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 공간에도 사랑은 있었다.
역사는 사실(fact)들의 기록인가? 아니면 허구(fiction)로 치장된 조작된 사실들의 조합인가? 역사는 '단지' 진실의 기록일까? 아니면 문학적 상상력을 동원한 수사학적 혹은 문학적 기록물에 불과한 것일까?
역사(History)를 둘러싸고 벌어지는 역사 해석적 논쟁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요즘 주말이면 관심 있는 독자들에게 재미와 감동을 안겨주는 한 프로그램을 두고 하는 말이다. KBS에서 방영하는 <서울 1945>라는 드라마가 그것이다.
거기엔 보수주의자들이 일컫는 바, 자유 민주주의의 적대세력으로 응당 발본색원되어야 할 '빨갱이'들이 아닌 '정통 공산주의자'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고, 독립군을 잡아 족치던 조선 순사 무리들이 나오고, 나라 팔아 자작의 직위를 얻어 잘 먹고 잘 살던 친일파도 나오고, 조국의 해방을 걱정하던 민족주의자들도 함께 어울려 등장한다.
이 생생한 역사 현장 자체가 우리가 살아나가며 겪을 수밖에 없는 인생의 단면으로, 하나의 정겨운 '굿판'이 아니고 무엇이란 말인가?
거기에는 당시 해방 공간에서 벌어지는 안타까운 여러 정황들이 사실과 결부된 '허구'란 드라마 형식으로 생생하게 그려지고 있다. 정말 흥미롭고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재미있다. 드라마가 '감동과 재미'를 주지 못한다면 그 본래의 구실과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리라.
드라마 <서울 1945>에는 다양한 정치이념과 사상들이 여러 분파적 정치 집단에 휩싸인 채, 숙성되지 않은 거친 들판에서 정제되지 않은 사상적 논쟁을 벌이고 있다. 권력을 취하려는 자, 민족의 분단을 걱정하는 자, 그 와중에 외세에 등을 업고 자신의 안위와 정치적 야심을 채우려고 친일분자와 어울려 춤추는 자들이 역사의 무대 전면에 등장하고 있다.
해방 공간인 1945년은 친일을 지나 여세추이(與世推移 : 세상의 변화에 따라 함께 변함)하면서 친미주의자로 변신하려는 시도가 이 땅에서 처음으로 이뤄지기 시작하던 무렵이다. 이런 정치적 상황 속에서 온갖 부류의 인간 군상이 어우러져 있다. 이념에 의한 갈등과 정치적 분파가 갈리기 시작하면서 본격적으로 우리 역사는 분단되기 시작한다. 오늘 우리의 민족적 불행의 싹이 바로 이 지점에서 잉태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사랑과 이별, 우정과 배신, 그리고 처절한 인간적 고뇌가 없었다면, 치열하게 살아야만 하는 역사적 삶의 현장은 무미건조한 사건 기록물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다양한 인간 군상들의 삶의 파노라마가 '사실적' 역사보다 더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이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시학>에서 '시가 역사보다 더 철학적'이라고 했을 것이다.
그들은 왜 '좌편향적 역사 왜곡'이라 주장하는가?
드라마에 등장하는 이승만 대통령과 장택상씨 가족들은 이 드라마에 대해서 '사실의 왜곡'이라며 불만이 많은 모양이다. 몇몇 보수 언론은 '대한민국 건국 주역들을 헐뜯고 해방전후사를 좌편향 시각으로 왜곡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드라마만 봐선 이승만 대통령은 친일파를 감싸며 권력 장악에 몰두한 정략가로 비춰지고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잘못된 나라라는 인상을 받을 수밖에 없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다.
역사적으로나 사실적으로 밝혀지지 않은 여운형 암살 사건을 지시한 인물로 그려지고 있음으로 해서 역사에 대한 왜곡을 저지르고 있다고 그들은 주장한다. 그래서 그 유족들이 나서서 보수적 입장을 취하는 '자유시민연대' 등과 함께 <서울 1945> 방송 중단과 KBS 시청거부운동을 펼치겠다고 발 벗고 나설 참이란다.
역사가는 플롯을 짜 가는 드라마 작가이다
그럼 과연 일어났던 사실에 기초한 플롯을 가진 '드라마'는 역사적 진실을 고스란히 드러내야만 하는 것일까? 역사는 진실과 사실만을 후세에 전해주는 것일까? 아무리 한 역사가가 있는 사실을 고스란히 수집하고 그것을 객관적으로 기술할 수 있는 학적 재능이 뛰어나다고 해도, 있는 사실을 조각조각 단편적으로 묶어서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결합해 놓을 수는 없을 것이다.
