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심판·양당체제타파·혁신·통합 등 22대 총선을 앞두고 여의도 안팎이 분주합니다. 그러나 갈수록 심화되는 기후위기, 불평등, 돌봄, 재난, 저출생, 지방소멸을 비롯한 복합위기에 대한 해법에 대해서는 목소리가 들리지 않고 있습니다. <오마이뉴스>는 22대 총선을 앞두고 가장 필요한 문제들에 대한 다양한 목소리와 해법을 전하고자 합니다.[편집자말] |
그날, 그가 서 있는 곳이 달라졌다. 모든 풍경도 달라졌다.
여느 때처럼 출근했고, 가족 여행을 앞두고 맛집을 검색하고 있던 날이었다. 남편에게서 전화가 왔다. 국립암센터로 오라고 했다. 체크무늬 잠옷 위에 아빠의 바람막이를 걸친 채 응급실 침대에 누워있던 아이는 급성 백혈병 진단을 받았다. '더불어민주당 ○○○의원실 신성아 선임비서관'이라는 명함은 아무 쓸모가 없었다. 가족 최대의 위기가 시작된 2022년 6월 3일 이후에는 '엄마 신성아'만 필요했다.
병원과 집을 오가고, 주사와 약으로 채워진 시간 속에서 그는 책을 읽고 글을 썼다. 마음 한쪽에 쌓아두기만 했던 오랜 고민들이 아우성치듯 쏟아져나와 "정치가 실패하면 사랑이 무너진다. 예외 없이, 도처에서"라는 문장이 됐다. 그는 저서 <사랑에 따라온 의혹들>에서 돌봄을 "가장 정치적이었어야 할 의제"라고 표현했다. "서로에게 기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조건이라면, 이제 우리는 더 잘 의존할 방법을 고민해야 한다"며 결국 사랑과 정치가 결합해야 한다고 했다.
사랑과 정치, 도무지 낯선 이 조합이 어떻게 나왔을까. 16일 오전, 아이의 '병원학교(소아암·백혈병 진단을 받은 학령기 아이들의 학업을 지원하는 정식출석인정기관)'가 있는 경기도 고양시 일산동구 국립암센터 인근의 한 카페에서 <오마이뉴스>와 만난 신성아 작가는 "평범한 사람은 모두 돌봄 문제를 겪는다"며 "모두가 돌봄 문제가 심각하고 각자 해결하기엔 너무 벅차다는 것을 아는데, 정치만 모른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답은 정치였다. 신 작가는 "정치 외에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며 다가오는 총선에서 돌봄이라는 큰 화두가 제대로 다뤄지길 기대했다. 옛 동료들에게는 "돌봄도 지엽적인 정책만 내놓을 게 아니라 근원적인 비전, 정책을 먼저 던져야 한다"고, 돌봄의 해법이 될 수 있는 생활동반자법을 동성혼 허용법으로 취급했던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에게는 "그 태도로는 (돌봄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조언했다.
'M자 곡선'의 현실... "돌봄은 가장 정치적인 의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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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성아 작가 “세상이 다 돌봄이 문제라는 걸 아는데... 정치만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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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성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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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년 6월 3일, 딸의 급성 백혈병 진단이라는 '인생 최대의 도전'에 직면했다. 끝내 퇴사했는데 원래 아이들은 병치레가 계속 있지 않나. 이전에도 일과 가정의 양립이 쉽진 않았을 텐데.
"양립을 잘 했는지는 모르겠다. 일과 가정은 '엄마'가 '나 자신'을 포기하면 그나마 굴러가더라. 무엇을 포기했나. 일단 윤리, 시어머니께 오랜 시간 아이를 부탁했다. 취향도 엄청 포기했다. 칼퇴근해서 집에 가면 아이를 챙기고, 주말에 시간 나면 보고 싶던 영화말고 아이와 박물관에 가고."
- 가까스로 버텼지만 일터를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한국 여성의 고용률이 20대 후반에 정점을 찍고 점점 내려가다 35~39세에 최저점을 찍는 'M자 곡선'인 현실을 온몸으로 겪은 셈이다.
"M자 곡선은 한국 노동시장이 얼마나 불안하고 취약하고 불평등한지가 드러내는 상징이다. 대기업을 다녀서 육아휴직 같은 복지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은 굉장히 적다. 대다수는 아이를 돌볼 수 있는 시간이나 여유를 허용받지 못하는 직장이거나 비정규직으로 고용 자체가 불안하다. 그래도 남자는 생계부양자라서 노동에 올인해도 당연시되는 반면, 여성은 이미 시장에서 차별받았는데도 선택의 기로가 왔을 때 제일 먼저 탈락한다. (돌봄의) 기본값이 '엄마의 돌봄'이니까."
