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기차에서 내렸다. 청량리역에서 기차를 탄 지 꼬박 2시간이 걸려서야 김유정역(옛 신남역)에 도착한 것이다. 여기서 김유정의 고향인 신동면 실레마을까지는 지척이다.
실레마을은 김유정의 탯줄이 묻힌 고향이지만 동시에 그가 쓴 단편소설 30편 가운데 12편이 태어난 소설의 고향이기도 하다.
나의 고향은 저 강원도 산골이다. 춘천읍에서 한 20리 가량 산을 끼고 꼬불꼬불 돌아 들어가면 내닫는 조그마한 마을이다. 앞뒤 좌우에 굵직굵직한 산들이 빽 둘러섰고, 그 속에 묻힌 아늑한 마을이다. 그 산에 묻힌 모양이 마치 옴팍한 떡시루 같다 하여 동명을 실레라 부른다.
_ 김유정의 '오월의 산골짜기' <조광>,1936
기차에서 내린 답사객들이 한꺼번에 플랫폼으로 우르르 쏟아져 나왔다. 모두 약간은 들뜬 표정이다. 마을에서 마중 나온 풍물패가 치는 덩더쿵 가락과 사람들이 떠드는 소리가 뒤엉겨 조용하던 시골 마을이 금세 시끌벅적해진다.
풍물패의 길놀이를 따라가다 보니 어느덧 동네 어귀로 들어섰다. 현재 이 마을은 50여 호가 살고 있다고 하며 음식점 등이 많이 들어앉아서 제법 도시 분위기가 났다. 김유정의 생가 앞은 벌써부터 사람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실레마을과 김유정의 생가
생가는 마을의 중심에서 벗어난 동쪽 언덕 아래 있었다. 'ㅁ'자형 구조로 된 초가집이었다. '똬리집' 혹은 "뙈쇄집'이라고도 부르는 이런 형태의 집은 안마당이 좁아 집 한가운데 하늘이 빠끔히 뚫려 보이는 형태다.
집이 생긴 모양을 더 자세히 관찰하기 위해 오른쪽 담장을 끼고 돌아 언덕으로 올라갔다. 언덕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니 'ㅁ'자형인 집의 형태가 더욱 실감나게 다가온다. 집의 규모가 여간 큰 게 아니다. 김유정의 집안이 천석꾼이었다는 말이 전혀 허황된 말은 아닌 것이다.
김유정은 1908년 1월 11일, 이곳 강원도 춘천 실레마을에서 아버지 청풍 김씨 김춘식과 어머니 청풍 심씨 사이에서 2남6녀 중 일곱째로 태어났다. 그의 어릴 적 아명은 멱설이었다고 한다. 멱서리란 짚으로 날을 촘촘하게 걸어서 볏섬 크기로 엮어 만든 그릇을 말하는데, 그 멱서리 속에 곡식을 그득 담듯 재산을 많이 모으라는 뜻이었다.
멱설은 일곱 살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여의고 아홉 살 되던 해에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는 아픔을 겪게 되지만, 열두 살 되던 해 서울 재동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할 때까지 이곳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추측컨대, 이때가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 가장 행복한 시기가 아니었던가 싶다.
복원된 생가 옆에는 기와집 한 채가 있는데 이곳이 바로 김유정기념관이다. 땅의 여유를 두지않고 생가에 바싹 붙인 것도 문제려니와 생가를 압도할 만큼 훨씬 높은 기와집을 지은 것도 문제가 아닐 수 없다. 김유정 관련 자료는 여기에 집중적으로 전시돼 있다.
김유정의 손때가 묻은 유품은 현존하는 것이 드물다. 족보, 호적등초본, 학적부, 사진자료를 비롯 31편의 소설과 수필 서간문 등이 발표된 각종 문학지와 잡지의 영인본, 김유정이 참여해 활동했던 '구인회' 동인 및 그가 사랑했던 여인 판소리 명창 박록주에 관한 자료, 김유정을 테마로 한 작품, 김유정 연구 책 논문 등이 전시돼 있다.
생가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나서 본격적인 문학기행에 나섰다. 김유정 생가 앞 들 가운데로 난 큰길을 따라간다. 큰길이 끝나자 어느 새 길은 달팽이 속 같은 작은 골목길로 들어간다. 제일 먼저 도착한 곳은 작품 '솥'의 배경인 주막터가 있던 곳이었다.
