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4.08.31 10:51최종 업데이트 24.08.31 10: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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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쟁(6·25전쟁) 보름 전인 1950년 6월 10일, 평양방송에서 김일성 정권의 제안이 흘러나왔다. 1946년에 이북에서 연금된 조만식과 1950년에 이남에서 체포된 김삼룡·이주하를 맞교환하자는 제의였다. 각각의 정권에서 배척을 받는 거물급들을 교환하자는 이 제안은 국제적으로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그런데 실상은 김일성에겐 별 이익이 없는 제안이었다.

조만식은 이북을 활동 기반으로 했다. 그를 이남으로 보낸다 해도 그의 향후 활동은 이북을 겨냥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김일성에게 부담이 되는 일이었다.

김삼룡·이주하는 미군정의 체포를 피해 1946년에 월북한 박헌영을 대신해 남조선노동당(남로당)을 이끈 인물들이다. 김일성 입장에서 볼 때, 이들은 남한에 있어야 했다. 이들이 남한에 남아 이승만 정권을 공격하는 게 김일성에게 더 유리했다.

조만식은 상징성이 컸기 때문에 단신으로 남하해도 김일성에게 부담을 줄 수 있었지만, 김삼룡·이주하는 조직(남로당)과 괴리되면 힘을 쓰기 힘들어 월북 뒤에는 이승만을 크게 압박하기 힘들었다. 그리고 이들이 월북하면 김일성보다는 경쟁자인 박헌영에게 더 유리했다. 그래서 조만식을 풀어주는 것도, 김삼룡·이주하를 받아주는 것도 김일성에게는 별 이익이 되지 않았다. 김일성의 제안은 자신보다는 이승만 쪽에 더 유리한 것이었다.

이승만 정권은 6일 뒤 대통령 성명을 통해 환영의 뜻을 표시했다. 대통령 성명이 13일에 나왔다는 보도도 있지만, 16일에 나왔다는 보도가 훨씬 더 많다. 대구 지역 경제지인 그달 17일 자 <남선경제신문>은 이승만이 출입기자단 앞에서 조만식과 더불어 김삼룡·이주하를 거명한 뒤 "만약 진실로 그들이 일주일 내로 조만식 선생과 그 수행원 한 사람을 남으로 내려 보내 준다면 우리도 전기(前記) 두 사람을 살려서 보내줄 용의가 있다"고 밝혔음을 보도했다.

그러나 맞교환은 성사되지 않았다. 먼저 보내라, 어디서 만나자 등의 논쟁만 되풀이됐다. 그러다가 "그들의 장난이 아닌가 생각한다"라는 이승만의 공식 발언이 23일 나오고, '26일 오후 2시까지 교환하지 않으면 장난으로 간주하겠다'는 공보처장의 성명이 그날 나왔다. 이 통첩이 나오고 이틀 뒤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한국전쟁 직전의 보름 동안 조만식·이주하와 더불어 이처럼 비상한 주목을 받은 김삼룡은 '남로당 총책'이라는 부정적 뉘앙스와 함께 알려져 있다. 공산주의자로 각인된 그는 알고 보면 열혈 독립운동가였다. 물론 대한민국정부는 그를 독립유공자로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를 빼놓으면 충분히 설명되기 힘든 독립운동사의 장면들이 있다. 그래서 그에 대한 호불호를 떠나 그가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어떤 투쟁을 했는지만큼은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장 참혹했던 시기에 항일운동에 나선 김삼룡

김삼룡의 모습 ⓒ 위키미디어 공용


김삼룡은 대한제국이 멸망한 1910년에 충북 충주군 엄정면에서 소작농의 아들로 태어났다. 오늘날의 엄정초등학교가 그의 모교다. 당시에는 4년제 용산리보통학교였다. 그는 이곳을 1928년에 졸업하기 전부터 항일투쟁에 열렬히 참여했다.

김일성의 활동을 소재로 한 장편소설인 <불멸의 력사>를 해설한 <총서 불멸의 력사 용어사전>에 따르면, 1996년 평양에서 발행된 <조선대백과사전> 제4권은 김삼룡이 초등학교 시절인 10대 중반부터 '적들'에게 대항했다고 기술한다.

"1926년 6·10만세 반일시위투쟁 때 동맹휴학에 참가하였으며, 1934년에는 서울 등지에서 반일투쟁에 참가하였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어 2년간 감옥 생활을 하였다. 석방 후 반일 지하투쟁에 계속 참가하다가 1940년에 적들에게 또다시 체포되어 10년 징역을 받고 감옥에 있었다."

위 사전에는 1934년과 1940년에 투옥된 사실만 설명됐지만, 보통학교를 졸업하고 서울 동대문 밖의 고학생 자활단체인 고학당에 입학한 뒤인 1930년에도 "적들"에게 구속된 일이 있다. 이때는 독서회를 조직한 혐의로 붙들려 경성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을 받았다.

