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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 붕괴 뒤에도 계속해서 태평양에 주둔하고 있는 막강한 군사력을 정당화할 수 있는 구실을 찾던 미국 군부는 탈냉전 이후부터 자신의 역할을 소련함대를 저지하는 것에서 제3세계 국가, 특히 아시아 국가들의 급성장으로 인한 군사적 위협을 봉쇄하는 것으로 전환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미군의 입장에서 본다면 북한의 핵위협은 ‘복음’ 그 자체였으며 김정일은 가장 바람직한 적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북한의 영변 핵재처리시설과 대포동미사일을 둘러싼 분란은 순수하게 북한의 핵과 미사일제조능력에 관한 것이라기보다는 이 지역 안정에 대한 그럴 듯한 위협을 찾기 위한 미국의 노력과 더 깊은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영변의 핵시설들을 둘러싼 갈등이 시작되기 전인 1991년 미국의 태평양사령관이 한 의회청문회에서 북한은 ‘이 지역 안보에 가장 심각한 직접적 위협’이라고 주장하는 등 미국정부는 진작부터 북한의 ‘위협’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특히 영변 핵위기가 지난 뒤인 1997년 4월 윌리엄 코언 국방장관은 직접 ‘위기설 전도사’로 나서 한국과 일본 동시방문에서 위기설을 강도 높게 주장했다. 또 5월 28일과 30일에도 미 공군사관학교와 로스앤젤레스 소재, 한 대학에서 “한반도는 전 세계에서 전쟁발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지역이므로 미국은 이에 대비해야한다”라고 강조했다.

 

이러한 미국의 노력(?)은 얼마 전까지도 끈질기게 계속되고 있었는데, 2001년 4월 18일 존 맥클로린 CIA 부국장은 텍사스 A&M대학에서 열린 한반도 학술회의에서 “지난 1994년 이후 북한 영변의 핵시설은 가동이 중단됐지만 우리는 아직 북한의 플로토늄에 대해 파악하고 있지 않다”며 “아마도 북한이 한두 개의 핵폭탄을 갖고 있을 수 있으며 화학무기와 함께 생물학무기도 보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월포위츠 국방차관도 같은 해 7월 12일 상원 군사위원회에서 “주한미군 등은 화학탄두와 재래식 탄두를 탑재한 북한의 탄도미사일 공격에 대한 방어 수단이 전혀 없다”고 지적하면서 방어수단이 없기 때문에 북한의 단 한 차례 공격에도 수만에서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이에 대비해 공중발사 레이저무기의 개발을 위한 국방예산 증액을 강력히 촉구하기도 했다.

 

사실 북한이 영변의 핵시설들을 이용해서 핵무기를 개발하고 있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지만 미국은 북한의 핵위협이라는 카드를 이용해, 냉전시기의 과도한 국방비지출에 염증을 느끼고 있던 자국 국민들이 요구한 국방비감축 압력을 무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남북한 사이에 진행되던 유화조치들에도 찬물을 끼얹었고, 일본의 재무장을 위한 빌미로 사용했다. 미국은 이렇게 한반도의 위기상황을 아·태지역 안보의 최우선 과제로 부각시킴으로써 이 지역 안보의 주도권을 재탈환했던 것이다.

 

이것은 그 후 북한의 미사일위협으로 더욱 확대·재생산돼 다분히 군산복합체의 요망사항이 담긴 것으로 보이는 미사일방어계획(MD)으로 모습을 드러낸다. 그러나 6·15남북정상회담 이후 한반도의 긴장 완화가 현실로 다가오자 미국은 7·4남북공동성명 때도 그랬던 것처럼 상당히 못마땅해 하고 있다. 남북간 적대관계를 부각시키면서 유지해 온 자신의 군사전략이 존재이유를 상실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여기에 대해 ‘월든 벨로’ 필리핀대 사회학 교수는 <한겨레신문>에 기고한 글에서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사실 햇볕정책은 부시 행정부가 국가미사일방어(NMD)체제라는 이름으로 전역미사일방어(TMD)체제를 포함한 지구적 미사일방어망을 구축할 의지를 표명했을 때부터 이미 위기에 처했다. 미국 안보분야의 기성세력은 김 대통령의 대 북한 화해정책을 편안하게 생각한 적이 없다.

 

그들은 남북화해가 미군의 한국주둔을 문제 삼게 되는 상황으로 이어질 것을 가장 두려워해 왔다. 미군이 계속 주둔하려면 정당화할 수 있는 논리가 필요하다. 한국 국민들도 그들과 마찬가지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에 대해 ‘과대망상증의 전제군주’라는 이미지를 갖고 있다면 문제될 게 없다.

 

그러나 2000년 6월 김대중 대통령의 북한 방문 때 김 위원장의 이미지가 ‘오래 헤어졌던 친구’ 정도로 바뀌자, 미군철수의 악몽이 미 국방성을 덮쳤다. 그 뒤로는 한국의 지도자들이 그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미군과 미군기지의 무한정 주둔이 필요하다고 아무리 말한들 소용이 없게 됐다.

 

미국의 이런 태도에는 또 다른 원인이 있다. 1990년대 중반 이래 미국의 군사전략은 중국과 경쟁이 심해지는 것을 전제로 재정립돼 왔다. 국방성 내부문서인 ‘아시아 2025’는 남아시아·동남아시아·동아시아의 6가지 전쟁시나리오에서 중국을 미국에 주된 위협으로 일관되게 인식하고 있다.

