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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지갑이다>
<나는 지갑이다> ⓒ 랜덤하우스
미야베 미유키가 선택한 물체는 '지갑'이었다. <나는 지갑이다>에 나오는 화자는 지갑이다. 살인사건에 관련된 10명의 지갑들이 각자 출연하여 자신을 소유한 주인들에 대한 이야기를 펼쳐간다.

지갑은 자신의 몸에 채워지는 지폐의 두께를 통해 주인의 재정상태를 짐작하며 주인이 다른 사람과 나누는 말소리를 통해서 사건의 추이를 짐작해본다. 지갑이 밖으로 노출되어 있을 때에는 다른 이들의 모습도 볼 수 있다. 어떤 지갑은 상냥하고 마음씨가 따뜻하고 어떤 지갑은 예리하고 명석하다. 소심하고 겁 많은 지갑도 있다.

화자가 '지갑'이기 때문에 소설은 기본적으로 시각의 제한을 갖는다. 다른 사람과 대화할 수 없기 때문에 대화의 발전을 이루어갈 수도 없다. 그렇지만 듣는 것에 민감하고, 주인의 심장부근에 붙어있기 때문에 주인의 기분이나 건강상태를 민감하게 파악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소설은 음향이 살아있는 공포영화처럼 특정감각이 극명하게 살아있는 느낌을 준다.

형사의 지갑, 범인의 지갑, 목격자의 지갑이 하는 이야기들을 쭉 따라가다 보면 이때까지 읽었던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보다 약간 껄끄럽다는 느낌이 조금씩 온다. 지갑이라는 사물화자에게 생명력을 불어넣어 묘사하게 한 것은 기발한 설정이었지만 지갑이 갑자기 주인이 되어 직접적인 심리묘사를 한다거나 보이지 않는데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등, 원래 지갑에 설정했던 능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설정도 간혹 보여서 일관성이 떨어진다는 느낌을 준다. 마지막에 나오는 3개의 지갑 이야기에는 작가의 대표적 장편인 <모방범>에 나왔던 인물들의 미니어처처럼 보이는 캐릭터들이 대거로 출현해서 의아한 느낌을 자아낸다.

이 작품의 출간 시기가 1992년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이 의문은 모두 풀린다. 지갑의 눈으로 바라본 살인사건. 10개의 단편소설이 모여 전체적인 이야기를 맞추어나가는 이 기발한 연작소설은 미야베 미유키가 데뷔한 지 얼마 안 되었던 1992년에 써낸 초기작품이다.

때문에 이 작품을 읽다보면 현재 일본 최고의 추리작가라 불리는 미야베 미유키의 앳된 모습을 만날 수 있다. 미야베 미유키를 아직 한 번도 접해본 적이 없는 독자라면 이 작품을 시작으로 연대별로 하나씩 읽어나가면서 작가의 발전을 지켜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미야베 미유키의 작품을 이미 많이 읽어본 독자라면 작가의 어린 시절을 따라가 보는 느낌으로 책을 펼쳐도 좋겠다. 미야베 미유키 최고의 걸작이라고 불리는 <모방범>이 애초에 작가의 머릿속에서 어떤 모습으로 잉태되고 있었는지를 엿볼 수 있 있다.

미야베 미유키의 최신작을 기대하는 독자나 조금 더 세련된 모습의 미야베 미유키를 원하는 독자들은 피해가시길. 그러나 사람의 마음을 타고 헤엄치는 듯한 출렁거림은 이 시절의 작가에서도 충분히 나타나고 있다. 인물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 내부를 탐험하는 듯한 미야베 특유의 출렁거림. 그 반짝이는 출렁거림.

...합성피혁으로 된 지갑, 하지만 자기가 진짜 가죽인 줄 알고 있는 지갑, 자신의 진짜 가격표를 무시하려는 지갑처럼. 가즈야 또한 자기가 부모님이 알고 있는 것만큼 뛰어나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게 아닐까? 그리고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갔다면, 자기가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이며, 결코 걸출하지는 않지만 거기에도 의미가 있고, 가치가 있고, 즐거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았다. 가즈야는 자신의 가격표를 외면하고, 그걸 찢어버린 것이다...

나는 지갑이다

미야베 미유키 지음, 권일영 옮김, 랜덤하우스코리아(2007)


#미야베 미유키#나는 지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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