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5년 어느 여름날, 옥천의 우리 가게에서 나를 포함해 다섯 사람이 우연찮게 한 자리에 어울렸다. 오며가며 늘 들리던 사람들이지만 그렇게 한 자리에 모여 담론을 나누는 것은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 중에는 오랫동안 함께 교육관련 시민운동을 해왔던 사람과 어린 시절부터 4H운동을 시작으로 농업경영인까지 농촌활동에 30년 가까이 몸담고 있는 사람, 여의도통신 대표도 끼어 있었다.
그 날의 주제는 '개정 공직자선거법'에 대한 성토였다. 그 중에서도 특별히, 기초의회의원의 정당공천과 비례대표선출에 대한 이야기가 주를 이뤘다. 당연히 선거법이 개악이라는 이야기를 나눴고, 지방자치의 후퇴, 시대를 역행하는 중앙집권적 사고와 권력, 거대 정당들의 야욕 등에 대해서도 성토했다.
그리고 그 성토의 결론은 '이대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다'였다. 굳이 거창하게 시민운동이랄 것은 없지만 오랫동안 지역의 크고작은 사안에 대해 말과 행동을 보여 왔던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런 결론은 당연한 것이기도 했다. 이대로 지방선거와 지역의 자치를 중앙집권세력에 맡길 수는 없다는 얘기였다.
그날 새벽, 풀뿌리옥천당이 잉태됐다
그 뒤로 풀뿌리자치를 위한 우리들의 담론은 급물살을 탔다. 풀뿌리자치운동, 건강한 시민운동세력의 결집, 정치개혁운동, 선거법개정운동, 풀뿌리주민후보, 지방선거에서의 성패에 대한 전망·역할 등등.
우리들의 얘기는 자정을 넘어 새벽이 가까워질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풀뿌리옥천당이 태동되고 있는 것이었다.
'풀뿌리옥천당'은 처음엔 가칭이었다. 정식으로 조직되고 출범한 것은 아니기 때문에, 향후 함께 할 구성원들의 의견을 모아야 하기 때문에, 무엇보다 그 때 민주주의적 절차를 제대로 밟아야 할 것이기 때문에, 임시로 사용할 가칭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풀뿌리옥천당'은 곧바로 공식명칭으로 굳어져버렸다. 5인의 담론 이후 인터넷을 통한 홍보와 당원 모집 등의 활동을 시작하자 이 이름은 예상을 훨씬 넘어 대단한 폭발력을 보였고, 우리들의 뜻과 의지를 정확하고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평가를 받았다.
9월 하순 공식적인 첫모임과 창립(당)준비모임을 갖기도 전에 <경향신문>에 우리에 관한 기사가 나갔고, 곧바로 <한겨레신문>에도 실렸으며 첫 모임 이후 TV와 라디오 등 지방방송국의 문의와 인터뷰 요청이 줄을 이었다. 그들 언론들의 태도는 마치 오래 전부터 우리같은 '풀뿌리 OO당'의 출현을 기다려왔던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꼴통들이 친 사고, 결과는 참패
그런 관심은 지역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언론들이 보여준 호의적 관심과는 또 다른 각양각색의 반응이긴 하지만, 옥천 어디에 가나 '풀뿌리옥천당'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꼴통들이 모여 또 사고친다" "쟤들 이번 선거에 나오려고 일꾸미고 있는 거다"란 이야기에서부터 "너희가 맞다, 옳은 일 하는 거다" "함께 하고 싶지만 당을 버릴 수가 없다" "지켜보겠다, 찻잔 속의 태풍에 그칠 거다" 등등.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는 끝이 없었다.
