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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류정순 한국빈곤문제연구소 소장(spernpd1@chol.com)이 참여연대 월간지 <참여사회> 8월호에 기고한 글입니다.(www.peoplepower21.org) 참여연대측의 양해를 구해 전문 소게합니다. <편집자주>
ⓒ 최인숙
전기와 수도가 없는 집에서 사는 것을 상상해 본 적이 있는가? 불이 들어오지 않고 물이 나오지 않는 집은 더 이상 집이 아니다. 전기가 끊기면 단지 빛 공급만 끊기는 것이 아니다. 컴퓨터를 켤 수 없어서 학생들이 숙제를 해갈 수가 없기 때문에 교육기본권이 침해된다.

전동휠체어 충전이 불가능하기 때문에 장애인들의 이동권이 침해받는다. 물리치료기나 산소호흡기를 달고 살아야 하는 환자들은 생존권마저 위협받게 된다. 단전지경까지 이른 가구는 경제능력이 보금자리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악화되어 있다.

어른들은 노숙자로 길거리에 나앉고, 아이들은 고아원이나 위탁 시설로 보내지는 경우가 많다. 가족해체 직전의 벼랑 끝에 선 단전가구에 대한 특별한 관심과 대책이 필요하다.

소전류 제한기는 체납요금 재촉 수단

최근 단전가구가 폭증하고 있다. 2002년 48만 6606가구이던 단전경험가구는 2003년 63만 4127가구로 한 해 동안 무려 30% 이상 증가했다. 2004년 한 해 전 국민의 3.5%에 이르는 156만 명이 단전을 경험했다(조승수 전의원, 2005).

우리 사회가 헌법과 국민기초생활보장법에 명시된 최저생계를 제대로 보장했다면 단전까지 이른 극심한 빈곤층은 없어졌을 것이다. 기초생활보장제도가 미치지 못 하는 사각지대가 존재하는데, 단전대상가구가 대표적이다. 단전위기가구는 빈곤이 발견되는 중요지점으로서 복지사가 달려가서 상담을 하고 필요한 생계지원을 해야 마땅하다.

그러나 실정은 단전반원이 단전 혹은 제한공급 조치를 하기 위해 방문할 뿐 어느 누구도 들여다보지 않는다. 함께하는 시민행동은 지난해 8월 국가인권위원회에 단전단수 조치는 생존권 침해이자 채권자로서의 정당한 권한 행사 범위를 벗어난 부당행위라고 진정했으나 아직 국가인권위원회, 정부와 한전은 아무런 대답이 없다.

지난해 2월 장애인이 단전된 집에서 촛불을 켜놓고 잠자다 사망한 데 이어 같은 이유로 한 여중생이 화마에 목숨을 잃은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건들을 계기로 단전의 비정함이 큰 사회문제로 대두되자 한전은 형광등 두 개와 14인치 TV 등을 겨우 켤 수 있는 110kWh의 전기만을 공급하는 제도를 내어 놓았다.

한전이 진정으로 최저생계 수준의 삶을 보장하고자 한다면 보건복지부가 정한 최저생계비 수준의 가전제품을 모두 사용할 수 있는 전력량이 공급되어야 마땅하다. 한국빈곤문제연구소의 연구결과 최저생계 보장을 위해서는 최소한 280kWh는 공급되어야 하는데도 한전은 전력량을 증가시킬 의사가 없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단전이 되더라도 110kWh의 최소 전력을 사용할 수 있는 장치인 소전류 제한기를 부착한 상태에서 생활하기는 대단히 불편하기 때문에 2005년 전체 소전류 제한기 부착가구의 61.6%가 부착 일주일 이내에 체납요금을 내고 소전류 제한기를 철거했다. 이 사실은 소전류 제한기의 부착이 외상값을 독촉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필자가 한전 관계자를 만나 단지 '단전사고'를 막을 정도의 적은 전력량 공급의 비정함에 대해 항의하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전기세라는 표현을 쓰지 마십시오. 전기는 세금이 아니라 요금입니다. 상품을 썼으면 당연히 그 값을 지불해야지요. 한전은 자선사업기관이 아닙니다."


체납가구 요금지원책 모색해야

▲ 전기요금(주택용 전력) 계산법.
ⓒ 한국전력공사 홈페이지
물론 한전은 자선기관이 아니다. 빈곤 가정의 전기공급 문제를 전부 한전의 '사회적 공헌'에 의존할 수는 없다. 그리고 주로 한전직원들의 후원으로 구성된 아름다운 재단의 '물 한방울 빛 한 줄기' 기금으로 지난해 단전대상 95가구에게 약 7000만 원이 지원되었다.

이것은 한전이 이 문제에 대해 완전히 나 몰라라 하진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토록 미미한 지원으로 생존권 보장에 제대로 기여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한전이 진정으로 가난한 소비자에 대한 생존권 보장에 나설 의지가 있다면 전력산업기반기금으로 장기체납가구의 요금을 보조해 주어야 할 것이다.

전기사업법 제48조에 따르면 전력산업기반기금은 정부나 한전이 출연한 것이 아니라 소비자가 내는 전기요금의 4.591%로 조성된 것이다. 전력산업기반기금은 2004년 1조 6372억 원인데, 그 중에서 2004년 미집행 여유자금은 7975억 원이다. 정부와 한전이 이 돈의 10%인 800억 원만 단전위기 저소득층 지원금으로 사용한다면 빈곤 장기체납가구 전부에게 전력을 무상공급하고도 남는다.

프랑스는 사회적으로 기금을 마련하여 체납가구의 요금을 대납해주는 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미국 또한 연방정부가 조성하고 주정부가 관리하는 기금을 통하여 장기체납 저소득층의 전기요금을 지원하고 있다. 한국도 이러한 사회연대기금의 조성을 통해 전기, 수도, 가스, 연탄, 전화, 인터넷 등의 에너지 필수품을 지원해야 할 것이다.

복지상담원 파견과 단전 허가제 도입 필요

예전에는 달동네에 빈민들이 모여 살았으나 재개발로 달동네가 해체됨에 따라 빈민들은 중산층 지역에 점점이 박혀 살아가고 있다. 누가 극한적인 빈곤상황에 처해 있는지 찾아내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이러한 상황에서 전기요금 장기체납가구는 빈곤이 발견되는 중요한 지점이다.

전기요금 체납가구는 전기뿐만 아니라 다른 생필품 구매능력 또한 부족하다. 또한 가족해체 위기가구이기 때문에 복지상담을 통한 지원책 모색이 절실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재는 단전반원 이외의 그 어떤 사람도 도움을 주지 않고 있다.

호주는 단전반원이 방문하기 전 미리 복지상담원의 방문과 상담을 거쳐 가능한 지원책을 모색한 후, 복지사의 허가를 받아 단전 혹은 소전류제한기를 부착할 수 있도록 하는 사전허가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빈곤층 보호 위한 에너지 복지지원법 제정 시급

에너지정책 및 에너지 관련 계획의 수립 시행에 관한 기본적인 사항을 정한 에너지기본법은 가난한 사람들의 에너지 기본권 실현에 적절한 기여를 하지 못하고 있다.

단지 제4조(국가 등의 책무)에 "국가, 지방자치단체 및 에너지공급자는 빈곤층 등 모든 국민에 대한 에너지의 보편적 공급에 기여하여야 한다"는 추상적이고 선언적인 문구가 있을 뿐, 구체적이고 실효성 있는 조항이 없다.

전력산업기반기금의 활용, 사회연대기금의 설립, 복지상담원 파견과 사전허가제도 도입 등을 가능케 하는 에너지 복지지원법이 하루빨리 제정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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