소설 <솥>의 배경장소인 주막터
소설 <솥>에 나오는 들병이 계숙이와 근식이가 장래를 약속하던 곳이다. 또 이곳은 김유정이 자주 들러 코다리 찌개에다 막걸리를 마시던 곳이라고 한다. <솥>은 자전적 요소가 짙은 소설이다.
길가에 따로 떨어저서 호젔이 노힌 집이 술집이다. 산모롱이 옆에 서서 눈에 쌓이어 그흔적이 진가민가하나 달빛이 빛기어 갸름한 꼬리를 달고 있다. 서쪽으로 그림자에 묻지어 대문이 열렷고 그 곁으로 불이 번쩍대는 자게문이 하나가 있다.
소설 <솥>은 주막의 풍경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현재 남아있는 건물은 엣 주막이 아니다. 아끼던 솥을 짊어지고 들병이와 함께 마을을 떠나려던 근식이의 달뜬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른다.
소설 '봄봄'의 배경장소인 봉필영감의 집터
주막터를 지나 약간 경사진 오르막을 따라가면 소설' 봄봄'의 배경인 봉필영감의 집터가 나온다. 소설 속에 나오는 봉필영감은 욕필이라 통했던 이 마을에 살던 김종필이란 실존인물이라고 하며, 점순이 또한 가배라고 하던 김유정의 야학 제자라고 한다.
나도 저쪽 벽을 향하여 외면하면서 내 말로, "안된다는 걸 그럼 어떡헌담!"하니까, "쇰을 잡아채지 그냥 둬, 이 바보야!"
'봄봄' 중에서
| | | 작가 연보 | | | | 1908.1.11 김춘식과 청송 심씨 사이에서 일곱 째로 태어남
1915(7세) 어머니 돌아가심
1917(9세) 아버지 돌아가심. 이후 형 유근이 방탕한 생활로 재산탕진
1929(21세) 휘문고보 5학년 졸업. 명창 박록주에게 열렬히 구애하기 시작함. 치질 발병.
1930(22세) 연희(延禧)전문학교 문과 입학. 학교에 다닌 흔적은 없음. 춘천 실레 마을에서 야학당을 엶.
1932(24세) 농우회를 금병의숙(금병의숙)으로 개칭하여 간이학교로 인가받음. 소설 <심청> 탈고.
1933(25세) 서울로 올라가서 누이 유형에게 얹혀 지냄. 폐결핵 발병.소설 <산ㅅ골 나그내>, <총각과 맹꽁이>발표
1935(27세) 소설 <소낙비>(조선일보 신춘문예 형상모집 1등 당선), <노다지>(조선 중앙일보 신춘문예형상모집 가작 입선), <금따는 콩밧>, <떡>, <산골>, <만무방>, <봄 봄>, <안해>발표. 구인회(九人會)에 후기 동인으로 가입.
1936(28세) 폐결핵과 치질이 악화됨. <동백꽃>,<야앵>,<옥토끼>,<생의 반려>,<정조>,<슬픈이야기> 발표.
1937(29세) 신병이 더욱 악화되어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 상산곡리 다섯째누이 유흥의 집으로 거처를 옮김. 소설 <따라지>,<땡볕>,<연기>발표. 3.29. 세상을 떠남. 화장하여 그 재를 한강에 뿌림. | | | | |
점순이는 힌트는 주지만, '나'에게 행동의 가이드라인까지 제시해주진 않는다. 내가 장인의 바지가랑이 한가운데를 붙잡고 늘어졌을 때 점순이의 행동은 돌변하고 만다. '나'가 원체 순진한 바보이기도 하지만 그것은 또한 세상의 여자들이 주는 힌트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세상 남자들의 숙명적 비극이기도 하다.
그러기에 점순이가 준 힌트대로 장인의 바지 가랑이 '한가운데'를 붙잡고 늘어졌던 나는 "에그머니! 이 망할 게 아버지를 죽이네!"라는 점순이의 뜻밖의 외침 앞에 얼빠진 등신이 되고마는 것이다. 사랑은 아무나 하나? 힌트라도 제대로 이해할 줄 알아야지.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에도 여자의 변신 혹은 변덕은 무죄였을 것이다. 여자들은 본디 이 '표리부동 함'을 자신의 매력으로 내세우는 습성이 있다.
