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교토조형예술대학의 새로운 시비
교토조형예술대학의 새로운 시비 ⓒ 홍이표
일본 제국주의가 그 마지막 기세를 떨치던 어두운 시절, 당시 일본 교토의 도시샤(同志社)대학에 다니던 청년 시인 윤동주가 차디찬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싸늘하게 죽어간 사실은 참으로 안타까운 민족의 아픔으로 남아있다.

다행히 그의 유고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가 그의 친구(정병욱 교수)의 정성으로 마루 밑에 숨겨져 있다가 이후 출간되지 않았다면, 이 아름다운 민족시인 윤동주의 이름 석자는 세월 속에 그냥 묻혀 잊혀졌을 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 그의 시 가운데서도 특별히 '서시(序詩)'가 한국인들의 가장 큰 사랑을 받게 되었고, 그가 다녔던 모교, 연세대와 일본의 도시샤(同志社) 대학 캠퍼스 내에 시비로 각인돼 영원히 그 이름을 기억하고 있음은 참으로 뜻 깊은 일이다.

게다가 최근에는 윤동주가 마지막까지 살던 아파트가 있던 자리(현 교토조형예술대)에도 그의 시비가 세워진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한국일보>, 6월 27일자). 최근 나는 처가집이 있는 고베를 방문하기 위해 준비하던 중, 그 소식을 접하고 얼마나 기뻐했는지 모른다.

하지만 매우 유감스럽게도 도시샤 대학에 이미 세워졌고, 이번에 또 다시 세워진 시비에는 터무니없는 오역이 연속해서 새겨졌음을 발견하니 그 기쁨은 순식간에 식어버렸다. 결과적으로 일본에 세워진 두 개의 시비는 윤동주와 그의 시를 오히려 왜곡하는 결과를 빚고 만 것이 아닌가 싶다.

그 문제의 주인공은 1984년 윤동주의 번역 시집을 출간한 이부키 고(伊吹 郷)씨이다. 그가 번역한 윤동주의 '서시'는 현재 일본 고교 국어교과서인 <신편 현대문>에 실린 시인 이바라기 노리코의 에세이 '윤동주'에 전문 번역본이 인용돼 있다.

또한 윤동주가 다닌 도시샤 대학과 최근의 교토조형예술대학에도 그 시가 새겨져 있으며, 최근 소설가 공지영씨와 일본인 작가 츠지 히토나리가 함께 쓴 한일소설 <사랑 후에 오는 것들>에도 그의 번역이 원용되었음을 확인했다. 이부키씨의 윤동주 시 번역은 지금 거의 다 일본어역의 정본처럼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序詩

死ぬ日まで空を仰ぎ
一点の恥辱なきことを、
葉あいにそよぐ風にも
わたしは心痛んだ。
星をうたう心で
生きとし生けるものをいとおしまねば
そしてわたしに?えられた道を
歩みゆ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吹き晒らされる。
(이부키 고, 伊吹郷 訳) 


이부키씨의 '서시' 번역... 의도적으로 윤색된 오역

1996년 2월 도시샤 대학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지기 직전 일본 기독교 출판사에서는 <天と風と星と詩>라는 윤동주 시집과 평전을 출간했다. 이부키씨가 번역한 시집의 제목은 <空と風と星と詩>라고 되어 있다.
1996년 2월 도시샤 대학에 윤동주 시비가 세워지기 직전 일본 기독교 출판사에서는 <天と風と星と詩>라는 윤동주 시집과 평전을 출간했다. 이부키씨가 번역한 시집의 제목은 <空と風と星と詩>라고 되어 있다. ⓒ 일본 기독교 출판국
하지만 이부키씨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주의 신념이 깊게 배어있는 윤동주 시의 양 축을 근본적으로 이해하지 못하였고, 심지어는 왜곡하기까지 하였다.