- 그래서 '딸 윤이의 돌봄 문제는 가장 정치적인 의제였어야 했다'고 썼나.
"두 가지 이유가 있다. 민주당 의원실에서 2년 조금 안 되게 일하면서 매일 정치적 의제로 글을 쓰고 정리하고 행정부와 얘기했는데 돌봄은 늘 소외돼 있었다. '일-가정 양립, M자 곡선 극복 방안 등 미시정책은 얘기하지만 돌봄 자체가 정치의 진정한 화두였던 적이 있었나? 왜 아무도 이 문제를 생각 안 했지? 이걸 정치적 의제로 다뤄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치라는 수단의 의미도 있다. 우리는 가정 내 의사소통을 부모한테는 '공손히', 부부 간에는 '그랬구나' 화법, 즉 감정을 다루는 문제라고 본다. 하지만 가정에서 이뤄지는 많은 의사결정은 적당한 거리를 유지한 채 협의하고, 대안을 만들고, 다시는 이런 일로 싸우지 않게, 가정이란 공동체가 단단히 뿌리내리게 하는 것이더라. 그게 좋은 정치, 이상적인 정치다. 이 깨달음이 와서 '정치'라는 말을 썼다."
- 맞벌이가 늘고, 초고령화 사회에 접어 드는데 인구는 줄고 있다. 지금 우리는 반드시 '누가 돌볼 것인가'에 답해야 하는 상황이다. 하지만 그동안 정치는 왜 이 질문에 답하지 않았을까.
"평범한 사람은 모두 돌봄 문제를 겪는다. 부모, 아이 혹은 친척, 친구가 아픈 사람도 있다. 모두가 돌봄 문제가 심각하고 각자 해결하기엔 너무 벅차다는 것을 알고 한국 소설에서도 화두가 된 지 오래다. SF에선 AI가 등장해서 돌봄의 주체가 된다. 정말 세상이 다 아는데, 정치만 모른다.
왜 그럴까 생각했더니, 정치인이 '돌볼 의무'로부터 면제된 사람이었다. '대의'를 맡은 중년 이상 남성들 아닌가. 얼마 전 정의당 장혜영 의원이 발달장애인 동생을 돌볼 사람을 구하지 못해 늦었다는 글을 봤다. 장 의원이 국회의원 300명 중 한 명이니, 아무리 열심히 얘기해도 공공의 목소리로 퍼져나가지 못하는 거다. 이러니 돌봄은 한 번도 대변되지 못하고, 언제나 무대 뒤에서 스태프들이 하는 조명이나 분장처럼 '알아서 이뤄지겠거니' 여겨졌다."
고작 '필리핀 가사도우미'만... "진짜 후진 정책"
- 정치가 그나마 최근에 내놓은 답도 '필리핀 가사도우미 도입'이었다.
"진짜 후진 정책이다. 그 필리핀 여성노동자는 자신의 아이와 이별하거나 고향에서 아이를 키울 권리를 박탈당한다. 또 아무리 임금을 적게 준다고 해도 도우미 고용이 가능한 한국 가정이 얼마일까. 게다가 원래 가정에서 분담했어야 할 가사노동을 여성에게 고착화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런 단점을 전혀 생각 안 하고 '여성 이주노동자를 데려오자'고 할 수 있는 남성 국회의원은, 한 번도 돌봄을 자신의 일이라고 생각해본 적 없을 거다. 국적·나이를 초월해 '돌봄이나 가사는 여성의 일이고, 여성은 바깥일하는 남성보다 하위 주체'란 무의식이 작동했으니까 가능한 얘기다."
- 돌봄 중에서도 간병인력은 이미 대다수가 재중동포라던데 병원에서 직접 본 상황은 어땠나.
"문재인 정부부터 간호간병통합병동을 시행했지만 진짜 적고, 다른 병동은 반드시 보호자가 필요하다. 그런데 남자 노인이 아프면 보통 아내, 딸, 며느리가 오는데 여자 노인일 때 남편이 오는 경우는 거의 못 봤다. 딸이나 며느리 아니면 간병인이다. 그러면 나이가 지긋한 중국인 혹은 재중동포 여성이 똑같이 연로한 환자의 손을 잡고 병원을 산책한다. 그 풍경을 보면 이미 간병인 자체를 국가가 해결 못하고 외주 주는 상황인데 이제껏 모른 채 했나 싶다. 암병동은 그나마 입원 기간이 짧아서 간병인을 구하기 쉽다던데 요양병원이나 장기입원이 필요한 경우는 더 심각하다."
