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소설가 위화(余華)의 동명 소설을 극화한 극단 미추의 <허삼관 매혈기>(6월4일∼7월4일, 동숭아트센터 동숭홀, 강대홍 연출)는 1960년대 격동의 중국사를 배경으로, 가난한 노동자 허삼관이 자신의 피를 팔아 살아가는 인생역정을 다룬 작품이다. 우리의 저개발의 기억과 맞물리면서 연극은 상당부분 공감을 일으키며 친밀하게 다가온다.
<허삼관 매혈기>는 지난 해 6월 문예회관대극장에 올려져 한국연극협회 선정 올해의 연극 베스트7, 동아연극상 작품상, 연기상 등 연극계에서 인정받고 올 해 연극열전 시리즈 중 여덟 번째 작품으로 다시 관객과 마주하는 것이다. 이 연극은 가족과 이웃 그리고 부성애 같은 보편적 정서를 다루고 있는 만큼 스테디셀러 연극으로서의 에너지가 여전하다.
<허삼관 매혈기>는 다시 한 번, 드라마의 힘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몸소 보여준다. 동숭아트센터 동숭홀의 넓은 텅 빈 무대. 소품이라곤 의자 몇 개가 전부. 이 비어있는 무대를 심심하지 않게 하는 건 바로 드라마의 힘이다. 힘든 시절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악다구니와 그 안에서 피어나는 따뜻한 삶의 이유를 <허삼관 매혈기>는 웃음과 미소, 눈물로서 공감가게 그려나가고 있는 것.
<허삼관 매혈기>는 비어있던 무대를 상징의 힘으로 풍요롭게 만들기도 한다. 가령, 매혈의 순간마다 천장에서 하나씩 내려오는 홍등과 피 떨어지는 소리는 단순해 뵈는 시각과 청각 효과를 통해 효과적인 설명을 한다. 극의 끝에 만년의 주인공 위로 홍등이 무수히 내려와 있을 때 그 상징이 가져다 주는 힘은 상당하다. 처음엔 생계를 위해 매혈을 하던 허삼관은 나중엔 안 하면 뭔가 허전한 취미생활처럼 매혈을 해왔던 것. 평생을 매혈하며 살아온 허삼관에게서 우직하게 살아온 우리네 부모들을 떠오르게 만든다. 미소를 그리며 눈물을 떨어뜨리지 않을 수 없는 감동적인 마지막 장면이다.
텅 빈 무대를 채우고 있는 것은 연기도 한 몫 한다. 연극열전의 다른 작품인 <에쿠우스>처럼 배우들은 무대 양쪽에 나란히 앉아있는데, 이 들은 제 차례가 오면 적극적인 등장인물로서 무대에 선다. 특별한 등퇴장 없이 소극적 주체(관객)와 적극적 주체(배우)를 오가며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배우들의 연기는 효과적인 무대설정(여지(餘地)를 둔 무대)을 둔 채 빛을 발한다.
'니미럴'을 입에 달고 사는 허삼관 역의 이기봉은 힘겨운 시대를 특유의 낙관과 유머로서 살아가는 가장 역을 맡아 부성애와 부부애를 눈물겹게 보여준다. '어머나'로 모든 상황에 방점을 찍는 허옥란 역의 서이숙은 어깨 골절사고에도 불구하고 천방지축 아내 역을 호연해 살갑게 다가온다.
작품성과 오락성을 동시에 갖춘 <허삼관 매혈기>는 울리거나 감동 주겠다고 작정하지 않고 무대에 올림으로써 재미와 감동을 선사하고 있다. 클래식 연극으로서의 매력을 갖추고 있는 좋은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