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무현 대통령이 제기한 원 포인트 개헌논란이 조만간 다시 수면 위로 부상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다. 2007년이 시작되자마자 대통령이 제안한 대선-총선 일치를 위한 원 포인트 개헌안은 정부 측의 준비가 끝나는 대로 3월 국회에 제출될 예정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시점에서 왜 대한민국의 권력구조가 대통령제이어야 하고, 왜 대선과 총선이 일치되어야 하는지, 왜 분점정부(divided government, 좁은 의미로 여소야대)가 나쁜 것인지 분명한 이유가 제시되어야 함에도 '뜬 구름 잡는 식'의 두루뭉수리한 개헌 논의들만 제기되고 있다. 시기의 적정성, 정치적 음모 등의 정치적 공세만 있을 뿐 본질에 대한 질문은 많지 않다.
민주주의의 핵심원리는 견제와 균형이다. 미국 헌법의 기초자들은 처음부터 너무 많은 권력이 한 개인이나 한 기관에 집중되는 것을 경계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인 제임스 매디슨(James Madison)은 "야심은 야심과 대결하도록 만들어져야 한다"(Ambition must be made to counteract ambition)고 주장하며 상호 독립적이면서도 상호 견제할 수 있는 권력분립의 정체(政體)를 설계했다(Federal List Paper, No.51). 즉 열정(passion)은 열정에 대항하고 하나의 열정이 다른 열정과 균형을 이룰 수 있다는 말이다.
'권력은 독점적'이라는 인간의 본성을 역으로 이용한 것으로서, 권력을 독점하려는 인간의 본성과 그로 인한 폐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권력을 두 개, 세 개 분리하여 쪼개놓았던 것이다. 행정-입법-사법의 3권분립이 그렇고, 미국의 상하원 구성 및 서로 다른 임기(하원 2년, 상원 6년, 대통령 4년)가 다수의 전제(tyranny of the majority)를 막기 위해 고안된 정치제도였던 것이다.
서로 다른 미국 상하원 임기, 견제 위해 고안된 제도
원 포인트 개헌의 문제는 총선과 대선의 일치가 다수당의 일방적 독주를 견제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견제장치를 제거한다는 데에 있다. 2007년 대선과 2008년 총선 사이의 기간은 불과 5개월. 17대 대통령선거 결과 당선된 사람의 소속당 국회의원 후보들이 18대 총선에서 대거 당선될 것이라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왜냐하면 당선된 17대 대통령의 취임은 2월. 대통령과 정권의 실정(失政)을 평가받기에 2개월이라는 시간은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결국 대선과 총선을 일치시키거나 가깝게 만들면 대통령과 국회 다수당은 같은 정당이 장악할 가능성이 크다.
그렇다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다. 총선과 대선이 일치되면 과연 정치가 보다 발전하고 국민의 뜻에 충실히 따르는 그리고 보다 효율적인 정치가 이루어질까? 한 정당이 장악한 국회․여당이 과연 살아있는 권력인 대통령을 민주적으로 견제하면서 충실한 의정활동을 할 수 있을까? 그 해답으로 시기적으로 가까운 사례는 노무현 대통령과 열린우리당에 있다.
작년 40%가 넘는 지지율의 한나라당은 5·31 지방선거에서 광역·기초 단체장과 의회 의원 후보 대다수를 당선시켰다. 특히 전 인구의 절반 이상이 살고 있는 서울시와 경기도의 광역단체장과 광역의회의 경우 거의 모든 의석을 한나라당이 석권했다. 만약 현재 50%가 넘은 지지율을 바탕으로 금년 대선에서 한나라당 후보가 당선된다면 몇 개월 차이 안 나는 내년 총선에서 한나라당이 압승할 것이라는 것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대통령-국회-지자체 단체장·의회 모두 한나라당에 속하게 된다.
후보자 검증 소홀히 다뤄질 수도
이것은 단순히 한나라당의 집권과 싹쓸이를 우려하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견제받지 않는 정치세력, 총선-대선 일치 때 우려되는 한 가지 사례일 뿐이다. 그러나 대한민국의 정치권력을 한 정당이 가지고 있다면 민주주의의 핵심원리인 '견제와 균형' 원리가 제대로 작동할 없다는 것은 문제이다. 브레이크 없는 기관차처럼 폭주를 해도 국민은 정권을 견제할 수 없다. 중앙의 예산과 입법권이 없는 지방선거는 중간선거가 될 수 없다. 그래서 총선-대선 일치 및 동일 임기제가 자칫 다수의 전제(tyranny of the majority)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우려된다.
