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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신이 제일 좋아한다는 경비행기 엑스-에어 앞에 선 안재홍
ⓒ 안미정
사람들은 누구나 이루지 못한 꿈을 가슴에 품고 산다. 비록 지금은 생활이라는 틀 속에서 숨을 헐떡이고 있어도 가슴 한 쪽은 늘 이루지 못한 꿈을 그리워한다. 이러한 유년기의 꿈을 고희(古稀) 가까운 나이에 이룬 사람이 있다.

경비행기를 조종하며 하늘을 나는 꿈, 그 꿈을 이룬 안재홍(68·한국비행교육원 명예교관)씨가 바로 그런 사람이다.

그를 '할아버지'라고 불렀을 때 '누가 할아버지이냐'고 그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로 반문했다. 그 나이쯤 되면 쓸쓸한 모습도 보일 만한데 너무나 당당하다. 인생은 칠십을 살기 어렵다고 한 두보의 인생칠십고래희(人生七十古來稀)는 진정 두보가 살던 시대에나 해당되는 이야기인 것 같다.

그의 비행하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했더니, 안정성도 뛰어나고 시야가 넓어 자신이 제일 좋아한다는 경비행기 엑스-에어(X-air)를 타고 엄지손가락을 쭉 펴 보이더니 하늘로 이륙한다. 곧 상공을 선회하더니 시야 밖으로 사라진다. 산은 나누고 물은 모은다. 그리고 하늘은 이 모든 것은 아우른다. 그래서 하늘에서 보는 세상은 모두 하나가 된다.

이렇게 하늘을 즐기게 되기까지는 매서운 교관의 지도와 그의 인내가 있었다. 고희를 바라보는 나이에 젊은 교관에게 호되게 야단을 맞고 해가 뉘엿뉘엿 지는 벌판을 지나 귀가하는 기분은 그야 말로 참담함 그 자체였으리라.

'나이 먹어서 내가 이게 뭐하는 짓인가? 정신도 육체도 모두 퇴화된 이 시기에 너무 늦은 건 아닌가?'

수시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기 위해 그는 자신이 죽으면 화장하여 하늘에 뿌려달라고 유서를 써 놓고 비행을 시작했단다.

경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나는 것만큼은 죽기 전에 꼭 해보고 말리라.그는 자신이 비행기를 타고 날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그의 비행일지에 '인식의 벽을 깨고'라는 시로 표현해 놓았다.


하늘에 오르리
자리를 박차고,
정체된
두꺼운 관념의 벽을 깨고
창공을 향해


하늘을 날으리
이카루스의 밀랍날개가 아닌
튼튼한 날개
애기(愛機)의 조종간을 꼭 쥐고
여명의 태양을 향하여...


이런 이야기를 듣고 있으려니 그는 무엇 때문에 이 많은 나이에 미친 듯 비행기를 사랑하게 된 것일까? 그의 지나온 생애가 저절로 궁금해졌다.

전쟁에서 싹튼 꿈

안재홍씨는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 큐슈에서 태어났다. 그가 살던 집 뒷동산에는 일본군 비밀항공기지가 있어 항상 비행기가 오갔다. 밤낮 없이 터지는 미군의 폭탄 소리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고 폭탄이 떨어진 자리는 참혹하기 그지없었다.

매일 밤낮을 공포에 떨어야 했다. 어느 날부터 소년은 폭탄을 퍼붓고 노을이 지는 하늘을 선회하여 날아가는 비행기를 언덕 위에 올라가서 구경하곤 했다. 아름답게 다가오기도 했다. 나도 저 비행기를 탈 수 있다면…. 공포가 어느덧 꿈의 대상으로 전이되어 있음을 발견한다.

비행기는 그에게 공포와 신비를 동시에 제공하는 것이었다. 비행기에 대해서 알고 싶어졌다. 그러나 가난한 집 아이들은 말로 하지 않아도 부모의 몸의 언어를 읽을 줄 안다. 소년은 언젠가 나도 저 비행기를 타고 하늘을 날아 보리라 마음 속으로 다짐, 다짐할 뿐이었다.