만일 그렇게 하는 작업이 진정한 '역사'라고 한다면, 그 역사는 얼마나 시시한 역사이고, 재미없는 플롯을 구성해 놓은 저급한 '역사 작가'의 작품이란 말인가? 역사가는 어떤 의미에서 홀로 플롯을 짜 가는 드라마 작가인 독단주의자인지도 모른다. 여기에 역사가의 상상력과 문학적 능력이 절실히 요청된다.
이 지점에서 역사가의 사실을 보는 '사관'이라는 중요한 측면이 개입하고, 역사 해석이라는 더 중요한 물음이 제기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역사가 단순히 감성의 역사가 아니라고 한다면, 적어도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주는 역사가의 해석으로 다가와야 역사는 역사로서의 그 진정성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역사가와 역사소설은 어떻게 다른가? 역사가는 사실을 다루지만, 역사 소설가는 사실에 '허구'를 끼어 넣어 독자에게 재미와 흥미를 더해 준다. 드라마에 사실적 수법을 도입해서 액자 식으로 다큐멘터리와 같은 수법을 사용하면 그 전달하고자 하는 의도가 더 증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이 아닌 것을 사실인 것으로 믿게 할 수조차 있을 것이다.
정작 문제가 되는 것은 '진실과 드라마의 본질인 허구성' 사이의 갈등과 간격
역사는 과학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꾸밈없는 진실'만을 기술한다는 과학주의적 입장과 진실과 더불어 아름다움을 추구한다는 수사학적 주장은 늘 대립되어 왔다.
일찍이 그리스의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역사의 진실을 주장했다. 그 근거는 자신이 직접 참전했고, 그래서 사건을 목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목격자의 전문을 엄밀히 취급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진실의 판단의 몫을 당대의 청중이 아니라, 미래의 독자에게 남겨놓았다. 이게 바로 카(E. H. Carr)가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강조하는 '미래와의 대화'이다.
투키디데스의 역사가는 '일어난 그대로를 말하는 것'이라는 주장은 독일의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인 랑케에게서도 그 울림은 그대로 계속된다. 일어난 개별적 일들을 질서 있게 배열하고, 거기에 아름다운을 주고, 매력적인 표현으로 수식하고 흥미와 재미를 주는 것은 역사가의 일이 아니라 상상력을 동원하는 역사 소설가의 일인지도 모른다.
국가주의라는 시대적 환경이 조성되고 그 의식이 팽배할 때, 역사의 과학주의가 득세했다. 국가주의가 약화된 포스트모던 시대의 해체주의적 입장은 역사가 사실 내지는 진실의 기록이 아니라 수사적인 문학적 설득력을 목표로 하는 것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이에 대해 강단의 역사학자들은 과거의 실재와 진실을 위태롭게 만드는 해체주의에 맞서 다시금 진실을 옹호하는 입장으로 돌아서고 있다.
그때 '1945년 서울'엔 무슨 일이 있었나?
'1945년 서울의 해방공간'에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그 속에서 일어난 하나하나의 개별적 사실들이 엄정하게 밝혀진 바는 없다. 다만 정설이라고 알려진 추정과 진실의 근사치에 가까이 접근해 있는 정황과 사실들만이 우리의 기억 속에 살아남아 있을 뿐이다.
어디까지 진실이고, 어디까지 수사학적 허구가 맞추어져 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어제의 사실들이 달빛에 씻기고 햇빛에 바래게 되면 '신화'가 된다. 신화는 논리적 형식보다 그 '풍부한 내용'이 더 우리의 관심을 끌고 흥미를 유발한다.
그것을 바라보면서 어떤 판단을 해 나가는 후세의 사람들은 그 속에서 즐거워하고, 흥미로운 그 역사적 사실들에서 미학적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런 측면에서 '역사는 진실과 수사적 아름다움을 추구하는 서술'간의 경계에서 줄타기하는 것인 지도 모른다.
<서울 1945>를 문제 삼는 사람들은 '역사라는 드라마'가 얼마나 허구적이면서도 사실적인지를 간과하는 우(愚)를 범하고 있는 셈이다. 독자에게서 그 드라마적 재미를 강탈해 갈 권리가 그들에겐 없다. 그 사건들의 역사적 해석은 시대와 역사적 환경에 따라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다.
이 긴장 속에서 인생의 아이러니를 느끼고 즐길 줄 아는 사람만이 역사를 읽고 즐길 줄 아는 자격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우리에게서 이 역사 드라마에서만 느낄 수 있는 사랑과 흥미, 그리고 그 아름다움을 빼앗아가지 말기를 바란다.
그래서 역사는 사실(fact)과 허구(fiction)가 결합된 'faction'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