 

클린턴 전 행정부시절에 안보엘리트들은 봉쇄보다 개입을 앞세우는 민주당의 대 중국정책에 불편한 감정을 드러내곤 했다. 부시 행정부에서는 대 중국정책에서 봉쇄가 더 중요하게 부각됐고, 그 요체는 중국을 둘러싸는 군사적 방어선을 치는 것이다. 아시아대륙으로 들어가는 미국의 유일한 교두보인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과 미군기지는 이 때문에 미국에 요긴하다.……"

 

그래서 미국은 한반도에서 남북한이 공동의 정치적 비전과 노력을 통해서 평화를 구축하는 것을 회의하며 불신한다. 미국은 한국이 미국 자신의 군사전략체계의 일부로서 자신에게 종속적인 체제로 안정을 관리하는데 협력하는 하위 동반자로 남아있기를 바란다. 이런 구조 속에서만이 미국은 끊임없이 자국산 무기수입을 전제로 하는 전력증강을 명분으로 군사비 증액을 요구하고 한·미동맹이라는 톱니바퀴에서 한국을 벗어날 수 없게 만들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솔직히 말해 북한의 남침위협은 부시 행정부의 걱정거리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보다는 북한의 위협이라는 망령이 미사일방어와 한국에서의 미군주둔을 정당화하는데 매우 유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우리사회에 동북아의 세력균형을 위해서는 미군의 존재가 필수불가결하다고 인식돼 있는 것은 아이러니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중국의 급격한 군사력 증강에 따른 동북아에서의 주한·주일미군의 역할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균형자 역할을 미국만이 할 수 있다고 보는 것은 너무 미국에 치우친 사고방식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세력균형이라는 것 자체가 두 개 이상의 세력들 사이의 힘의 균형을 말한다고 할 때, 어느 한나라만을 가리켜 안정자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시 말해 동북아질서는 불안정한데 미국이 있음으로써 안정된다는 생각은 미국중심적인 주관적 사고일 뿐이다.

사실 동북아의 세력공백은 중국대륙에 정치적 통일성이 와해된 상황에서 발생했다. 19세기말과 20세기 초반처럼 중국대륙이 군벌의 혼란에 빠져 정치세력이 사분오열(四分五裂)된 상태는 분명 세력의 공백으로서 서구 제국주의열강과 일본에 의한 침탈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이 성공하고 중국이 경제와 안보 면에서 위협적인 속도로 급성장을 거듭하면서 동북아는 팽팽한 세력간 대립의 장이 됐다.

 

역설적으로 이런 상황은 미국의 존재를 중국이 동북아에서 강력한 패권국가로 성장해 이 지역의 세력균형이 무너지는 것을 방지하는 가장 중요한 균형추 역할을 하게 만들고 있는 게 사실이다. 그러나 그 보다 더 중요한 건 미국이 자신의 존재를 국제평화를 위한 세력균형 차원이 아니라 세계적 패권전략의 일환으로 계속해서 이 지역에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중국의 성장에 따른 동북아에서의 패권적 지위양보를 세계에서 자신의 패권을 상실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냉전 당시부터 기회 있을 때마다 스스로 “태평양국가”이며 “동북아 4강”이라고 주장해 왔다는 사실이다.

 

이는 2001년 7월 파월 미 국무장관이 럼스펠드 국방장관과 함께 호주에서 가진 기자회견에서 “미국은 태평양국가이며 계속해서 이 지역 주둔 미군을 가진 태평양국가로 남아있을 것이다”라고 언급한데서도 입증되고 있다.

 

따라서 동북아지역에서 중국의 부상은 냉전종식 이후 구소련이 점유했던 전략적 영역을 중국이 대체하면서부터 지속되어 온 동북아지역의 기본적인 전략구도 상 하나의 구조적인 양상이자 세계의 지정학적 지평변화를 주도하게 될지도 모를 “새로운 전략적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맥락에서 볼 때 한국에 거대한 미군을 주둔시키는 목적이 단지 북한을 저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현실적으로 설득력을 갖기 어렵다.

 

홍콩의 유력한 반 관영 일간지 <대공보>는 “최근 남북관계 개선으로 오랫동안 계속된 신화가 점차 깨지고 있다”는 제하의 2000년 10월 24일자 기사를 통해 미국이 의도적으로 북한의 위협을 과장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이 북한의 위협을 주장하는 이유는 첫째, 미국은 유럽과 동북아지역을 세계에서 가장 중요한 지역으로 보고, NATO 및 일본과의 군사동맹 강화를 통해 동(同) 지역을 통제하려고 하므로 동북아지역에 서의 북한 위협론은 이러한 전략실현에 매우 중요하다.

 

둘째, 미국이 동북아를 통제하기 위해서는 우선 한반도를 통제해야 하며, 북한의 위협은 주한미군을 통해 미국의 패권전략을 실현하는데 필요하다.

 

셋째, 미국은 일본을 통해 동북아전략을 실현하면서도 한편으로 일본을 묶어두기 위한 노력을 병행해 왔으며, 일본 또한 북한의 위협이라는 구실을 만들어 미국과 함께 라는 이름 하에 군사력을 증강해 왔다.

 

넷째, 미국은 구소련 해체 이후에도 세계 유일의 절대적인 우세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 군사력을 증강해 오고 있으나, 아직 만족하지 않고 북한의 장거리미사일 위협을 구실로 미사일방어망 개발을 가속화하고 있다.

 

다섯째, 미국이 한국전쟁 후에도 주한미군을 계속 유지하는 것은 북한에 대항하는 측면도 있지만 중국을 잠재적인 적으로 생각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영변 핵재처리시설#미사일방어계획#남북정상회담#동북아 세력균형#태평양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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