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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풍의 핵은 잠잠하다고 하지만, 진중권의 내면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안티조선 운동의 초창기로 돌아가보자. 그는 유쾌했고, 발랄했으며, 무적이었다. 아무도 그의 경쾌한 '조선일보 바보 만들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그럴 수 없었다. 여태껏 말할 수 없었지만 누군가는 말을 해야 했던 내용이 그의 입을 빌었기 때문이다.

월장사태까지만 해도 그의 우군은 돈독했다. 어떻게 진중권을 당해내겠는가. 그는 언제나 문제의 중심에 서 있었다. 나는 생생하게 기억한다. 진중권이 조독마에 뛰쳐들던 그 때, 그 카타르시스를. 그때를 기점으로 안티조선 '운동'은 끝났다. 그때부터 적어도 인터넷을 하는 사람들은, 조선일보를 진지하게 상대해야 할 대상으로 인식하지 않게 되었다. 그리고 조금은 지루한 공백기가 왔다.

그 공백기에 안티조선인들은, 과연 무엇이 '상식'인지, '상식적인 언론 행위'란 무엇인지에 대해 진지하고도 심층적인 논의를 했어야 했다. 물론 늦은 후회이다. 조선일보라는 명백한 적이 단단하게 버티고 있을 때에는 무엇이 상식인지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조선일보에 반대하는 것이 상식이었으므로. 진중권은 너무 짧은 시간에 지나친 개가를 올렸다. 상식에 대한 주인의 도덕이 성립하기도 전에, 즉 안티조선에 참여(어느 수준이건)하는 사람들이 상식에 대한 즉자적인 정의를 내리기도 전에, 조선일보의 헤게모니를 박살내버렸다.

그 결과, '상식'을 거론하며 이문옥을 지지하라던 진중권의 말은, 다양한 측면으로 이해되기 시작했다. 즉 오해되고 곡해되기 시작했다. 하긴 그 당시엔 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민주노동당 이문옥 사이버 대변인이 말하는 상식적인 보도란 대체 무엇일까? 이문옥 보도해달라고 하는 거 아냐? 이렇게 논리는 이어지고, 진중권이 오랜만에 우리모두에 찾아와서 OB행세하려 할 때 순간 어떤 자식이 진중권 이메일 사칭하는구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미리 말해두건데, 나는 진작부터 김민석이 싫었다. 웃는 표정이 기분 나쁘기 때문이다. 이명박은 당최 논의의 대상이 아닐 것이다. 이문옥은, 진중권이 상식 차원에서 팬클럽에 가입하길 바라던 이문옥은, 아니 그게 누군지도 모르는데 어떻게 팬이 될 수 있겠냐 하는 생각에 관심권에서 멀어졌다. 차라리 부산시장 선거에 집중했어야 한다고 지금도 나는 생각한다. 물론 후보가 영 아니었지만. 그 선거철은 정말 잊고만 싶은 기억으로 남아있다.

정의되지 않은 모든 단어는 우상이다. 적어도 그것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에 대답할 수 없는 단어는 우상이고, 모든 우상 숭배는 폭력을 필함한다. 상식적으로 이문옥 지지하자는 말이 씨도 안 먹혔던 것에는 이런 이유도 있다. 민주당 지지자들이 늘 품고있는 진보정당에 대한 불안감도 있지만 말이다. 적어도 우리가, 상식이 무엇이며 상식적인 언론이란 무엇인지에 대해 미리 규정해놓은 사전을 가지고 있었더라면, 이렇게까지 심한 지경에 다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조선일보는 자멸할 것이지만 우리는 모두 내상을 입었고 그 어떤 확고한 정의도 갖지 못했다. 절반의 승리만을 거두었다.

강준만은, 비유하건데 아브라함과 같다. 인터넷상에서 실명 거론하면서 상대를 비판하는 우리 모두의 언어는 모두 강준만의 자손이다. 나는 훗날 이 세대가, 지금의 심경이야 어떻든 강준만과 같은 시절을 공유했음을 뿌듯해할 날이 올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는다. 적어도 지성사를 쓴다면, 그는 한 챕터의 이름 그 자체가 될 자격이 있다. 아무도 하지 않았던 메타비평을 시작하였으므로.

진중권은 그 아브라함의 자손들에게 힘을 불어넣어 출애굽을 시켜준 모세라고 생각한다. 람세스 조갑제를 가볍게 눌러가며 가나안으로 향하다가, 조독마에 뛰어들어 홍해를 갈랐다. 문제는 그가 너무 정치적 행위에 약하다는 것이다. 모세는 자신의 입지가 약해져갈 시점에 시나이산에 올라가 십계명을 받아온다. 그리고 그것에 기초하여 신의 대리인으로서의 자격을 얻는다. 또한 그 덕에 그 전까지는 한낱 다양한 신 중 하나에 불과했던 야훼는 진정 유일신으로 자리잡을 기반을 얻는다. 우리도 이와 같았어야 한다. 조독마 평정으로부터 옥석논쟁까지의 공백기동안, 상식에 대한 십계명을 작성했어야 한다. 때늦은 후회지만 안하는 후회보다는 낫다.

내가 아는 바 진중권은 비트겐슈타인의 추종자이다. 후기 비트겐슈타인은 일상 언어의 마찰을 있는 그대로 수용하자고 한다. 문제는 그 추종자인 진중권이 자신의 역할을 잘못 이해했다는 것이다. 일상 언어의 마찰을 이용하여 앞으로 나가는 것이 아니라, 그 마찰이 얼만큼이고 어디서 어떻게 작용하는지를 연구할 의무가 그에게는 있었다. 지금이라도, 그것을 교정할 시간은 있다.

'상식이 뭔지 꼭 말해야 합니까?'라고 그가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혹은, '애들도 아닌데 그 상식에 대해서 떠먹여줘야 합니까?'라고 말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것은, 비유하건데 사전 만드는 일이다. 누가 일상 언어 생활하는데 지장 있어서 사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듯, 상식이 뭔지 정말 몰라서 상식을 정의하자는 소리는 아니다. 다만 그것이 제대로 마찰할 수 있도록 다리를 달아 줄 필요가 있다. 그 과정이 없다면 그 상식은, 전두환의 '정의사회구현'과 같은 최악의 오용을 당할 가능성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진중권의 언어 감각은 천재적이다. 이 글을 쓰면서 가급적이면 피하려 했지만, 인터넷에서 안티조선에 관한 글을 읽은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 피할 수 없는 진중권의 체취가 묻어난다. 또한 그는 상식을 논하는 최전선에 서 있었다. 그에게 다 전가하자는 말은 아니다. 제대로 된 토론의 광장이 열려야 할 것이고, 그 깊이도 보장되어야 할 것이다. 나는 보고 싶은 것이다. 상식 자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논하는 광장에, 진중권이 소크라테스처럼 서있는 모습을. 그것이 천재의 의무이다.

앞으로 예견되는, 조선일보 없는 사회를 위하여 이제 적극적으로 상식을 토론하자. 몰상식이 상식을 정의해주던 시대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한다면, 그것 또한 하나의 몰상식으로 환원될 것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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