'서시'의 첫 줄부터 살펴보자.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에서 윤동주 시인은 물리적 개념의 하늘(Sky)을 막연히 바라봤던 것이 아니다. 거기서 '하늘'은 그의 맘 속에 뿌리내린 깊은 신앙의 고향을 의미한다.

이부키씨가 이것을 '소라(空)'라고 번역했으니 마땅히 일본의 기독교회가 공통적으로 쓰고 있는 주기도문의 하늘, '덴(天)'으로 표현해야 한다. 또한 영어의 경우에도 '스카이(Sky)'가 아닌 '헤븐(Heaven)'이 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우리 한글에서는 '하늘'에다 '님'을 붙여 '하늘님' 혹은 '하느님'으로 자연스럽게 사용해 왔다.

그렇듯 우리 말 '하늘'은 그 자체로서 깊은 종교성을 함축하고 있지만, 일본어의 경우, '소라(空)'에 님(사마, 樣)을 붙이면 '소라사마(空樣)'인데 그런 말은 없어서 매우 어색해진다. 따라서 일본 교회에서는 주기도문을 외울 때 소라(空) 대신 "'하늘(天)'에 계시는"으로 시작하는 것이다.

윤동주는 어떤 사람인가? 한국의 갈릴리 땅 같았던 만주 용정에 나고 자란 그는 기독교 신앙과 민족의식이 조화된 풍토 속에서 성장했다. 윤동주의 생가에 가면 직접 구운 기왓장 하나에도 십자가와 석삼자(삼위일체), 그리고 태극문양을 함께 새겨 넣었다.

기독교 신앙과 민족사랑은 그의 뿌리였으며 그 중심에는 공허한 하늘이 아닌 신앙으로서의 하늘이 있었다. 따라서 그의 시에는 '소라(空)' 대신 '덴(天)'을 써야 하는 것이다.

두 번째 오역은 더욱 치명적이다.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시인의 다짐을 "한 점 치욕(恥辱)이 없기를"이라고 옮긴 것이다. 여기서 윤동주 시의 신앙적, 민족적 지조와 양심을 완전히 훼손하고 있다.

이국(異國) 혹은, 이민족(異民族)으로 인해 어떤 환난이 닥쳐오더라도 결코 하나님과 민족의 양심 앞에서 부끄러운 삶을 살지 않겠다는 이 다짐이, 마치 압제자들에게 모욕을 당하는 일이 안 생기게 해달라고 빌기라도 하듯이 번역한 것이다.

이로써 윤동주 시인의 서시는 일신의 안전을 도모하고, 무사안일을 소망하는 구차한 시처럼 바뀌고 말았다. 만약 시인이 그러한 옹졸한 자세로 살았다면, 27세의 젊은 나이로 옥사한 그의 마지막 삶의 행적은 쉽게 설명되지 못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윤동주 시인은 "모든 죽어가는 것(すべての死にゆくもの)을 사랑해야지"라며 읊고 있다. 그는 점점 더 가혹해지는 민족과 세계민중의 기막힌 수난을 자신의 실존적인 아픔으로 승화시켰던 것이다.

여기서 그는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겠다고 다짐하고 있다. 하지만 이 대목도 이부키씨의 번역에는 문제가 많다. 그는 이 구절을 '모든 살아 있는 것(生きとし生けるもの)을 사랑해야지' 라며 거의 정반대의 의미를 지닌 문장으로 바꾸어 버렸다.

일본의 대표적인 조선문학연구자 오무라 마스오 와세다대 교수도 '서시'의 이부키 번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고 한다.