또 하나 짚고 넣어가고 싶은 것은 국회의원 후보자의 자질에 대한 검증이다. 한국의 권력구조는 국민의 투표로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각각 선출하는 이원적(二元的) 대표체계이다. 국회의원 각자가 지역구의 유권자로부터 선출된 정치적 대표성을 가진 헌법기관이라는 점에서, 그리고 대통령 선거와는 별도로 국회의 권능을 위해라도 국회의원 후보의 자질과 능력, 도덕성에 대한 개별적 검증이 필요하다. 그러나 2004년 4월의 17대 총선은 노무현 대통령 탄핵역풍으로 반탄핵·반한나라당이라는 거대담론 때문에 국회의원 후보자에 대한 검증·평가가 다소 등한시 된 측면이 있다. 즉 17대 총선은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재신임투표, 대통령 재투표의 측면이 있었다.
이런 측면에서 봤을 때, 대통령의 개헌안과 같이 총선과 대선이 일치될 경우 대통령 후보 및 소속 정당에 대한 선호도, 정권교체 및 대선공약이라는 거대담론 속에서 국회의원 후보자의 인물에 대한 검증이 소홀히 다루어진다면, 우리는 다시 속칭 ‘탄돌이’라는 말을 다시 들을지도 모른다. 그렇게 될 경우 헌법으로 규정된 이원적 대표체계의 한 축인 국회가 부실해질 수 있는 만큼 이에 대한 문제도 우리가 다시 한 번 생각해 봐야 할 것이다.
정말 선거가 낭비적인가
그리고 과연 선거가 낭비적인가 하는 문제도 다시 한 번 고려할 필요가 있다. 현대민주주의는 대의제로서 국민의 선거를 통해 정통성을 확인받고, 정치적 대표성을 획득한다. 선거는 국민의 의사를 묻고 확인하는 민주주의의 중요한 장치인 것이다. 이러한 선거를 낭비적으로 보고 정치적 대표성이 다른 대통령과 국회의원을 하나의 선거로 묶는 것은 선거를 통한 견제를 스스로 거부하는 것이다.
단순히 통치의 효율성만을 강조한다면 민주주의를 해야 할 근본적 이유가 사라진다. 국민은 선거를 통해 근대적 의미의 시민일 수 있지만, 선거가 없다면 신민(臣民)과 다를 바 없다. 국민은 선거의 참여를 통해 정치를 견제하고, 참여를 통해 민주주의에 대한 충성심을 높일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원 포인트 개헌론은 여야간, 청와대와 국회 간 갈등의 원인을 권력구조와 헌법이라는 제도로 환원시킬 우려가 있다. 하지만 한국정치에서 정치적 갈등의 주된 원인은 막강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을 누가, 어느 정당이 차지하느냐를 놓고 벌이는 사활을 건 정치쟁투로 인해 발생하는 것, 즉 정당정치에 문제가 있는 것이지 단순히 대통령과 국회의원의 임기가 같지 않아 생기는 문제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총선과 대선이 일치되고 임기가 같아진다면 대통령 권력을 둘러싼 정치적 갈등은 더욱 심화될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통령 한 사람만 '잘' 당선시키면 그 '후광'과 '바람'으로 원내 과반수 의석의 거대여당으로 의석을 확보할 수 있는 강력한 매력이 있기 때문이다. 결국 대통령 자리를 놓고 정파간 '무한도전'과 정부·여당에 대한 야당들의 치열한 투쟁도 예상된다.
중요한 것은 21세기 대한민국에 걸맞은 사회·경제·정치의 구조가 만들어져야 하는 것이다. 사회양극화 심화, 비정규직 문제, 남북 및 동북아 평화정착 등 다양한 한국사회의 이슈가 같이 논의되고 종합적으로 검토되어야 제대로 된 헌법이 만들어질 수 있다. 어느 하나만 따로 떼어서 그것만 바꾼다고 우리의 정치가 좋아지고 민생이 나아지지 않는다. 자칫 원 포인트 개헌논의가 한국사회의 중요한 민생이슈를 압도하여 정치적으로 대표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앞선다.
노무현 대통령은 재신임투표, 대연정에 이어 원 포인트 개헌이라는 이슈를 전격적으로 제기했다. 전격적이었다는 점에서 그 전에 국민 공감대 형성과 정계·학계의 논의는 적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어김없이 양자택일의 선택을 국민에게 강요하고 있다. 왜 대통령제이어야 하는지, 왜 여소야대가 나쁘고 총선과 대선이 일치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명확한 근거도 불분명하고, 국민적 이해와 공감대도 적다. 대통령의 원활한 국정운영과 여야간 교착상태의 감소라는 정치의 효율성만 강조되고 있다.
그러나 정치는 '가능성의 예술'이다. 정치적 상상력과 타협을 통해 안 되는 것도 되게 만들 수 있는 정치적 가능성의 공간은 열려있다. 권력구조 변경의 개헌보다는 '지금보다 나은 삶'의 비전을 제시하는 전략과 대안으로 가능성의 공간을 채워주길 청와대와 국회에 당부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