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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숙씨는 2006년 제2회 검정고시에 합격하셨습니다."
가슴이 콩닥콩닥 뛰었습니다. 교육청 홈페이지 합격자 확인란에 주민등록번호를 입력하고 난 뒤 깊은 숨을 한 번 몰아쉬고서야 확인란을 누를 수 있었습니다. 가채점을 해봤기 때문에 이미 점수는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 답안지에 수험번호를 잘못 작성하진 않았는지, OMR 답안지를 밀려 쓴 건 아닌지 하는 염려가 남아있었기 때문입니다.
확인란을 누르자 "합격하셨습니다"라는 빨간색 글씨가 제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제야 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쉴 수 있었습니다. 여유가 생겨서일까요. 과목별 점수까지 상세하게 나와 있는 표를 보면서 '조금만 더 열심히 했으면 더 좋은 점수를 받았을 수도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남더군요.
28일은 바로 지난번에 봤던 검정고시합격자를 발표한 날입니다. 가채점 점수가 합격선보다 높게 나와 합격할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음에도(검정고시는 절대평가로, 기준점 이상 점수를 획득하면 합격입니다), 합격 사실을 최종 확인하는 순간까지 떨리던 마음은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이번 검정고시에 8558명(고입 1996명, 고졸 6562명)이 지원했으며, 그 중 고입자격의 경우 50%에 조금 못 미치는 875명이 합격했고 고졸학력 자격시험에서 2730명이 합격했다는 자료를 봤습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 저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걸 다시 한 번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코피 터지고 불 낼 뻔하고 자정에 김치 담그고...
우리 나이로 마흔한살이 된 올해, 대입검정고시를 보기로 결심하고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 마음을 다잡은 순간이 참 많았습니다. 공부하는 건 어렵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열악한 주위환경이 제 의지를 수없이 꺾곤 했습니다. 아무도 도와주지 않는 집안일, 돈을 벌어야 한다는 생각 등 순간순간 넘어야 할 산이 많았습니다.
성격이 판이하게 다른 남편과 말다툼을 벌이고 학교에 간 날은 종일 마음이 무겁고 아무것도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아 깊은 자괴감에 빠지기도 했습니다. 그럴 때마다 마음속으로 수없이 '반드시 이겨 내겠다'고 오기 섞인 다짐을 했습니다.
그렇게 참아오길 잘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이젠 고졸이라는 학력을 인생의 이력서에 턱하니 올려놓을 수 있게 됐으니까요.
공부를 많이 한 사람들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아닐 보잘 것 없는 증명서겠지만, 학력 때문에 많은 눈물을 흘린 제게는 참으로 소중한 자격증입니다. 2006년을 정말 잊을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지난 석 달 동안 돈도 벌고, 집안일도 하며, 공부도 해야 했기에 무척 바쁜 날들을 보냈습니다. 어느 날엔 가스레인지 위에 냄비를 올려놓고 졸다가 불을 낼 뻔했고, 피로가 몰려와 여러 번 코피가 터지기도 했습니다. 공부한다는 핑계로 집안 일을 소홀히 할 수 없어 밤 열두 시가 다 된 시간에 김치를 담그기도 했습니다.
좋지 않은 생각들은 공부에 몰두하면서 잊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지난해 종합건강검진에서 발견된 장간막 근종 때문에 두어 달 정도 심각한 고민에 빠진 적이 있습니다. 결국 가족들의 반대로 수술을 하지 못하고 그대로 두었지만, 몸 안에 혹이 있다는 사실을 공부하는 동안엔 잊어버릴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공부하다 보면 종종 그 사실을 잊습니다.
나를 보며 공부 시작한 언니
무엇보다도 기쁜 건 저보다 세 살이 많은 둘째 언니도 저 때문에 공부를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누구보다도 제 마음을 잘 아는 언니가 1주일 전 제게 조언을 구하더군요. "나도 공부해 볼까? 너 하는 거 보니까 나도 하고 싶다. 그런데 할 수 있을지 모르겠어." "언니, 아무 걱정 말고 시작해. 언니는 하고도 남아." 저는 진심으로 언니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어렸을 적 언니는 저보다 공부를 잘했습니다. 언니는 전교에서 늘 상위권이었고, 동네 사람들에게서 공부 잘한다고 수없이 칭찬받았습니다. 그러나 저와 마찬가지로 집안 사정 때문에 공부를 계속할 수 없게 된 언니가 1주일 동안 방문을 걸어 잠그고 울었던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엄마, 나 고등학교 보내줘. 장학금 받아서 다닐 테니까 보내만 줘."
그렇게 애원하던 언니를 보며 캄캄한 부엌에서 엄마는 말없이 눈물을 훔쳤습니다. 그토록 공부하고 싶어 하던 자식들을 학교에 보내지 못하고 공장으로 내쫓아야만 했던 엄마의 심정은 그때 아마 갈기갈기 찢어졌을 것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제가 공부하는 것을 누구보다도 기뻐하신 분은 엄마였습니다.
며칠 전 엄마가 제게 전화해, 대학교 갈 때 제게 보내 주실 거라며 마늘 판 돈을 몽땅 저금통장에 넣어두셨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전 가슴이 씀벅씀벅 저려왔습니다.
언니는 며칠 전 주부학교에 입학원서를 접수했습니다. 어제는 교과서를 받아왔답니다. "야야, 나는 수학책을 보니 앞이 캄캄하다. 이걸 어떻게 해?" 걱정하는 언니에게 자신 있게 말했습니다. "언니는 나보다 더 잘할 수 있을 거야."
평소에 공부하는 걸 좋아해서 한시도 손에서 책을 놓지 않고 영어, 일어, 한의학 공부까지 하고 있는 언니도 고등학교 교과서를 보니 가슴이 설레기도 하고 두렵기도 한 모양이었습니다.
한의학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싶다는 언니도 내년이면 아마 저처럼 웃을 수 있겠지요. 제가 공부했던 책들이 언니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저는 공부했던 자료들을 소중하게 상자에 담아두었습니다.
연필이 다 닳도록 쓰고 또 썼던 연습장을 다시 한 번 살펴보니 웃음이 나옵니다. 어디서부터 해야 할지 몰라, 공부할 내용을 죄다 펼쳐놓고 한숨 쉬던 일도 이젠 지난일입니다.
정말 외우기 힘들어 부엌 벽에 붙여놨던 영어숙어들을 오늘에야 떼어냈습니다. 영어선생님이 내 준 숙어를 다 외워버렸다는 말에, 같이 공부하던 언니들이 저를 '괴물'이라고 불렀던 것도 생각납니다. 그러나 영어시험에 숙어가 단 한 문제밖에 나와서 허탈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이제 생각하니 우습기도 합니다.
지금보다 더 열심히 공부해야 할 시간이 제게 다시 올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때가 되면 "아, 공부 정말 지겨워"하는 행복한 고민을 할 수 있을까요? 그저 지금은 희망사항일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