"윤동주가 서시를 쓴 당시 일본 군국주의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죽어갔고, 조선인의 말과 민족 옷, 생활풍습, 이름 등 민족문화의 모든 것이 '죽어가는' 시대였다. 이렇게 '죽어가는 것'을 '사랑해야지'라고 외친 그는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을 당연히 심히 증오했을 것이다. 이부키의 번역은 죽음으로 몰아넣은 자들도 똑같이 사랑한다는 말이 돼버리지 않을까?"(<한겨레신문> 6월 16일자)


또 연세대의 정현기 교수는 "'죽어가는 사람'과 '살아있는 사람'의 의미 차이는 근본적으로 다르다"면서 그 표현을 의도적으로 구겨놓은 일본인 문인의 숨겨진 의도가 너무 천해 보인다고 말하기도 했다.

역사학자들은 제3자에 의해 윤색된 1차 사료(일기, 편지 등)는 신뢰하지 않으며 연구에 가급적 사용하지도 않는다. 그렇듯 의도적으로 윤색된 오역은 외면 받는 역사 사료와 그 무엇이 다를까?

윤동주의 장례식 광경 일제의 고문에 의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윤동주 시인의 장례식 광경(1945년 3월 6일 용정 자택)
윤동주의 장례식 광경 일제의 고문에 의해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29세의 젊은 나이에 순국한 윤동주 시인의 장례식 광경(1945년 3월 6일 용정 자택) ⓒ 독립기념관
'서시'의 잘못된 번역... 오해와 대립만 심화시켜

최근 재일교포학자 서경식(도쿄경제대학) 교수는 "꺼림칙한 과거를 되돌아보고 싶지 않은 한 일본인 문학가의 개인적 정서로 인해 윤동주의 시도 가능한 한 일본을 향한 고발로서가 아니라 매우 일반적인 '실존적 사랑의 표백(표출)'으로 읽고 싶어 하는 것이다. 번역이라는 행위가 타자간의 상호이해를 증진하기는커녕 오히려 오해와 대립을 심화시키는 결과로 이어지는 실례가 바로 이부키의 번역에 있다"(<한겨레신문> 7월 14일자 '모어'라는 감옥)고 지적한 바 있다

그의 말처럼 새롭게 세워진 윤동주 시비 위의 이부키 역 '서시'들 또한 계속해서 오해의 또 다른 실타래로 이어져 갈까봐 걱정하게 된다.

이 문제의 한가운데는 윤동주의 '저항시인으로서의 면모'와 '보편적이면서도 실존적인 사랑'이라는 두 시각이 충돌하고 있는 듯하다. 하지만 윤동주의 서시는 이미 기독교 신앙이라는 보편적 가치와 민족에 대한 애환이라는 특수한 가치가 동시에 내재되어 융합된 역설적 결과물이다.

따라서 어느 한 쪽만 강조할 수도, 누락시킬 수도 없는 문제이다. 중요한 것은 윤동주 시의 원문이 왜곡됐는지의 여부인데, 심각한 오역이 일본에서 정본으로 자리 잡고 있다는 현실은 문제를 더욱 심각하게 만들고 만 것이다.

그렇듯 윤동주의 시를 바로 옮겨 쓰기 위해서는 그의 시 세계의 두 가지 체험과 가치를 깊이 이해해야 한다. 즉 식민지 수난의 민족 일원으로서의 실존적인 고통 체험과 거기에 저항할 수 있도록 힘을 제공하고 결단할 수 있게 뒷받침해주었던 기독교 신앙의 체험이다.

물론 윤동주의 기독교 신앙이 원수까지도 사랑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이라며 그 폭을 확대시키고 싶은 마음도 생길 수 있겠으나, 한 일본인 문인의 옹졸한 의도는 시인 윤동주의 신앙과 정신세계를 적잖이 왜곡시키고, 교묘한 은폐의 의도로 얼룩진 윤동주의 '서시'를 일본인들에게 전파하고 말았다.