학교에 있을 때는 동맹휴학에도 참여하고 독서회도 조직하는 방법으로 항일투쟁을 벌인 그는 학교 울타리를 벗어난 뒤에는 현장 노동자로 일하면서 노동운동의 방식으로 투쟁을 이어갔다. 경성전기·대창직물·경성방직·용산철도공작소·조선인쇄소 등의 노동자들이 일제 착취로부터 노동 조건을 개선하는 일을 함께했다.

그가 벌인 투쟁은 일본 재벌자본가들의 이윤 증대를 위한 식민지배로부터 한국 노동자들을 구해내는 일이었다. 이를 위해 그는 일본 재벌들이 두려워하는 공산주의 항일운동가의 외형을 갖췄다.

윤석열 대통령이 자주 강조하는 것이 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전체주의를 위한 운동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김삼룡이 고개를 끄덕이며 공감을 표할 만한 지적이다.

그가 참여한 독립운동 중에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은 1929년 대공황을 계기로 전체주의 파시즘으로 치달은 일제에 맞서 경성콤그룹(경성콤무니스트그룹) 결성에 참여한 일이다. 경성콤그룹의 목표가 바로 전체주의 일본에 대한 반파시즘 투쟁이었다.

김삼룡이 독립운동가 이관술 등과 함께 이 그룹을 결성한 시점은 1939년이다. 일제가 한국 대중을 침략전쟁에 동원하고 국내 독립운동가들을 친일파로 한창 회유하던 때였다. 이로 인해 국내 항일투쟁이 크게 위축됐을 때 경성콤그룹을 무대에 올렸던 것이다.

경성콤그룹은 일제 막판의 대표적인 항일 조직 중 하나였다. 이 그룹은 일제의 발악이 극도에 도달한 시점에 등장했다. 또 김삼룡 같은 지도부가 체포된 뒤에도 소그룹 형태로 활동을 이어갔다. 그래서 이 조직은 일제강점기 막판의 국내 항일 진영에 정신적인 힘이 됐다.

2004년에 <한국사 연구> 제126호에 실린 이애숙 한국외대 강사의 논문 '일제 말기 반파시즘 인민전선론 – 경성콤그룹을 중심으로'는 1949년에 나온 장복성의 <조선공산당 파쟁사>를 인용해 "파시즘기 운동이 퇴조하던 상황에서 끝까지 운동을 청산하지 않은 사람을 운동선상에 총궐기"시키는 역할을 이 그룹이 했다고 설명한다. 항일운동권에 남은 사람들이 투쟁 의욕을 잃지 않고 끝까지 궐기하도록 해주는 역할을 경성콤그룹이 했다는 평가다.

'남로당 총책'이 그의 전부는 아니다

김삼룡·이주하 체포를 알리는 1950년 4월 1일 자 동아일보 기사 ⓒ 네이버 뉴스 라이브러리


8·15 해방 뒤에 미군정이 이북 출신 청년들을 대거 영입해 행동대로 활용한 것은 남한 내에 독립운동가 혹은 좌파세력이 매우 많은 데다가 이들의 조직력이 상당했기 때문이다. 일제 막판의 혹독한 상황에서도 독립운동이 유지될 수 있었던 데는 경성콤그룹 등의 존재가 상당한 역할을 했다.

2016년에 <한국독립운동사연구> 제53집에 수록된 변은진 고려대 연구교수의 논문 '8·15 직전 국내 독립운동세력의 정세관과 건국준비운동'에 따르면, 경성콤그룹은 항일 무장봉기의 예비 단계에까지 나아갔다.

이 논문에 인용된 일제 검찰 문서인 <조선형사정책자료>는 경성콤그룹이 광산·공장·철도·체신·은행·회사 노동자들과 농민·학생 등을 조직하고 이들에게 무장봉기를 위한 비상 행동요령을 전달했으며, 일본 군대 및 통신·방송 시설의 전선 배치도 등도 입수했다고 알려준다. 일본군과 일본 경찰을 직접 타격하는 것과 별도로, 통신·방송 등을 무력화시켜 식민지 공권력의 조직력과 시스템을 와해시키는 준비까지 했던 것이다.

수감 기간이 길기는 하지만, 그런 그룹을 조직하는 데에 김삼룡은 기여했다. 경성콤그룹과 김삼룡을 추적하면, 이들이 어떤 방식으로 제국주의 무력기구를 해체하려 했는지에 관한 구체적 정보를 접할 수 있다. '남로당 총책'이라는 평가에만 사로잡힐 경우에는 이런 것을 놓칠 수밖에 없다.

일제 막판에도 조직력과 선명성을 유지한 김삼룡의 동지들은 해방 뒤에 남로당 간판을 내걸고 친일세력을 압박했다. 하지만, 미군정이라는 벽에 부딪혀 약화되고, 김삼룡·이주하가 1950년 3월 27일 체포되는 상황으로 이어졌다.

그로부터 2개월 보름이 지난 시점에 김일성의 맞교환 제의가 나왔다. 이 때문에 잠시나마 석방의 가능성이 생겼지만, 이승만이 못 박은 6월 26일의 전날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그 가능성은 사라졌다. 이승만이 말한 26일, 그는 서울 남산으로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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