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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고등법원은 지난 2월 7일 이른바 '보라매병원사건'에 대해서 담당의사에게 1심에서 내려진 살인죄를 살인방조죄로 바꾸어 판결했다.

보라매병원사건은 흔히 대표적인 의료윤리문제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왜곡된 의료제도가 낳은 문제로서의 측면이 강하다. 국내에서 많은 환자와 보호자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치료를 포기하거나 회복이 어려운 환자의 경우 최소한의 의학적 보살핌을 받지 못하는 국내의료환경이 낳은 문제인 것이다.

그런데 요즈음 의료계에서 제기되는 여러 이야기들을 살펴보면 기소되었던 3명의 의사들의 입장만이 있지, 환자와 그 보호자의 입장은 논의에서 제외되고 있음을 본다.

지난 97년 이 사건이 발생한 이후 의료계는 무조건적으로 중환자의 퇴원을 제지하려 들면서 보호자와 싸우는 모습을 보이고, 급하게 의사사회내부의 윤리지침을 제정하는 등 자기방어적인 태도만을 보여왔고 이 사건을 의료제도개선의 주요한 계기로 삼고 국민들과 함께 문제를 풀어가려는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다. 심지어는 환자 보호자를 기소하기까지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지난 19일 의협이 발표한 성명서에서도 일부 긍정적인 문구가 있기는 하나 최근 건보심위불참행위와 같은, 의료의 한축으로서의 역할과 행동이 아닌 의료의 '지배자'로 군림하려는 모습을 보는 것 같아 안타깝다.

덧붙이는 글 | 대한 의사협회성명서

우선 보라매병원 사건(의사가 보호자의 퇴원요구를 받아들여 환자가 사망한 사건)과 관련하여 원심판결에서 담당의사에게 선고된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를 파기한 항소심 재판부의 판단은 당연하다 할 것이다. 그러나 본회는 재판부가 의료계의 특수한 상황을 부정하고 단순한 법적 논리로서 판단하여 담당의사에게 살인방조죄를 선고한 것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심히 유감을 표한다. 

첫째, 환자의 회복가능성 유무에 대한 판단에 있어서 의학적인 관점에서의 판단이 필요함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이를 간과하고 법적 정황 논리만을 근거로 판단한 것은 객관성을 져버린 것이다. 

의학적으로 의사가 수술에 성공하였다고 하더라도 모든 환자가 반드시 회복되는 것은 아니라 할 것인 바, 사건 당시 합병증상 및 수술전의 상태, 수술 중의 문제에 근거 하여 볼 때 환자의 회복가능성이 높지 않았음은 전문가의 감정 및 피해자의 부검에 참여했던 법의학자의 증언을 통하여 밝혀진 바 있음에도 불구하고 재판부가 단순히 보호자의 환자에 대한 퇴원 요구시 의사가 이를 만류하였다는 이유로 이 환자에 대한 회복가능성을 인정한 것은 항상 위험의 개연성을 내포하고 있는 의료행위의 특수성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이다.

둘째, 우리나라는 사회적 약자의 보호를 위해 금치산자제도나 미성년자제도를 두어, 금치산자나 미성년자의 경우에는 보호자 즉 법정대리인이 이들의 법률행위를 대리 할 수 있도록 하고 있는 바, 이러한 금치산자나 미성년자와 거래하는 법률행위의 상대방은 법정대리인의 의사(意思)나 행위를 신뢰하여 거래하고 행동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다. 

보호자의 승낙없는 의사의 환자치료행위를 법적으로 허용치 않고, 의사가 보호자의 승낙없이 소신진료를 하였을 경우 전단적 의료행위로 간주되어 현행법상의 처벌을 받을 수 밖에 없는 의료현실 또한 이에 예외일 수는 없다 할 것이다. 

셋째, 항소심 재판부는 보호자의 퇴원 요구에 굴하여 회복가능성 있는 환자를 퇴원 시킨 담당의사에 대하여 윤리적, 법적 비난가능성을 인정하고 살인방조죄를 선고하였는 바, 이러한 재판부의 판결은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행위의 주체가 누구인가를 간과하여 누군가를 살해하고자 하는 자를 돕기 위하여 "칼"등 살해도구를 사다준 자의 능동적 행위성과 단순히 의료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보호자의 퇴원요구를 끝내 거부하지 못하여 환자를 퇴원시킨 의사의 수동적 행위성을 동일시하는 오류를 범하고 있다. 

넷째, 누군가에게 살인방조(공범)의 고의를 인정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미필적 고 의"에서의 인식적 요소와 의사적 요소 즉 강학상의 개념으로 "누군가가 죽을 수 있다 는 충분한 가능성 및 이러한 누군가의 죽음을 감수나 용인하겠다는 의사"가 인정되어야 한다. 따라서 설사 의사가 환자의 사망가능성을 인식하였다 하더라도(물론 회복가능성이 희박한 환자이지만) 환자의 사망을 감수나 용인할 의사조차 가지고 있지 않다면 이를 기초로한 의사의 환자에 대한 퇴원허가 행위에 대한 고의성을 인정할 수는 없다 할 것이다. 

끝으로 재판부는 의사의 회복가능성 있는 환자에 대한(개인 대 개인) 구체적 퇴원 허가행위에서 윤리적, 법적 비난가능성을 찾고 있으며, 이를 단순히 개인 대 개인 즉 피해자와 가해자의 문제로 귀결시키고자 하나, 이러한 재판부의 견해는 "공공복리" 측면보다 "사적자치" 즉 국가의 국민에 대한 "경찰적 기능"만을 강조하는 19세기 야경국가적 국가관에서나 허용될 수 있는 견해이지, "공공복리" 즉 국민의 사회적 보호기능 및 보장적 기능에까지 귀를 기울여야 하는 현시대에는 어울리지 않는 견해라 할 것이다. 
즉 이 사건은 국민 건강의 첫번째 수호자로서의 국가가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여 빈약한 의료보장제도를 생산하였기에 발생한 범국가적인 사건이지 단순히 일개 개인간의 사적 권리침해의 문제로 야기된 개인적인 사건이 아니라 할 것이다. 

이에 동사건에서 재판부가 진정으로 환자의 퇴원을 허가하였던 의사의 잘못을 묻고자 한다면 경제적으로 어려운 환자에 대한 의료비 부담 문제를 해결하고 이에 대한 법적 구제제도를 마련하여야 할 국가가 이를 방관하고 게을리하여 의료기관 및 의사 개인이 금전적으로 구애받지 않고 소신진료를 할 수 있는 의료환경을 만들어 주지 못한 것에 대한 처벌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재판부가 환자에 대한 국가적인 의무를 도외시한 채 보호자의 퇴원요구에 응한 의사에 대하여 살인방조죄를 선고한 것은 의료환경의 특수성, 구체적 상황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것으로 이로 인한 전 의료계로의 부정적인 파급효과는 크다 할 것이다. 

이에 본회는 재판부가 범국가적 의료제도상의 문제인 본 사건을 개인 대 개인간의 사적인 문제로 치부하려는 것에 대하여 심한 우려를 표명하는바, 이제라도 빠른 시일내에 이러한 제도상의 문제점을 시정할 수 있도록 하여 이러한 가해자의 누명을 쓴 피해자(의사)가 다시는 나오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2002. 2. 19 

대한의사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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