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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표지. 표지 위쪽 사진은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실 풍경이다. 오른쪽의 수염 긴 남자가 제임스 머리 편집장.
책 표지. 표지 위쪽 사진은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실 풍경이다. 오른쪽의 수염 긴 남자가 제임스 머리 편집장. ⓒ 박은봉
세계 역사를 돌이켜보면 한 사회나 국가가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반드시 거친 이정표 중 하나가 모국어의 가치를 깨닫고 그것을 정비하는 과정이었다. 모국어의 재발견, 혹은 모국어의 근대적 재탄생 과정이 그것이다.

중세 유럽 지식계층의 공용어였던 라틴어로부터 벗어나 과감하게 모국어인 영어로 작품을 쓴 영국의 셰익스피어, 라틴어로 된 성경을 모국어인 독일어로 번역한 종교개혁의 선구자 마르틴 루터는 그 과정에서 이름을 남긴 인물들이었다.

그러나 셰익스피어 시절만 해도 영어는 아직은 명실상부한 근대어가 아니었다. 그런 영어를 근대 영어로 탈바꿈시킨 것은 70년에 걸쳐 편찬된 <옥스퍼드 영어사전>이었다. 독자는 의아해할지 모른다. 영어는 알파벳이 생겨난 이후 수천 년 동안 발달해온 언어인데, 한 편의 사전으로 '재탄생'했다니 과연 타당한 얘기인가 하고 말이다.

그러나 사이먼 윈체스터의 <영어의 탄생 - 옥스퍼드 영어사전 만들기 70년의 역사>(원제: THE MEANING OF EVERYTHING)를 읽어보면 그렇게 말하는 이유를 알게 된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과정은 단지 하나의 사전을 완성하는 과정이 아니라, 영어가 그동안 어떻게 변해왔으며 어떻게 쓰이고 있는지 정리하고 체계화하는 과정이었다. 무려 70년에 걸친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 작업을 거치며 영어는 근대어로 태어났다. 그리고 오늘날 우리가 쓰고 있는 현대 영어의 뿌리가 거기에 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찬은 영어의 근대적 재탄생 과정

<교수와 광인>의 저자이기도 한 사이먼 윈체스터는 <영어의 탄생>에서 사전 편찬 과정에 대한 꼼꼼한 서술을 씨줄로 삼고, 인간의 일생과 맞먹는 70년이란 시간 동안 끈질기게 추진된 작업에 자신의 꿈과 열정을 바친 사람들의 이야기를 날줄로 삼아 한 편의 휴먼 드라마를 완성했다.

이 책에는 <교수와 광인>의 두 주인공인 편집장 제임스 머리와 자원봉사자 마이너 외에도 수많은 사람들의 다양한 숨은 이야기가 실려 있다. 그 이야기들은 당시 영국인들의 삶에 대한 충실한 풍속도이기도 하다. <교수와 광인>이 한 그루 나무라면, <영어의 탄생>은 숲 전체인 셈이다.

사전 편찬에 평생을 바친 3대 편집장 제임스 머리는 독학으로 언어학을 공부한 스코틀랜드 출신의 가난한 천재였다. 집안형편 때문에 14세에 학업을 그만두고 은행원, 교사로 일하며 틈틈이 언어학 논문을 쓰던 그는 우여곡절 끝에 사전편찬 편집장을 맡아 임무를 완수하고 그 공로로 옥스퍼드 명예 문학박사 학위에 기사 작위까지 받았지만, 빅토리아 시대의 완고한 영국 귀족 사회는 그를 끝까지 진심으로 수용하지 않았다. 세상을 떠나기 2년 전, '자신은 어디까지나 나그네였으며 결코 옥스퍼드 주류사회의 일원이 아니었다'고 그는 말했다.

사전 편찬에서 머리 편집장 다음으로 눈길을 끄는 존재는 수많은 자원봉사자들이다. 이들은 옛 문헌들을 뒤져 각 단어의 적절한 용례와 그것이 처음 쓰인 시기를 찾아냈다. 이들이 없었다면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결코 지금과 같은 내용을 갖출 수 없었을 것이다. 신분과 나이, 직업, 성별(당시 영국에서 여성의 사회적 지위를 고려할 때, 여성들의 사전 편찬 참여는 매우 파격적인 일이었다)의 가림 없이 참여한 자원봉사자들이야말로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명실상부하게 근대의 산물로 만들어준 장본인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옥스퍼드 영어사전>은 1857년에 제작 발의된 지 71년만인 1928년, 초판 10권으로 완간되었다. 총 1만5490 페이지에 41만4825개의 표제어, 182만7306개의 예문을 담았다.

식민지 조선이 낳은 <조선 말 큰 사전>

<영어의 탄생>을 읽으며 줄곧 떠오르는 것은 '그럼, 우리는? 우리에겐 왜 그런 국어사전이 없지?' 하는 생각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도 있다. 바로, 약 50년에 걸쳐 만든 <조선 말 큰 사전>이다. 흔히 <우리말 큰 사전>이라 부르는 최초의 근대 우리말 사전이다. 이 사전은 1911년 주시경의 <말모이>로부터 시작하여 조선어사전편찬회, 조선어학회를 거치며 해방 후인 1957년에 완간되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만들기 시작한 19세기 후반의 영국은 전 세계에 식민지를 거느리고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 맹위를 떨치던 제국주의 국가였다. 반면, <조선 말 큰 사전>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인들이 변변한 모국어 사전 하나 없는 현실을 안타까워하면서 모국어를 지키는 것이 곧 민족을 지키는 일이라는 절박한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다.

<옥스퍼드 영어사전>이 대영제국의 풍요와 여유가 낳은 작품이라면, <조선 말 큰 사전>은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관계자들이 대거 투옥당하는 등 일제의 감시와 자금난을 겪으며 난산 끝에 탄생한 것이었다.

그러나 <옥스퍼드 영어사전>과 마찬가지로 <조선 말 큰 사전> 편찬도 근대로 가는 길목에서 태어난 모국어의 근대적 재발견 과정이었다. 물론 <옥스퍼드 영어사전>을 만든 제국주의 영국과 <조선 말 큰 사전>을 만든 식민지 조선이 겪은 근대는 서로 무척 달랐지만 말이다.

<옥스퍼드 영어사전>과 <조선 말 큰 사전>은 근대라는 한 시기에 서로 다른 삶을 살았던 두 민족이 낳은 각고의 산물이다. 양자를 비교해 보면 언어와 민족, 국가 간의 관계, 그리고 언어와 언어생활의 주체인 사람 간의 관계를 새삼 깨닫게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박은봉 기자는 도서출판 '책과함께'에서 기획실장으로 일하고 있다.

<조선 말 큰 사전> 편찬의 역사는 도서출판 책과함께에서 <우리말의 탄생>이란 제목으로 곧 출간될 예정이다.


영어의 탄생 - 옥스퍼드 영어사전 만들기 70년의 역사

사이먼 윈체스터 지음, 이종인 옮김, 책과함께(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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