- 국회에 일할 때도 돌봄 문제를 이정도로 생각해봤나.
"매일 매일 아이 돌봄이 문제였지만, 아프지 않은 아이를 그냥 잘 먹이고 잘 재우면 되는, 딱 그정도의 돌봄이었다. 아이가 아프고 나서야 더 넓은 돌봄의 문제를 체감하게 됐다. 국회 앞에선 늘 누군가 시위하지만 그 외침이 진짜로 의사당 안에 진입하기란 정말 어려운 일이다. 그리고 법과 제도의 변화는 엄청나게 느리고 굉장히 보수적이어서 그들의 아픔을 치유하고 보상하는 데까지 가려면 정말 적지 않은 시간이 소요된다."
- 정당은 '생각보다 훨씬 보수적이었고, 불필요한 일에 지나치게 호전적이었다'고도 평가했던데 그런 이유 때문인가.
"참 많이 생각해봤는데... 정권이 바뀐다고 진짜 삶에 중요한 큰 정책이 바뀌진 않더라. 원인은 정당들의 정책 능력에 있다. 어떤 정당이 정권을 잡든 정책 능력이 떨어지니 관료, 특히 기재부가 짜놓은 틀대로 따라간다. 정당들은 그걸 각자의 레토릭으로 이야기할 뿐이니 큰 틀의 패러다임은 건드리는 일조차 못한다. 이 구조가 굳어져서 국민들은 정치에 효능감을 못 느끼고, 기후·돌봄처럼 옛날부터 다뤄야 했을 큰 의제들은 공회전만 계속 하고 있다."
- 그래도 '재난 앞에서 국가가 나를 보호해준다'고 느낀 순간은 없었나.
"결국 돈이다(웃음). 노무현 정부가 암 보장성을 강화하고, 문재인 정부가 소아·청소년 입원비 자기부담률을 5%로 낮췄다. 아이가 첫 진단을 받고 45일 정도 입원했는데 그 혜택들을 받으니까 몇 천만 원이었던 비용 중 몇 백만 원만 부담했다. 건강보험의 얼굴을 한 국가가 '구명정'이었다.
얼마 전 태안에서 소아 당뇨 환아와 부모가 숨진 채 발견됐다. 저는 운 좋게 경기권이라서 집에서 암센터를 오갈 수 있지만, 지방에 있는 환아는 소위 말하는 서울의 '빅(Big)5' 병원 치료를 받으려면 체류비, 교통비가 엄청 든다. 지역 격차가 매우 크다. 권역별 거점병원이 있지만 기존 항암제로 치료가 안 되는 환자들은 신약이라도 쓰고 싶은데 그런 임상도 '빅5' 위주라서 환자들은 큰 병원들을 찾을 수밖에 없다. 또 급여 공제가 적고, 치료 기간이 긴 난치병이라면 정말 힘들고."
"돌봄공약 진작 1호였어야... 얼마나 많이 대변하나"
- 총선이 다가온다. 만약 보좌진이라면 돌봄 문제는 몇 호 공약으로 하겠는가.
"진작에 1호여야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대변할 수 있나."
- 민주당은 1호 공약으로 '간병비 급여화'를 내놓긴 했다.
"간병비 급여화는 역시나 기존에 우리 정치가 했던 대로, 그냥 한두 가지 정책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식의 접근이다. 이미 요양병원은 문제가 많다. 서비스의 질을 확 낮춰야 이득을 보는 구조라서 얘기를 들으면 공포스러울 정도의 공간이다. 그릇 하나에 밥하고 반찬을 다 으깨어서 환자에게 먹이고, 기저귀 하나를 두 개, 네 개로 잘라 쓰고, 정말 모든 게 아까워서 최소한의 서비스만 주는 곳이 몇몇 나쁜 요양병원이다.
