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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지하듯이 한국전쟁에 관한 기존의 연구경향은 크게 소련과 중국, 북한의 전쟁책임에 무게를 둔 전통주의적 연구와 미국과 남한(한국)의 전쟁책임을 강조하는 수정주의적 연구로 이분화(二分化)되어 있었다.
그러나 90년대에 들어와서 탈냉전(脫冷戰)으로 인한 소련, 중국측 비밀자료의 해제에 힘입어 ‘수정주의의 수정’이랄 수 있는 신전통주의적 경향이 재차 입지를 강화함에 따라 현재로서는 소련과 중국, 북한측의 전쟁책임만이 일방적으로 부각되는 방향으로 치닫게 되었다.
그렇지만 엄밀하게 따진다면 냉전시기 미소의 정책을 서로 대변하면서 대립했던 전통주의와 수정주의적 연구경향이란 한국전쟁에 대한 두 냉전진영간 정책상의 시각차였다는 점에서 단지 적대적 의존관계를 반영한 것으로 알고보면 본질적인 것은 아니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다시 말해 한국전쟁을 보는 시각에 있어 진정 본질적인 대립이란 전쟁정책의 입안자이자 실행자였던 미·소·중·남북한 정부기관들과 온몸으로 한국전쟁을 경험할 수밖에 없었던 당시 한반도의 평범한 사람들 사이에 있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런 의미에서 그동안의 한국전쟁 연구는 한반도의 보통 사람들, 특히 국가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소외되었던 개인이나 집단, 지방민들의 생생한 전쟁경험담, 목소리에 보다 귀기울이지 못했음에 반성해야 할 것이다.
요컨대 전쟁을 총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식적 전쟁사랄 수 있는 정책사 연구 등과 함께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의 비공식적 전쟁경험을 구술(생애)사라는 형식으로 보완할 필요가 있음을 의미한다.
그렇기에 지난 2월에 간행된 8인 공저, <전쟁과 사람들 : 아래로부터의 한국전쟁연구>(한울아카데미, 2003.2)는 구미에서는 이미 보편화된 구술사(Oral History)라는 역사 연구방법론을 늦게나마 우리들의 전쟁연구에도 본격적으로 진입시키고자하는 기획이 결실을 본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물론 그동안 소외되었던 ‘민중의 언어’를 통해 과거의 기억을 재현함으로써 기존의 공식적 역사를 재해석하고자하는 학문적·비학문적 시도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얼핏 살펴보아도 김학순 할머니로 대표되는 일본군 위안부의 존재와 실상에 대한 증언이라든지, 최근 행해졌던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학살 유족들의 증언(2002년 7월 1회, 2003년 6월 2회)과 인터뷰, 제주 4.3이나 거창양민학살 유족들과 ‘수형자’들의 증언이 있었고, 공식적인 책자로 발행되기도 했다.
또 일부 가해자들도 한 저서에서 인터뷰를 통해 사실관계를 증언하기도 했다. 나아가 일부 역사 연구자들과 인류학자들도 그간의 연구물을 《역사연구문제》(제6호)과 《한국문화인류학》회지나 세미나 자료집을 통해 발표하였다.(지난 6월 30일에는 윤택림의 책, 『인류학자의 과거 여행 -한 빨갱이 마을의 역사를 찾아서』(역사비평사)가 새로 간행되었다. 이후 별도로 소개할 예정이다) 이렇게 놓고 보면 8인 공저, <전쟁과 사람들 : 아래로부터의 한국전쟁연구>는 이상의 구술(생애)사 연구를 이 시점에서 중간결산하고 앞으로 더욱 박차를 가할 필요가 있는 적절한 시점에 간행되었다고 볼 수 있다.
때문에 이 책은 구술사 연구를 시도하거나 재차 개념정리하려는 전문 연구자들에게 특히 도움이 된다. 왜냐하면 이 책은 1부에서는 호남의 지역사회를 대상으로 “전쟁중에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러한 일들은 전쟁 후 전쟁을 경험한 사람들의 기억과 생활세계 속에서 그리고 지역사회 속에서 어떻게 반복, 재생산되고 있는가”하는 문제의식에 기반해서 지방민의 전쟁에 대한 역사적 경험을 드러내는 것을 목적으로 하지만(1부의 목차는 다음과 같다. 제1부 한국전쟁과 지역사회 그리고 사람들 : 전쟁연구와 구술사/염미경, 전쟁과 ‘빨갱이’에 대한 집단기억/박정석, 전쟁과 농촌사회구조의 변화/윤형숙, 전쟁과 지역권력구조의 변화/염미경, 전쟁경험과 공동체문화/표인주, 상이군인과 유가족의 전쟁경험/박정석, 한국전쟁연구의 새로운 방법론 모색/김동춘), 2부에서는 일본·미국·인도의 구술사 연구 동향과 전망도 같이 살피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일반 독자들은 전문적인 구술사적 방법론 자체보다는 이에 의해 구체적으로 분석되고 있는 개개의 사례들만을 뽑아 읽어보아도 충분하다. 전남 해남의 한 마을사례, 함평지역, 강진지역, 영암지역의 각 사례분석은 대부분 흥미진진하게 읽히기 때문이다. 불과 50여년 전의 사건들이지만 그동안 급속한 사회변화와 국가주의 이데올로기로 말미암아 억압되어 있던 우리의 ‘은밀한’ 과거가 바로 우리들 주변의 평범한 어른들 입을 통하여 그 얼굴이 드러나는 순간은 가히 압도적이다.
사실 이때 당혹스러운 쪽은 위로부터의 한국전쟁연구라는 관성에 익숙해져 있던 청자(聽者)인 우리들 자신이다. 그 결과 “특정 이야기를 한다는 것은 시간의 위협에 대해 일정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 되고 역사를 말하는 것 자체가 행동하는 것이 된다”는 본문의 한 구절대로 한국전쟁사는 평범한 지방민들의 '말하기'로 말미암아 또다시 새로 써야만 하는 처지로 내몰리게 된다. 역사를 총체적으로 이해하고자 하려는 이성과 의지가 우리들에게 있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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