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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대 후반에 <남부군>이라는 책이 유행한 적이 있다. 남한 내 빨치산의 활동을 기록한 책으로, 당시에는 금기시되던 얘기여서 터부를 깨고 싶었던 젊은 사람들에게는 상당히 구미가 당기는 얘기였던 모양이다.

이 책은 후에 영화로도 만들어졌는데, 안성기 최민수 최진실 등 쟁쟁한 배우들이 출연한 탓에 그 연기 대결도 볼 만했던 기억이 난다. 이 책은 당시 엄혹했던 시절 빨치산들이 어떻게 활동했는지를 아주 실감나게 그려놔서, 그들에 대해 알지 못했던 많은 것을 알게 해줬다.

그 책 내용 중 한 가지 기억에 남는 것은, 좀 엉뚱하게 들릴는지 모르겠지만 여성 빨치산들은 생리를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 이유는 빨치산 활동이라는 것이 어디 정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었단다. 정주할 수 없으니 아이를 기를 수 없고, 기를 수 없으니 차라리 낳지 않는 것이 좋을 거라고 여성의 몸이 스스로 결정을 내리는 탓이란다.

한 마디로 아이를 낳아서 제대로 기를 조건이 되지 않으면, 자연(이 경우에는 여성의 몸)이 스스로 출산을 거부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출산율 1.08명'의 소식을 들으며 생리를 하지 않는 여성 빨치산을 떠올렸다면 나만의 '오버'인가.

출산율이 낮은 것은 우리를 둘러싼 조건 또는 환경 때문이라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초등학교 입학 전부터 시작하는 영어교육을 비롯한 살인적인 입시경쟁에 부모와 아이가 함께 시달려야 한다. 학교를 무사히 마쳤다고 해도 인생이 '장미꽃 핀 탄탄대로'는 아니다.

청년실업을 겪어야 할지도 모르고, 직장을 잡았다 해도 비정규직이 될 수도 있다. 다행스럽게 정규직이 됐다 해도 재수 없으면 40대, 운이 좋으면 50대에 직장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불행들을 모두 피해 나갔다면 이번에는 열심히 일한 대가로 과로사나 과로로 인한 성인병을 만날 수도 있다.

사정이 이러니 "나는 불행한 사람"이라는 푸념이 넘쳐날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 속에서 누구인들 아이를 낳고 싶겠는가.

그런데 한 가지 석연치 않은 점이 있다. 우리의 조건이 그렇게 열악한가? 우리나라는 현재 세계 10위권의 경제규모를 자랑한다. 세계 자동차 10대 메이커를 두 개나 갖고 있고, 국가별 자동차 생산량은 세계 9위에 올라 있다. 반도체와 LCD 생산량도 세계에서 손가락 안에 꼽히고, 지구 위 바다를 떠다니는 배 중 절반은 우리가 만든 것이다. 핸드폰은 또 어떤가. 세계 경제성장의 엔진이라고 불리는 중국에서 '명품'으로 통한다.

이런 성과에 힘입어 1인당 GDP는 2만 달러를 향해 가고 있다. 여기에다 '인터넷 제국'을 거론하는 것은 진부하기까지 하다. 한마디로 아이를 키우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물적 조건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아이 키우기 어렵다는 아우성 속에 부모들이 아이 낳기를 거부하고 있는 것이다. 마치 지리산을 누볐던 빨치산처럼 말이다.

그럼 왜 이런 모순된 결과가 나타나는 것일까. 빨치산이 그들을 둘러싼 당시의 험악한 자연환경 때문에 아이 낳는 것을 포기해야 했다면, 오늘날 우리는 그에 못지않은 험악한 경쟁사회 때문에 아이 낳기를 포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극악스런 경쟁사회에 아이를 태어나게 하는 것은 죄악이란 말을 하는 사람이 있을 정도로 우리 사회는 심각한 경쟁 문화에 물들어 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한 가지 우리를 난감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그 살인적 경쟁이 우리를 오늘날 경제대국으로 성장하게 한 원동력이었다는 점이다. 경제성장과, '아이를 키우기에 부적절한 환경'은 결국 '이란성 쌍둥이'인 셈이다.

여기에 우리를 더욱 당황하게 하는 것은, 사실 그 상황은 우리 스스로 불러들였다는 점이다. 경쟁이 너무 심해서 아이 키우기 어렵다고 푸념하면서도 우리 아이가 그 경쟁에서 밀리는 꼴은 눈뜨고는 못 보겠다는 게 우리 부모들이다. 마치 부동산 거품을 걱정하면서 내 집값 떨어지는 것을 동시에 걱정하는 모순된 태도를 보이는 것과 같이 말이다. 경쟁을 멈추게 하도록 노력하기보다는 그 경쟁을 이용해서 승자가 되기를 우리 자신에게 강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출산율을 높이기 위해 보조금을 주는 등의 대증요법은 화로점설(火爐點雪), 이글거리는 불꽃 위의 한 점 눈과 같을 뿐이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좀 더 본질적인 처방이 있어야 한다. 그 본질은 바로 '문화축적'을 통한 '삶의 질' 향상에 있다. 고르바초프 식대로 표현하자면 '인간의 얼굴을 한 경쟁'을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이런 소리가 한가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정부가 보조금 준다고 아이를 더 낳을 것인가 하는 것을 자기 자신에게 물어보면 안다. 보조금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경쟁이 목적이 될 수 없는 것처럼, 경제성장도 목적이 될 수 없다.

경제성장은 인간다운 삶을 위한 수단일 뿐이라는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그걸 통해 정신적으로 성숙하고, 그러한 성숙을 통해 문화를 축적할 때만이 삶의 질이 향상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출산율 문제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다.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은 보조금 때문이 아니다. 이 사회가 아이를 삼킬까 두렵기 때문이다. 빨치산이 한겨울의 매서운 눈발이 무서워 생리를 멈춘 것처럼 말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독립미디어 <바인스(www.byins.com)>에서 송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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