥주와 대일본맥주 설립을 허가했다. 광복 후에도 여전히 두 회사는 우리 것이 아닌, 미군정 소유였다.

1948년 미군정은 자신들이 운영하던 소화기린맥주회사를 박승직에게 불하한다. 포목상으로 시작해 일제강점기 시절 큰돈을 번 박승직은 두산의 창업자이자 소화기린맥주의 조선인 주주이기도 했다. 미군정에게는 그의 친일행적보다 맥주 공장 운영 경험과 자본이 더 중요했다.

박승직은 상호를 동양맥주로 변경하고 오비(Oriental Brewery)라는 상표를 붙였다. 1950년 박승직이 86세로 사망하면서 아들 박두병이 사장으로 취임했다. 정상적인 맥주 생산에는 시간이 걸렸다. 당시에는 정부가 생산과 가격을 통제하며 배급 형태로 맥주를 공급했다. 먹을 곡물도 부족했던 시기였다.

동양맥주, 시장을 점유하다

한국맥주의 본격적인 시작은 한국 전쟁 이후라고 할 수 있다. 1953년 8월 1일 <조선일보> 기사 '맥주공장부활'을 보면 전쟁 중 파괴된 동양맥주 공장의 복구 소식을 흥분된 감정으로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약 10개월의 복구 끝에 가동 준비를 마친 동양맥주는 캐나다에서 맥아를 수입해 약 일만 상자의 맥주를 8월 안에 공급할 계획이었다.

이는 조선맥주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1955년 동양맥주와 조선맥주의 운명을 가른 결정적 사건이 등장한다. 두 맥주 회사의 탈세를 조사 중이던 서울지검이 조선맥주의 혐의를 밝혀낸 것이다.

조선맥주 탈세
서울지검에서는..."조선맥주"와 "동양맥주" 등의 탈세혐의사실을 내사해 왔는데 조사결과 "조선맥주"회사에서...탈세한 혐의사실이 드러났고 "동양맥주"회사는 혐의사실이 없는 것으로 판명되었다한다...조선맥주"에 추징금 오천사백만 환을 납부하도록 통고하였다고 한다
<동아일보> 1955. 11. 24.

탈세 추징금의 파장을 못 견딘 조선맥주는 결국 제일은행의 법정관리를 받게 된다. 라이벌 조선맥주가 두문불출하는 사이 1957년부터 동양맥주는 자연스럽게 맥주 시장을 차지하게 됐다. 오비라거를 팔아야만 계열사 두산에서 코카콜라를 공급받을 수 있다는 소문도 있었다.

1980년까지 약 20년 동안 동양맥주의 오비라거는 80%에 달하는 시장점유율을 차지했다. 그 영향력이 얼마나 막대했는지 그룹 이름을 두산이 아닌 오비그룹으로 할 정도였다. 두산이 창립한 야구팀 이름도 오비베어스였다. 세간에는 조선맥주의 크라운맥주의 점유율은 오비 하기 나름이라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동양맥주의 질주는 거침이 없었다. 88년 서울 올림픽이 확정되자 1981년 기술제휴를 통해 하이네켄을 국내에서 생산, 런칭하며 발 빠르게 대처했다. 실제 올림픽 이후 맥주 시장은 1조가 되며 탁주 생산량을 넘어 대중 술이 되었다.

동양맥주와 미국 안호이저-부시와의 관계는 1988년에 시작됐다. 하이네켄과 제휴를 끝낸 동양맥주는 안호이저-부시와 기술 제휴를 맺고 버드와이저와 호가든을 국내 생산 판매했다. 덕분에 진짜 버드와이저와 호가든이 아니라는 오명에도 불구하고 수입맥주가 비쌌던 2010년 대 초반까지 천 원대 가격으로 두 맥주를 마트에서 구매할 수 있었다.

80, 90년 대 오비맥주 병. 국립민속박물관 옆에 가면 볼 수 있다. ⓒ 윤한샘


동양맥주 수렁으로 빠지다

90년대를 보낸 사람이라면 대구 낙동강 페놀 사건을 기억할 것이다. 1991년 구미 두산 전자 공장에서 유출된 페놀로 전국이 들썩였다. 대구 시 상수원으로 유입된 수 백 톤의 페놀은 지독한 냄새를 유발하며 낙동강을 타고 밀양, 함양, 부산 사람들의 건강까지 위협했다. 문제는 페놀이 고의로 유출됐다는 것이었다. 이런 사실이 언론 보도로 밝혀지자 정부는 뒤늦게 관계자를 처벌하고 영업정지를 명령했다.

사건의 파장은 경상도뿐만 아니라 전국으로 퍼졌다. 분노한 시민들은 두산 제품에 대한 자발적 불매운동을 전개했다. 그중 가장 큰 불똥이 맥주에 떨어졌다. 이 여파로 92년 동양맥주는 설립 이래 첫 적자를 기록했다. 그리고 1995년 1천 억이라는 최대의 적자를 맞으며 큰 위기에 봉착했다.

여기에는 페놀 사건 외에 동양맥주의 잘못된 전략도 한몫했다. 1993년 조선맥주는 깨끗한 지하 암반수와 비열처리공법을 강조한 하이트를 출시하며 동양맥주의 심장을 정면으로 겨냥했다. 게다가 1994년에는 새롭게 시장에 합류한 진로쿠어스 역시 비열처리맥주 카스를 출시하며 시장의 판도를 흔들었다.

비열처리공법이란 맥주를 미세필터에 통과시켜 살균하는 방법을 말한다. 상대적으로 섭씨 70도 정도 물에 담가 살균하는 열처리 공법에 비해 신선할 수밖에 없었다. 하이트와 카스가 강조한 비열처리공법은 열처리 공법을 고수한 오비왕국에 비수가 되어 꽂혔다.