그렇게 풀뿌리옥천당은 가속적으로 진행되었다.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전국에 걸쳐 우리와 같은 고민을 하고 있었던 각 지역의 건강한 생각들을 만날 수 있었고, 그들과 함께 지난 2005년 11월 풀뿌리정치포럼을 개최하기도 했다. 이후 올 3월에는 초록정당을 꿈꾸는 사람들과 함께 '풀뿌리초록정치네트워크' 전국대회를 옥천에서 열기도 했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기존의 정당을 거부하고 오직 '풀뿌리 시민(주민)후보'로서 지방선거에 나서는 전국 각지의 기초·광역의회 예비후보자들도 참석했는데, 그들은 참으로 신선했고 건강했다. 치열한 시민정신과 정치의식들을 가지고 있었다. 각각의 지역에서 치열하게 풀뿌리운동을 하고 있는 그들과 함께 생각을 나누면서 우리는 진정한 시민사회의 희망을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난 지방선거에서 우리는 모두 참패했다. 당락이라는 결과면에서 우리 풀뿌리세력은 21명의 후보 가운데 겨우 2명만이 당선되고 나머지 19명이 낙선했을 만큼 완벽하게 참패하고 만 것이다.
거대정당들의 다툼 사이에서 풀뿌리자치정신과 건강한 시민세력은 애꿎은 '새우'였으며, 지방자치는 더 이상 가치도, 이슈도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로 재빠르게 그 고래등에 올라탄 후보들은 그렇게 '입신'에 성공했다. 거대정당들의 음모와 계산이 그렇게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우리 풀뿌리옥천당은 결코 실패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지난 선거를 통해 우리 옥천에도 변화와 개혁을 원하는 세력이 적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며, 풀뿌리옥천당에 동의하고 우리의 뜻과 진정성을 믿어주는 주민들이 생각보다 훨씬 많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는 정치인이 아니다, 그러나 당을 고집한다
우리는 지금 선거법인지 정당법인지의 위반으로 고발되어 있다. 선거기간 중부터 경찰에 몇 차례 소환조사를 받고, 얼마 전에는 검찰조사까지 받은 상태다.
경찰조사에서는 고발 주체가 정당인이라는데 검찰에서는 선관위 고발이란다. 또 처음엔 '유사명칭사용'이라는 정당법문제라고 했다가 지금은 '사전선거운동'이라는 선거법 문제란다.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어느 경우든 문제의 핵심은 우리의 이름인 '풀뿌리옥천당'에 있다. 정당이 아니면서 'OO당'이라는 유사명칭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그 이름으로 홍보책자를 발간하고 배포했다는 것이 혐의의 핵심이다.
우리는, 하려고만 한다면 '당'을 쓰면서도 현행 정당법을 피해갈 수 있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선관위에서도 알려준 바다. 그러나 그것은 정당하지 못한 일이었다. 우리의 애초의 뜻에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잡음을 줄이고 마찰을 피하자고 우리의 정체성을 훼손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우리가 '풀뿌리옥천당'이라는 이름을 고집하고, 그 이름으로 선거에 뛰어든 이유는 명백하다.
지역정치가 중앙정치판의 하부구조로 굳어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지역주민이 중심이 아닌 지방자치는 허울뿐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지금, 우리가 사는 이 곳'이 중심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당'은 거대정당들에 대한 반동이며, 모든 중앙집권적 요소들과 서울 중심적 사고들에 대한 혁명이기 때문인 것이었다.
우리는 정치인이 아니다. 우리 중에 기초의회의원후보로 나섰던 사람도 있지만 우리는 우리가 직접 정치를 하거나 기성정당의 흉내를 내려고 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는 집권을 목적으로 하는 정치집단이 아닌 것이다.
우리의 목적은 정치개혁운동이고, 풀뿌리민주주의·풀뿌리주민정신의 회복이다. 지역정당의 설립이나 시민운동의 정치세력화 같은 것은 부차적이며, 그것들은 발전 가능한 여러 갈래 중의 하나일 뿐인 것이다.
해서, 우리는 여기서 머물지 않고, 지난 선거와 우리의 활동에 대한 치열한 반성과 모색을 통해 우리의 풀뿌리주민운동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건강한 모든 풀뿌리정신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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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서형석 기자는 풀뿌리옥천당 대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