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근대성에 대해 이야기할 때에는 자본주의가 논의의 핵심이 되기 마련이다. 비단 마르크스뿐만 아니라 근대성의 본질을 파악하고자 했던 수많은 학자-사상가들은 자본주의의 형성과정을 '근대'가 성립되는 과정과 동일시해왔으며, 이러한 논의들을 바탕으로 중세와 뚜렷이 구별되는 역사적 개념으로서의 '근대'가 확립되기에 이르렀다.
오늘날을 살아가는 우리들 역시도 그러한 근대성 논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더군다나 현실사회주의가 실패로 돌아가고 신자유주의가 가속적으로 확산되기 시작하는 상황 속에서, 근대성과 자본주의의 태동에 대한 비판적인 성찰이 더욱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물론 그러한 성찰들이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근대성과 자본주의에 대한 논의는 사회-경제사적인 입장이나 정치사적인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거시적'인 관념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들이 대부분이며, 특히 우리 사회에서는 역사를 해석하는 데 있어서의 거시적 관념에 대한 집착이 더욱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신문화사 운동'을 통해, 거시적 관념이 보지 못했던 역사의 매몰된 부분들을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 역사학의 또 다른 방법론으로 각광받기 시작한 지 오래인 것에 비추어볼 때, 우리 사회에서 아직까지도 거시적 역사 해석에만 집착하고 있는 것은 안타까운 일이다.
<온천의 문화사>라는 책은 그런 우리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근대성에 대한 이야기를 건네온다. 얼핏 제목만 보아서는 온천 홍보용 책자나 온천 여행기 같은 느낌을 받기 쉽지만, 이 책은 16세기부터 18세기에 이르는 동안 영국에서 왜 그리고 어떻게 온천이 발달하기 시작했는지, 그런 온천의 형성과정 이면에서 자본주의를 포함하는 '근대성'의 이데올로기가 어떻게 작용했는지를 분석한 역사책이다.
온천과 자본주의,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온천과 근대성이 도대체 어떤 관련이 있을까. 온천처럼 '작은 것'과 자본주의-근대성처럼 '큰 것'이 서로 관련지어질 수 있기나 한 것일까. 과연 우리 사회를 이루고 있는 기본관념인 근대성이 온천의 욕조 안에서 발견되어질 수 있는 것일까. 우리가 흔히 갖고 있는 이러한 의문에 대해 저자는 '그렇다'고 대답한다.
자본주의-근대성이 제아무리 거대한 관념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은 결국 사람의 삶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온천은 그런 '사람의 삶'에 속해있는 또 하나의 삶의 영역이다. 자본주의-근대성과 온천은 서로 무관한 영역에 속해 있는 것들이 아니라, 같은 영역 내에서 다른 크기의 범주를 갖는 실재일 뿐인 것이다. 그런 까닭에 온천의 욕조 속에서 자본주의-근대성에 대한 논의를 건져내려는 저자의 신문화사적 시도가 결코 비약된 이야기가 아닐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책이 역사학 전공자들이나 읽을 수 있는 그런 난해하고 어려운 책은 아니다. 자본주의-근대성의 형성과정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만 가지고 있다면, 누구든지 부담없이 그 흐름을 따라갈 수 있을 만큼 저자의 글솜씨는 편안하다. 평소에는 보기 힘든 16-19세기의 온천에 대한 그림들이나 사진들이 대거 실려 있는 것도 읽는 이의 기분을 즐겁게 만드는 요소이다.
온천을 통해 근대성을 논의하는 것. 이는 분명 색다른 시도임에 틀림없다. <온천의 문화사>를 통해, 뜨뜻한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있다는 기분으로 근대성에 대한 논의에 뛰어들어보자. 근대성에 대한 논의가 반드시 거창해야 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작고 사소한 것들에 기반해 사고하면서도 전체를 보는 냉철함을 잃지 않는 것. 이것이야말로 앞으로 우리 역사학이 지향해야 할 바이며, 저자가 이 책을 우리 앞에 내놓은 진정한 목적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