김유정은 한들 주막터에서 술 한잔을 걸치고 슬슬 백두고개를 넘어오다가 점순이와 혼례를 시켜주지 않는다며 장인과 '나'가 싸우는 장면을 목격하고 메모해두었다가 이 소설을 썼다고 한다.
일행은 다시 금병의숙을 향해 부지런히 걸음을 옮긴다.
미친 사랑의 노래...록주! 너를 사랑한다!
1929년, 휘문고보를 졸업하던 해에 김유정은 어머니를 닮은 한 여자를 만난다. 그가 바로 첫사랑인 판소리 명창 박록주였다.
김유정은 박록주에게 2년여 동안 광적인 구애를 했다. 그러나 박록주는 그의 애절한 마음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는다. 기생이자 서울 장안에서 가장 인기 있는 명창이었던 박록주가 네 살 연하의 젖비린내 나는 김유정의 마음을 받아줄 리 만무였던 것이다.
구인회 동인지 <시와 소설>속에 실렸던 소설 '두꺼비'에는 김유정과 박록주의 관계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 비친다.
......어디 사람이 동이 낫다구 거리에서 한번 흘낏 스쳐본, 그나마 잘 낫으면 이어니와, 쭈그렁 밤송이같은 기생에게 정신이 팔린 나도 나렷다. 그럿두 서루 눈이 맞아서 달떳다면야 누가 뭐래랴 마는 저쪽에선 나의 존재를 그리 대단히 너겨주지 않으려는데 나만 몸이 달아서 답장 못받는 엽서를 매일같이 석달동안 썼다....... -소설 '두꺼비' 중에서
그래도 김유정은 끊임없이 "벌거숭이 알몸으로 가시밭에 둥그러저 그님 한 번 보고지고"를 외쳤다.
민중 속으로...농촌계몽운동의 현장인 금병의숙
박록주와의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자, 실의에 빠진 김유정은 불현듯 고향인 춘천 실레마을로 돌아오게 된다. 그리고 학교가 없어 배우지 못하는 이곳의 청소년들에게 야학을 열어 한글을 가르치는 등 농촌계몽운동을 펼친다.
처음 움막에서 열었던 야학터가 불타자 그는 이곳에다 금병의숙을 짓는다. 그리고 거기서 일년 반 동안 문맹퇴치 운동을 벌였다. 금병의숙 옆에는 김유정이 심었다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한 그루 서 있다.
문학기행을 이끌었던 강원대 국어교육과 유인순 교수의 해설은 약간 다르다. 그가 어느 식물학자에게 이 느티나무의 수령에 대해 물었더니 수령이 약 150년 쯤 된 거라고 했단다. 그러니 실제 김유정이 심은 나무는 아닌 것 같다는 얘기다. 그래도 김유정의 농촌계몽운동을 현장에서 지켜보았던 유서깊은 나무다.
이제는 복개되어버린 개천을 따라 산길을 올라간다. 속으로 '강원도 아리랑'을 흥얼거리며 소설 '동백꽃'의 배경장소인 금병산 기슭을 향해 간다.
"아리 아리 쓰리 쓰리 아라리요. 아리 아리 얼씨구 노다 가세/ 아주까리 동백아 여지 마라/ 누구를 괴자고 머리에 기름"
소설 '동백꽃'의 동백꽃은 생강나무 꽃
강유정의 소설 '동백꽃'은 동백나무의 붉은 꽃이 아니라 생강나무의 노란 꽃이다. 소설 뿐 아니라 '강원도 아리랑'에 나오는 동백도 생강나무를 뜻한다. 소설에서는 세상에는 없는 노란 동백꽃이란 표현이 나오는데 김유정의 고향인 춘천에서는 생강나무를 두고 동백나무라 부른다.
생강나무는 꽃자루가 거의 없어서 꽃들이 작은 공처럼 생겨서 가지에 찰싹 달라붙어 핀다. 반면에 산수유는 꽃자루가 길고 꽃들이 위쪽으로 모여 핀다.
생강나무는 열매도 처음엔 붉게 익다가 차츰 검정색에 가깝게 변해가지만 산수유 열매는 약간 길쭉한 모양으로 조금 크며 빨간색으로 익는다.