동양맥주는 새로운 시장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고 갈팡질팡 했다. 야심 차게 출시한 OB스카이, OB아이스, 넥스는 1년 만에 사라졌고 리뉴얼한 OB라거와 프리미엄 맥주를 표방한 오비 프리미어의 매출도 기대에 못 미쳤다.

동양맥주가 흔들리자 페놀 사건의 여파에서 벗어나지 못한 두산 전체가 흔들렸다. 1995년 그룹 전체가 최대 적자를 보며 위기를 맞이하자 두산은 계열사 통폐합을 단행했다. 동양맥주의 사명도 오비맥주로 변경하며 반전을 꾀했다.

그러나 추락하는 오비에게 날개란 없었다. 1994년 11월 2일 경향신문에 따르면 오비맥주의 점유율은 56%까지 떨어졌고 조선맥주와 진로쿠어스가 각각 35%와 9%를 차지하며 바짝 추격 중이었다. 2년 뒤 1996년, 한국 맥주 시장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졌다. 조선맥주가 역사상 처음 오비맥주를 제치고 시장 1위를 달성한 것이다. 당시 하이트 점유율은 43%, 오비맥주는 41%였다. 이 순간을 영원히 기념하고 싶어서였을까. 1997년 조선맥주는 아예 사명을 하이트로 변경했다.

1998년 대한민국에 닥친 IMF 외환위기는 맥주 시장을 재편하는 계기가 됐다. 유동성 위험에 직면한 두산은 오비맥주 지분 50%를 벨기에 맥주 기업 인터브루에 매각한다. 오비맥주는 이를 반등의 기회를 삼고 내부적으로 정비를 마친 후 판을 흔들 패를 던졌다. 진로쿠어스의 간판 맥주 카스를 매입한 것이다.

많은 기업들이 그랬듯이 진로쿠어스도 IMF 외환위기를 비껴갈 수 없었다. 미국 쿠어스가 법정관리 중이던 진로쿠어스 지분을 모두 매입한다는 소문이 돌았지만 결국 4800억에 응찰한 오비맥주가 승자가 됐다. 당시 시장점유율은 하이트 50%, 오비맥주 30%, 진로쿠어스 20%였다. 오비맥주는 카스를 가져오면서 단숨에 시장의 50%를 차지했다.

오비맥주 살림꾼 카스 ⓒ 카스 브랜드 홈페이지


2001년 인수합병 전략으로 몸집을 키우던 인터브루에 희소식이 전해진다. 그룹의 미래를 중공업에 걸기로 한 두산이 모든 소비재 사업을 처분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두산이 보유한 오비맥주의 나머지 지분도 인터브루에 넘어가며 오비의 주인은 외국기업이 됐다. 이후 인터브루는 브라질 암베브와 미국 안호이저-부시를 연달아 인수하며 초거대 맥주 기업 에이브이 인베브로 변모했다. 카스가 호가든, 버드와이저, 스텔라 아르투아 같은 맥주들과 가족이 된 것이다.

오비맥주, K-비어를 이끌 수 있을까?

2000년대 중반까지 2위 브랜드였던 오비맥주는 2011년부터 다시 1위로 올라선다. 카스 브랜드에 집중하며 젊은 층을 타깃으로 연달아 신제품을 출시한 전략이 적중했다. 반면 하이트는 리브랜딩만 할 뿐, 신제품을 등한시했다. 맥스로 브랜드를 분산시킨 것도 결과적으로 역효과를 냈다.

서자 출신 카스가 오비맥주의 구원투수이자 에이스가 되다니. 만약 두산이 계속 오비맥주의 주인이었다면 이런 결정을 할 수 있었을까? 철저히 수익을 추구하는 외국 기업이 모기업이기 때문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실제로 오비맥주는 2016년 수입 맥주가 국내 생산 맥주보다 싸게 들어오자 카스를 미국에서 생산한 후 재수입하기도 했다.

여전히 카스는 시장 점유율 1위를 지키고 있지만 현재 환경은 녹록지 않다. 1등을 빼앗긴 하이트진로는 영혼 같던 하이트 브랜드를 버리고 테라와 켈리를 출시했다. 맥주 시장에 아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롯데 클라우드도 시시각각 반전의 틈새를 노리고 있다. 다양한 수입맥주 그리고 크래프트 맥주의 등장은 시장을 복잡하게 만들며 과거와 같은 독보적인 시장 점유율을 허락하지 않고 있다.

오비맥주가 K-비어의 리더가 될 수 있을까? 한국에서 크래프트 맥주 바람이 불자 오비맥주는 에이브이 인베브가 미국 구스아일랜드를 인수한 것처럼 핸드앤몰트를 인수했다. 하이트의 테라가 인기를 끌 때는 비슷한 이미지를 가진 한맥으로 대응했고 수입맥주 돌풍이 잠잠해지자 버드와이저, 구스 아일랜드, 호가든을 국내 생산하며 초국적 기업다운 면모를 보였다. 곰표밀맥주가 마트와 편의점 가판대를 채웠을 때는 OEM 전용 생산 회사, KCB를 설립해 편의점에 납품하기도 했다.

이제 시대가 바뀌고 있다. 진정한 1등이 되기 위해서는 시장 점유율에 급급하기보다 시장을 이끌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맥주를 키우는데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K-비어는 대한민국 정체성과 진정성이 담겨야 가능하다. 무엇보다 대한민국 사람들의 자부심이 녹아 있어야 한다. 카스가 한국 맥주인가? 그 답은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맥주가 카스인지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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