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미인을 어떤 기준을 통해 판단하고 규정지을까. 적어도 대중매체에 나타나는 미인상의 기준은 늘씬한 장신의 서구의 미녀상에 가깝다. 그래서 아름다운 여인, 꽃미남을 꿈꾸는 우리들은 문화적인 견지에서 볼 때 다소 비참한 신세가 되어야만 한다. 사회에서 각광받는 미모를 소유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탈한국화를 해야할 참이니까. 그것이 세계화라는 이름아래 정당화될 수 있는 행위라면, 세계화라는 단어의 정의는 다시 지정되어야 한다. 적어도 최근의 세계화의 코드는 서구화에 맞추어져 있으니까. 우실하는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의 해체와 우리 문화 바로 읽기> 에서 이러한 문화적인 축의 일탈을 지적한다.
100여년전 개항기에 우리는 '파란 눈에 하얀 피부를 한 서양인'들을 '서양귀신'이라고 이상한 사람 취급을 했다면, 불과 100여년이 지난 지금에는 우리의 옷을 입은 이들을 '동양귀신'이나 된 듯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동양귀신' 취급을 받지 않으려고 쌍거풀 수술을 하고, 광대뼈를 깎아내고, 머리를 염색하고, 파란색의 콘텍트 렌즈를 끼고, 백색 미인을 위해 돈과 시간과 정신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체질 인류학적으로 숏다리인 우리들에게 '숏다리'라는 것이 욕(?)이 되는 현실이고 보면, 조만간에 '너 참 한국인 같이 생겼다'는 말이 욕(?)이 되는 세상이 올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게 모든 것이 서구의 가치와 기준에 의해서 평가되고 재단되는 이 '배반의 시대'를 지배하는 사고방식이 바로 에드워드 사이드가 이야기하는 오리엔탈리즘이다.
문제는 현재 우리의 인식에 영향을 미치는 서구 중심의 사고관의 틀이 단지 서구에 대한 동경이 아닌, 동양의 것, 한국의 것보다 우월하며 과학적인 서구 문화라는 식의 비교적인 언어를 통해 형성되고 있다는 것이다. 신비한 동양의 문화라는 식의 어구는 뒤집어 볼 때, 서양의 문화와는 달리 동양의 문화는 비과학적이다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인식의 틀 아래서 서양과 동양의 문화에 대한 대등한 비교가 이루어지기 어렵고, 또한 문화는 그러한 식으로 비교될 만한 사안도 아닌 것이다. 그리고 단지 유구한 역사라는 단어도 이러한 가치관 하에서는 허울좋은 자조로 머물기 쉬운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문화적 코드의 시작은 제도적 교육에서 기인한다고 볼 수 있다. 우리가 배우는 세계사는 사실상 서양사에 불과하다. 미술을 통해 배우는 분야도 사실상 서양 미술이 주종을 이룬다. 넥타이를 맬 줄 모르면 부끄러운 일이 되지만 한복의 옷고름, 대님 매는 것을 모르는 것은 결코 추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풍토 하에서 자란 우리들 그리고 우리의 자손은 정녕 우리의 문화에 대해 제대로 알기 어렵다. 아무리 한국의 문화가 의미있는 것이라는 어구를 갖다 붙인다 할지라도, 사실상 우리 문화가 왜 좋은지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억지로 과학적인 어구를 덧붙여 첨성대를 세계적인 천문관측소라고 말하거나, 한국 건축물의 과학적 구조를 끝없이 분석하는 것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그러한 분석의 틀은 서양 문화에서 기인한 것이고, 애시당초 우리 땅에서는 크게 고려되지 않은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문화는 당연히 우리의 문화적인 코드로 인식되어야 한다. 그래서 제도 교육에서 한국 전통의 문화를 존중하는 것이 중요시되는 것이다.
단지 한글이 이 세상에서 과학적이고 논리적이라는 식의 논리는 애국심을 고취시키기 위한 위정자들의 논리 이상의 것으로 규정되기 어렵다. 훈민정음이 제대로 이해되기 위해서는 그것의 훈민정음이 어떤 원리를 통해 만들어졌는지에 대해 논리적으로 설명하고 교육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이러한 토양이 무르익을 때 우리 문화와 서양의 문화를 대등하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이 생길 수 있는 것이다.
우실하가 그의 저서 <오리엔탈리즘의 해체와 우리 문화 바로 읽기>에서 논하고자 한 것은 단순한 문화국수주의나 보수주의가 아니다. 그는 기존의 문화적 코드는 서구 중심의 권력 체계를 확고화하는 도구로 작용해 왔음을 지적하고, 이제는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 대한 자신감을 회복할 때가 왔다고 이야기한다. 기존에 수동적 소비를 통해 향유되어온 문화는 이제 의심과 부정의 대상이 될 때가 온 것이라는 것이다. 그는 우리가 우리 자신을 재발견해가는 과정을 통해, 기존의 세계화라는 단어 속에 숨어 있던 허울을 깨고, 진정 우리 자신을 위한 국제적인 관계를 정립해 나갈 수 있다고 지적한다.
지금 볼 때 그의 지적은 다소 낡고 고루해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가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는 것들이기에 그 의미는 더욱 새롭다. 특히 그가 분석하고 있는 대상이, 우리 문화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광고이기에 더욱 그러한지도 모른다. 그는 광고 속에 내재한 열등한 우리 문화, 우월한 서구 문화에 대한 권력 구도를 날카롭게 해체하는 과정을 통해 우리의 인식 내부에 작용하고 있는 부조리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