일본에서도 비밀항공기지가 있는 곳이라면 얼마나 외진 곳이었을까.그 곳에서 나라 빼앗긴 이민족 조선인으로 살았을 그에게 비행기는 어쩌면 힘든 현실을 탈출할 수 있는 유일한 도구로 보였을 터였다. 폭탄을 쏘아대며 자유를 억압하고 평화를 해치는 공포의 도구에서 이방인으로 사는 소년은 아이러니하게도 자유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종전 후, 초등학교 3학년 때 전라도로 이주하여 살면서도 하늘을 나는 꿈은 여전히 가슴속에만 묻어 두어야 했다. 중학교에 진학하고 고등학교에 가고 싶었지만 가정형편은 나아지지 않아 더 이상 진학할 수 없었다.

서울로 올라왔다. 택시운전을 하다가 결혼을 하고 세 딸을 낳고 정신없이 살다보니 유년기에 꾸었던 꿈도 잊은 줄 알고 생활에 부대끼면서 그렇게 견뎌왔다. 그 다음은 연세 많으신 어르신들께 익히 들은 이야기들과 같다. 정말 다사다난(多事多難)한 세월이었다.

꿈의 도전, 단독 비행

먹고살 만하여 하던 사업을 그만두고 경로당도 들락거려보고 복덕방도 가봤지만 갑자기 남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막막했다. 내가 무엇을 하면 잘할 수 있고 무엇을 하고 싶은가를 생각했다. 결국 그의 머리에 떠오른 것은 오랜 시간 가슴속에 묻어 두었던 비행기였다.

너무 오랜 세월이 흘러 화석처럼 단단해졌을 법도 한데 그는 가슴속에 '하늘을 나는 꿈'이라는 용암을 잠재우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이 분출한 것이다. 남들이 퇴직하고도 남을 나이인 67세에 비행조종의 꿈을 실현하기 위해 한국비행교육원을 찾아갔으니 말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경비행기교육을 받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그의 비행일지에 아주 잘 나타나 있다.

'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디, 라스트에 쯩(?) 가지고 나 하늘로 가리라. 저 밑 세상에서 살 때 나 비향기 운전 했다아고 말하리라.'

천상병 시인의 시 '귀천'의 이미지를 빌려오고 안재홍씨 특유의 유머감각이 가미된 표현이다. 결국 그는 25시간을 비행한 끝에 단독비행에 성공하게 된다.

"보통 20시간이면 단독비행을 하지만 나는 늙어서 25시간이 걸렸어요. 내가 날고 있는지 땅 위에서 기고 있는지, 내가 조종간을 당겼는지 밀었는지도 모르고 비행연습을 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단독비행을 하라는 교관님의 말에 팔을 붙잡고 '내가 뭐 잘못했느냐'고 '잘하겠다'고 다짐 다짐하여 다음으로 미뤘어요. 너무 두려웠거든요. 그리고 2~3일 후에 단독비행에 성공했지요. 그때 느끼는 자유로움은 말로 할 수가 없어요. 새로 태어난 기분이었거든요."

비행연습을 하면서 자신이 좋아하는 우리나라 최초의 비행사 안창남(1901~1930)씨가 고국방문 비행을 했던 12월 20일날 단독비행을 하리라 마음먹었다. 그러나 그보다 이른 11월 17일날 단독비행에 성공하여 한국비행교육원의 명예교관이 되었고 이제 다시 정식교관이 되기 위해 훈련 중이다.

교습생을 하늘로 혼자 날려보내는 교관의 조마조마한 마음을 알기 때문에 실제적인 교관생활은 애간장이 타서 못 하겠단다. 그렇지만 비행기를 좀 더 많이 알고 하늘을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들이 가고 싶어서 경비행기에 대한 인터넷 사이트도 검색하고 책도 찾아보면서 비행을 즐긴다고 한다.

인터뷰가 끝나갈 무렵 이런 말도 했다. 내년 5월이 자신과 함께 고생고생 하며 살아온 부인의 생일이란다. 그때 부인을 경비행기에 태우고 하늘에서 생일 축하한다고 사랑했노라고 말하겠단다.

그에게 "꿈을 이뤄서 행복하겠다"고 말했다. 그러자 그는 "꿈을 이루고 나면 또 다른 꿈이 내 안에서 이미 자라나 있다"고 응수했다. 그래서 "그 꿈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칠순 때는 건강이 허락한다면 경비행기를 타고 전국일주를 하고 싶다."

덧붙이는 글 | 한일시멘트사보에서도 읽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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