윤동주 시인의 마지막 생애 흔적

1942년 6월 3일, 일본 도쿄에서, 마지막 작품 '쉽게 씌여진 시'를 씀
19942년 7월, 간도 용정 고향집을 마지막으로 방문.
1942년 10월 1일, 교토로 옮겨 도시샤 대학 영문과로 편입.
1943년 7월, 일경에 의해 체포됨.
1945년 2월 16일, 의문의 주사를 맞던 중, 옥사함.
1946년 7월, <경향신문>에 유작 <쉽게 씌여진 시>가 발표.
이번에 시비가 새롭게 세워진 곳은 시인의 도시샤 대학 유학시절 자취방이었던 다케다(武田) 아파트가 있던 곳으로, 창작의 열정을 꽃피웠던 마지막 처소였다. 시인은 이곳에서 한글로 시를 썼다는 이유로 치안유지법 위반의 굴레가 씌워져 1943년 10월 일본 경찰에 체포되었고, 1945년 2월 알 수 없는 이유로 후쿠오카 교도소에서 옥사했다.

당시 함께 체포돼 역시 옥사한 시인의 고종 사촌 송몽규를 면회한 사람들은 두 사람이 매일 정체불명의 주사를 맞았다고 증언한 것으로 밝힌 바 있어 일제의 악랄한 생체실험 희생자라는 설도 있다.

그가 마지막 삶을 살았던 일본 교토의 한 변두리에 그를 기념하는 시비가 또다시 세워진다는 것은 정말 반갑고 기쁜 일이다. 그래서 나도 일본에 도착하자마자 잰걸음으로 그곳을 향했다. 하지만 시비를 지켜보던 중, "윤동주가 점점 상업화 되어가는 것 같다"며 무심코 내뱉은 아내 미나꼬의 한 마디는 내 마음을 강하게 두드렸다.

윤동주는 어느새 교토지역의 관광자원으로 인식되고, 도시샤, 교토조형예술대학 등의 학교 홍보용 소재가 된 듯한 느낌이다. 최근에는 인근 리츠메이칸 대학의 교수도 새로운 시비 건립 계획을 발표해 그 흐름에 편승하고 있다.

이러한 움직임 가운데는 윤동주 시인의 삶과 신앙, 그리고 그의 시에 대한 깊은 고민과 성찰이 전제되었다 기 보다는 무조건 시비만 세우고 보자는 식의 성급한 도구적 논리가 앞선 것 같다.

이미 1995년, 구라타 마사히코, 한석희 선생 등, 일본 기독교 문인들이 뜻을 모아 <天と風と星と詩>라는 시집을 새롭게 펴내어 이부키씨의 시집 <空と風と星と詩>에 반박한 바 있다.

위에서 언급한 오역들이 모두 고쳐져 새롭게 세상에 나온 것이 벌써 10년 전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부키씨의 번역이 새 시비 위에 버젓이 새겨져 있는 모습을 보며 참으로 씁쓸한 기분을 느껴야 했다.

序詩

死ぬ日まで天を仰ぎ
一点の恥もないことを
葉群れにそよぐ風にも
私は心を痛めた。
星をうたう心で
すべての死んでいくものを愛さねば
そして私に?えられた道を
歩んでいかねば。

今宵も星が風にこすられる。
(일본 기독교 출판국. 日本キリスト敎出版局)


나는 교토 변두리에 세워진 새로운 시비 앞에서, 60여 년 전 조국의 하늘을 그리워했을 윤동주 시인을 생각해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쉽게 세워진 시비 위에 그의 마지막 유작 <쉽게 씌여진 시(詩)>가 새겨졌어야 한다는 깊은 아쉬움을 지금까지도 떨치지 못하고 있다.

쉽게 씌어진 詩

창밖에 밤비가 속살거려
육첩방(六疊房)은 남의 나라,

시인이란 슬픈 천명(天命)인 줄 알면서도
한 줄 시를 적어 볼까.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간다.

생각해 보면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 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沈澱)하는 것일까?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육첩방은 남의 나라
창 밖에 밤비가 속살거리는데,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곰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慰安)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握手).

1942년 6월 3일.

댓글
이 기사의 좋은기사 원고료 4,000
응원글보기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