이 상태로 급여화를 해버리면 얼마나 또 많은 이전투구가 일어날까. 또 당연히 보험료 부담이 늘텐데 왜 일언반구 안 하나. 누군가 혜택을 더 본다는 것은 누군가 세금을 더 낸다는 뜻이다. 눈치 보느라 말 안 하면 나중에 더 큰 문제가 된다. '돌봄이 우리 사회 큰 문제라 나눠지려면 보험료 인상이 불가피하다'고 말하고, '그 인상분을 누구에게 쓸 것인가'를 논의해야 한다. 그걸 하라고 주는 기회가 선거다. 이마저 놓치면 정말로 이야기하기 힘들다."
- 국가와 지방자치단체, 교육청이 함께 돌봄을 맡겠다는 민주당 2호 공약 '온동네 초등 돌봄'이나 정부가 올해부터 확대한다는 '늘봄학교(돌봄교실과 방과후 교실을 통합, 오후 8시까지 돌봄 가능)'은 '늦게까지 애 봐줄 테니까 일하라'는 식이다.
"사람들이 원하는 돌봄이 전혀 아니다. 엄마들이 기존의 돌봄교실을 못 미더워한 이유 중 하나는 말 그대로 공간과 관리자만 제공해서다. 그러면 아이의 연령, 학습수준, 취향과 관계 없이 모두 종이접기나 색칠공부만 하면서 시간을 보낸다. 단순히 안전을 책임지는 관리자를 넘어서 아이와 어떻게 시간을 보낼지를 고민하는 교육 또는 보육 교사는 배치되지 않는다. 그만큼 재원을 투자하지 않으니까. 엄마의 선택은 결국 태권도, 피아노 같은 사교육이 된다."
- 항상 '재정'이 문제다.
"일을 너무 어렵게 해결하려고 한다. 책에서 생활동반자법을 해법으로 꼽은 이유는 돌봄의 효율성을 높이면서도 질을 높일 수 있기 때문이다. 돌봄이 필요한 사람들을 굳이 국가가 관리하는 공간에서, 국가의 비용을 투자해서 돌보는 게 아니라 기꺼이 서로 돌보겠다는 사람들을 제도로 인정해주면 해결된다. 또 돌봄은 관계에 기반할 수밖에 없는데, 가까운 사람이 돌봄을 하면 국가 재정에 굉장히 도움이 된다. 이 해법을 두고 자꾸 돌아 돌아가려니까 재정 핑계만 대는 것 아닌가."
"생활동반자법이 동성혼법? 한동훈, 시야 넓혀야"
-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은 법무부 장관 시절 생활동반자법을 두고 '동성혼까지도 염두에 둔 법안'이라고 반응했다.
"법무부 장관으로서 현실 파악도 못한 모습으로 보였다. 이제 70대가 20대보다 많다. 고독사를 가장 많이 하는 집단이 50대 남성이란 연구 결과도 나왔다. 국가는 이들을 어떻게 보호할 건가. 생활동반자법은 굉장히 중요한 해법이 될 수 있다. 그런데 친한 형, 동생, 동료끼리 같이 모여살 때 '이건 동성애자 혜택이라 생활동반자가 될 수 없으니 각자도생(各自圖生)하시라'고 할 건가. 고독사가 딱 그거다. 각자도사(各自圖死).
그런 정부 믿을 수 있을까? '한 번 누락됐으면 그 뒤에 따라오는 고통은 본인 몫'이란 규율을 은연 중에 계속 강요하는 것 아닌가. 이 인식 자체가 바뀌지 않는 이상 돌봄 문제는 해결 안 된다. 저는 한동훈 장관이 그렇게 얘기했을 때 정말 나쁘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집권여당 비대위원장을 맡았다면, 좀더 시야를 넓혀야 한다. 그 태도로는 해결할 수 없다."
- 총선을 준비 중인 옛 동료들에게 하고 싶은 말도 있을 것 같은데.
"'나는 누구인가'를 설명할 때 '나는 인간이다, 여성이다' 이렇게 설명하지 '나는 돼지가 아니다, 바다에 살지 않는다'는 반대화법을 쓰진 않는다. 민주당이 좀 그랬으면 좋겠다. '윤석열 정부의 어떤 정책에, 입장에 반대한다'가 아니라 '민주당은 어떤 입장을 갖고 있다, 무엇을 하겠다'로 스스로를 소개하고 국민을 설득해가는 과정을 이번 선거에는 만들었으면 좋겠다. 다른 정당들도.
정치 외에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의회정치가 그 물꼬를 터야 한다. 총선에서 큰 화두가 던져지고 다양한 논의가 이뤄져야 한다. 선거는 그걸 하는 장이다. '누구를 찍을까' 말고 '그 정책 맞다/아니다'를 얘기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