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독일인들에게 나치(Nazi)는 그 자체가 금기의 대상이다. 그들 스스로 조상들의 만행을 인정하고 반성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치를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는 논쟁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주변국들에게 유태인 못지않은 민족적 상처를 입힌 일본도 그런 점에서 보면 자신의 가혹한 식민통치 기억을 반성하고 금기시 하는 게 맞다.
그러나 일본은 독일과 다르다. 반성은커녕 자신들의 식민통치를 정당화하는 망언을 일삼고 역사교과서까지 왜곡하면서 과거의 잘못을 애써 외면한다. 그런 차이 탓일까. 식민 지배를 받은 우리나라의 학자가 일제침략이 축복이었다는 주장을 펼치는 기현상까지 벌어지고 있다. 유대인학자들은 물론 독일학자들도 어안이 벙벙할 일이다. 일본의 후안무치 그리고 청산되지 않은 한일과거사 탓에 안타깝게도 일본의 한국 통치는 여전히 논란의 대상인 것이다. 속 터지지만 우리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한일관계의 현실이다.
최근 일본 통치가 축복이었다는 한승조 고려대 명예교수의 주장을 두고 보수와 진보를 막론하고 온 나라가 분노로 들끓고 있다. 국민정서를 심하게 자극하는 주장의 선정성은 논외로 치더라도 그의 발언은 치명적인 논리적 결함을 안고 있다. 우선 일본이 아니었다면 러시아의 지배를 받아 더 큰 고통을 당했을 것이라는 한 교수의 전제는 “역사에 가정은 없다”는 역사학의 기본 요건도 충족시키지 못하는 잘못된 출발이다. 또 일제에 의해 신식 경제체제가 자리 잡았다는 주장도 일본이 자행한 인적·물적 수탈과 조선의 자생적 발전 가능성을 간과한 궤변이다. 굳이 다른 내용을 더 따져보지 않더라도 그의 주장은 학문적 타당성을 찾기 힘든 억지에 가깝다.
이런 주장이 혹독한 비판에 직면하는 것은 일면 당연하다. 그러나 그 비판이 인격적 비난을 동반한 여론 재판으로 이어지는 것은 곰곰이 따져볼 일이다. 일제역사를 어떻게 볼 것인가가 아직 논란의 대상이 되는 것이 우리의 엄연한 현실이고, 정치인과 같이 대표성을 띈 공인이 아닌 일개 학자라면 자신의 주관과 소신을 자유롭게 밝힐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학자가 빈약한 논리와 왜곡된 역사인식을 바탕으로 자신의 주장을 펼친다면 학자로서의 부족한 자질을 비판할 일이지 사람자체를 싸잡아 벼랑 끝으로 몰 일은 아니다. 지금처럼 한 교수의 명예교수직과 시민단체의장직까지 박탈하고, 친일파나 매국노와 같은 인격적 비난을 퍼붓는 것은 그 정도를 떠나 비판의 방식이 적절치 않다. 그의 생각이 틀린 것이지 그 사람자체가 나쁘다고 볼 순 없는 것이다.
특히 이번 한승조 교수 파문은 향후 전개될 과거사 정리 작업의 예행연습이라는 점에서 신중하게 접근할 필요가 있다. 앞으로 친일역사가 밝혀지는 과정에서 국민감정이 용납지 못할 다양한 이론과 인물들이 등장할 것이다. 그때마다 일방적인 여론 공격으로 점철된다면 진상규명과 반성 그리고 용서를 지향하는 과거사 청산작업은 인민재판으로 전락할 우려가 있다.
그럴 경우 일본에 대한 우리의 과거사 사죄요구도 공감을 얻기가 더욱 어려워 질 것이다. 한 교수 발언 논란을 두고 일본 네티즌들 사이에서 “한 교수님 일본으로 빨리 망명하세요”라는 반응이 나오는 등 벌써부터 우리가 일본인들에게 조롱의 대상이 되고 있음을 직시해야 한다.
요즘 독도가 한일 간 첨예한 이슈로 급부상하면서 반일감정이 고조되고 있지만 정작 일본인들의 반응은 무덤덤하다고 한다. 우리의 반일정서는 일본인들에게 냄비근성정도로 가볍게 비춰지고 있는 것이다. 한일과거사문제에 대해 최대한 감정을 억누르고 차분하게 대처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 일본은 독일처럼 성숙한 민족이 아니라는 사실, 그리고 여태껏 친일과거사를 청산하지 못한 우리의 '현실'을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
어떤 주장에 제기되더라도 열린 논쟁의 영역에서 토론하면서 빈약한 논리와 불순한 의도를 가진 주장들이 자연스레 설 자리를 잃어가도록 유도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그래야 한 교수 같은 사람들도 스스로 자신의 논리를 되돌아 볼 것이요, 독도가 우리 땅이라는 논리도 더욱 탄탄해 질 것이다. 일제악몽에 대한 우리 가슴의 얼얼한 상처는 역설적이게도 머리의 차가운 이성으로 치유할 수밖에 없다.
덧붙이는 글 | 웹진 인물과사상의 논술/작문방에도 같은 날 기고하였습니다.
|
|
저작권자(c) 오마이뉴스(시민기자),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오탈자 신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