답사를 이끌었던 강원대 유인순 교수에 따르면 옛날의 생강나무는 지금과 달리 영양이 좋지 않은 탓에 가지가 축 처져서 그늘을 만들기에 좋았다고 한다. 소설 속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라는 표현은 그래서 가능했던 것이다.
소설 '동백꽃'의 배경장소인 금병산 기슭
"요담부터 또 그래 봐라, 내 자꾸 못살게 굴 테니."
"그래 그래 이젠 안 그럴 테야!"
"닭 죽은 건 염려 마라, 내 안 이를 테니."
그리고 뭣에 떠다 밀렸는지 나의 어깨를 짚은 채 그대로 퍽 쓰러진다. 그 바람에 나의 몸뚱이도 겹쳐서 쓰러지며, 한창 피어 퍼드러진 노란 동백꽃 속으로 폭 파묻혀 버렸다. 알싸한, 그리고 향긋한 그 냄새에 나는 땅이 꺼지는 듯이 온 정신이 고만 아찔하였다.
소설 '동백꽃'중에서
점순이는 닭죽인 건 이르지 않겠다고 염려 말라고 한다. 그러나 모르긴 해도 이 약속은 어디까지나 '나'가 자신의 말을 잘 듣는 동안만 유효할 것이다. 언제든지 수 틀리면 이르지 않는다는 보장은 없다. 얼핏 보면 '나'를 안심시키는 듯이 보이지만 한 꺼풀만 뒤집어 놓고 보면 그건 협박이나 마찬가지다. 세상 살아가려면 여자의 변덕 뿐 아니라 여자의 협박도 무죄라는 걸 인정해 주어야 한다. 이것이 세상 남자들이 처해있는 두번째 숙명적 비극인 것이다.
김유정이라는 인간, 김유정 문학이 가진 힘
1935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낙비>가 당선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을 벌였던 김유정은 불과 4년여 동안에 30편의 단편소설을 남긴다. 김유정이 결핵과 치질이 합쳐진 결핵성 치질을 앓고 있던 것을 감안하면 참으로 초인적인 일이 아닐 수 없다.
김유정은 토속적 언어감각이나 독특한 해학성, '바보'를 잘 만들어내는 인물 창조의 능력 등이 탁월한 작가였다. 김유정은 우리에게 삶은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계몽주의적 태도가 아니라 삶이란 이런 것이다, 라는 공감을 자아내게 만든다.
프롤레타리아 문학에선 사회구조의 모순과 부조리를 고발하기 위해 농촌이 등장하고, 이광수와 심훈의 문학 속에선 농민은 계몽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김유정은 순수하게 농민을 바라봄으로써 독자 스스로 농민의 애환을 느끼게 만든 것이다.
무엇보다 김유정의 진정한 위대성은 비극을 비극 속에 함몰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비극을 희극화시킨다는 점일는지 모른다. 이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 오로지 자기와의 싸움에서 이긴 자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렇게 해서 김유정 소설의 배경에 대한 현장답사는 끝났다. 소설 <산골 나그네>에 나오는 한돌네 주막터나 물레방아, 소설 <만무방>에 나오는 노름터 등을 가보지 못한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그래도 김유정의 소설 속 배경을 이루는 몇 군데나마 둘러볼 수 있었다는 것은 커다란 기쁨이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이 답사 기행 동안 시종일관 찢어지게 가난했던 나의 10대, 그 감수성으로 바라보려고 애썼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김유정이 살았던 1930년대와의 간극을 조금이라도 메울 수 있는 방법이 아닐까 여겼기 때문이다.
김유정의 소설을 읽어가다 보면 능청과 해학 속에 그가 미처 삼키지 못한 울음이 남겨져 있음을 깨닫게 된다. 그 울음의 내용물을 이루는 것은 가난이다. 따라지들의 한숨이다.
한 시인은 "눈물이 나면 기차를 타고 선암사로 가라"고 권유한다. 그러나 나는 살다가 정말 눈물이 나거든 경춘선 기차를 타고 김유정역에 내리라고 권유하고 싶다. 이곳 실레마을에 와서 우리 선대들의 가난을 더듬어 보고, 따라지들의 한숨을 들어보면 사람들이 어떻게 자기 앞에 닥친 시련을 극복하고 긴 강물 같은 역사를 만들어 가는지를 알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