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제1차 세계대전은 무슨 의미일까? 사라예보 사건으로 시작해서 베르사유 조약으로 끝났다는 사실 정도가 일반인이 이해하는 제1차 세계대전의 전부다. 일본의 식민 지배로부터의 '해방'을 가져다 준 제2차 세계대전과는 달리 전쟁이 시작할 때에도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서도 일본의 압제에 있었던 우리 역사 때문인지 제1차 세계대전은 우리와는 무관한 전쟁이었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은 서양사에서 뚜렷한 하나의 분수령이었다. 수많은 것이 이별을 고하고 또 수많은 것이 새로이 탄생하는 장소가 전쟁이긴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이야말로 하나의 문턱이었다. 무엇이 사라졌을까? 여러 가지로 답할 수 있겠지만, 문화와 삶 전반에 퍼져 있던 낭만주의의 일소가 아닐까.
다다를 비롯한 아방가르드가 출현한 것도 이즈음이요 전후 기능주의, 신즉물주의 등이 등장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신화적, 낭만적 분위기의 절멸이 있었다. 1920년대의 하이 모더니즘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우리에게 낯선 제1차 세계대전을 어떤 시각에서 조명해야 할까. 앞서 말했듯이 연표의 나열과 정치적 역학관계, 장군들의 무훈과 작전 등 통상의 전쟁사 서술 방식으로는 이 낯섦이 극복될 수 없다. 독자들과 제1차 세계대전의 유일한 고리는 20~30대 여성이라면 누구나 한 벌은 가지고 있는 '트렌치코트'다.
신문의 패션 섹션에서는 늦가을 낭만은 역시 트렌치코트에 있다고 연일 야단이다. 담담한 듯 차갑고, 낭만적이면서도 이지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데 제격이니 말이다. 그러나 다행일까 아쉬움일까. 많은 사람들은 이 코트의 정확한 유래를 모른다. '트렌치코트'는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영국군이 참호에서 비를 피하기 위해 입던 야전 코트를 말한다. '트렌치'라는 단어는 '참호'라는 뜻이다.
모순적이게도 낭만주의를 없애버린 전쟁에서 낭만의 신화가 생겨났던 것이다. 저자는 이 전쟁을 유럽의 정치적 관계나 전술의 관점에서 다루지 않고 수천 킬로미터의 참호 속에서 1460일을 버텨내야 했던 병사들의 눈에서 바라보고 있다. 그들에게 참호에서 보낸 4년이란 인간이 처할 수 있는 가장 비참한 삶, 하지만 지속되어야 할 삶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참호에서 보낸 1460일>은 국내에 처음 소개되는 제1차 세계대전 관련 서적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삶과 문화가 어떻게 변화했는지를 포괄적으로 소개하는 책은 아니다. 사려 깊은 독자라면 기존의 가치와 삶의 양태가 어떻게 참호라는 진흙더미 속에 파묻히게 되었는가를 어렵지 않게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수많은 통계와 보고서, 편지들과 문학작품까지 섭렵한 작가는 이 사상 최악의 전쟁을 '병사들의 일상사'라는 측면으로 재해석하고 있다. 따라서 책 속에는 거의 1세기 전 종군기자들의 노력으로 남겨진 보기 드문 실제 사진들과 참호의 모습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이를 통해 당시의 사람들이 얼마나 낭만적으로 전쟁을 상상하고 미화했는지, 동시에 전쟁을 처음 경험하는 근대의 병사들과 시민들이 얼마나 안이한 상태에서 격전을 치렀는지를 생생하게 보고 느낄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우리에게 낯선 제1차 세계대전에 대한 귀한 자료이자 증언이 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정희경 기자는 도서출판 마티에서 [참호에서 보낸 1460일]을 편집한 편집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