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견된 혼란, 무책임한 대응 지난 12월 7일에 수능 성적이 발표되었다. 교육인적자원부는 그 이유를 올해 처음 도입된 수능 등급제에 따른 수험생과 일선 고교의 혼란을 막기 위해서 예정보다 닷새 발표를 앞당겼다고 하였다. 하지만 수험생들의 혼란과 불안감은 현실로 다가왔다. 일부 언론과 사교육 업체에서 의도적으로 이런 불안감을 조장한 측면도 있지만,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는 자신의 수능 원점수를 공개해달라는 민원이 빗발쳤고 일선 학교에서는 진학지도를 어떻게 해야 할지 곤혹스러워하고 있다. 보수 언론들은 이러한 상황을 즐기고 있는 듯하다. ‘입시 혼란 주범 수능등급제 강행 세력 가려내야’, ‘수능등급제 후폭풍, 느닷없는 사교육 시장 활황’ 등의 선정적인 제목 아래 ‘교육 포퓰리즘’이니 ‘로또식 대입’이니, ‘대학평준화로 가려는 술책’이니 온갖 수사로 수능등급제가 마치 재앙의 근원인 양 선동하고 있다. 그리고는 슬쩍 ‘대학입학 자율화’, ‘본고사 부활’을 책동하고 있다. 이들은 입시경쟁의 근본 원인인 대학서열체제에 대해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있다. 소위 개혁 언론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애써 현 정부의 2008학년도 입시안을 옹호하고 있다. ‘수능 등급 공백 없었다’, ‘등급제로 성적 범위가 넓어져 지원 가능 대학이 많아졌다’는 식의 논리를 펴고 있다. 게다가 수능등급제가 ‘대학입학자격고사’로 가는 중간 다리로 봐야 한다는 희망 섞인 분석을 내놓고 있다. 이들 역시 대학서열체제와 수능등급제 사이의 모순에 대해서는 아무런 지적도 하지 않고 있다.
문제의 근원은 대학서열체제 교육인적자원부의 2008학년도 입시안은 수능의 비중을 줄이고 학생생활기록부의 비중을 높임으로써 공교육을 강화한다는 명목 아래 도입되었다. 그러나 이 목표는 애당초 실현 불가능한 목표였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대학서열체제가 유지되고 상위권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입시경쟁체제가 존재하는 한 내신이든 수능이든 논술이든 학생을 점수로 서열화하는 도구가 현실적으로 필요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번 수능 등급제 혼란은 대학서열체제가 존재하는 한 어떠한 입시제도도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다. 모든 대학이 한 줄로 줄 서 있는데, 수능만 9등급으로 나눈다고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 대학서열을 없애고 수능을 자격고사로 전환하든지, 대학서열을 그대로 둔 채 수능으로 학생을 줄 세우든지 해야 문제가 해결된다. 전자는 모두가 행복해지는 해결 방식이고, 후자는 모두가 불행해지는 해결 방식이다. 본고사 부활도, 내신 강화도 대안은 아니다 일부에서는 수능 등급제로 인한 혼란을 핑계로 대학에 학생 선발 자율권을 부여하자고 주장한다. 어불성설이다. 이미 대학은 학생 선발의 자율권을 충분히 누리고 있다. 대학은 내신 상대평가에 따른 결과마저도 학생 선발의 도구로 활용할 수 없다며 철저히 무력화하지 않았던가. 만약 대학에 그 이상의 자율권을 부여한다면 필연적으로 본고사가 부활하게 된다. 그렇게 되면 학생들은 더욱 가혹한 입시지옥에 시달리게 되고 학부모들은 천문학적인 사교육비 부담에 시달리게 될 것이다. 교육인적자원부는 내신 강화라는 취지를 철저히 묵살하고 있는 대학 측에 비난의 화살을 돌리고 있다. 어불성설이다. 전국의 모든 대학이 한 줄로 서열화되어 있고 각각의 대학이 나름의 전형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 상황을 그대로 둔 상태에서, 대학이 학생생활기록부를 중심으로 한 다양한 선발 방식을 활용하도록 유도한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한 일이었다. 설사 내신 중심의 입시안이 실현되더라도 공교육이 정상화기는 커녕 오히려 같은 학급 친구들과의 살벌한 경쟁이 심화되어 학교 공동체가 붕괴될 것이다. 그렇다고 수능 원점수 혹은 백분위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대안은 아니다. 이는 점수 1점이 한 인간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과거 학력고사 체제로의 회귀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전국의 모든 학생이 수능 점수를 1점이라도 올리기 위한 무한경쟁에 돌입하게 되고, 공교육은 철저히 문제풀이 위주의 입시교육에 매달릴 수밖에 없게 된다.
유일한 대안은 대학평준화 문제의 근원은 내신 등급제가 아니라 대학서열체제이다.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없는 대학서열체제가 존재하는 한 내신을 강화하든 수능의 변별력을 높이든 가혹한 입시지옥과 사교육비 고통은 사라지지 않는다. 따라서 대학서열체제를 해소하는 대학평준화만이 근본적인 대안이다. 수능을 폐지하고 대학입학자격고사를 도입하여 이 시험에 통과한 학생이라면 누구나 자기가 원하는 대학과 학과에 진학할 수 있는 구조를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어떤 대학 어떤 학과를 나왔느냐에 따른 사회적 차별을 없애야 한다. 수능등급제는 폐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수능 원점수제 혹은 백분위제로 돌아갈 수는 없다. ‘대학수학능력고사’는 원래 말 그대로 ‘대학에서 수학할 수 있는 능력을 판별하는 시험’일 따름이다. 수능의 원래 취지대로 수능은 자격고사로 전환되어 대학에서 학문을 이수할 수 있는 기본 소양만 판별하면 된다. 즉 성적을 산출하지 않고 합격과 불합격 여부만 판별하는 것이다. 프랑스의 바깔로레아, 독일의 아비투어 시험이 바로 그러하다. 대학서열은 해체되어야 한다.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는 한 입시경쟁과 사교육비 부담은 사라지지 않는다. 대학이 서열화되어 있는 한 대학 간의 자유로운 학문 발전은 이루어질 수 없다. 각 대학이 학생을 독자적으로 선발하는 것이 아니라 전국 단위 계열별로 학생을 공동 선발하여 학생들이 원하는 대학, 원하는 학과에 지원하는 체제로 가야 한다. 대학 사이에 자유로운 학점 교류가 이루어지도록 하여 대학생들이 마음껏 학문에 정진하도록 해야 한다. 그리하여 학벌이 재생산되는 구조를 타파하고 능력으로 존중받는 사회 풍토를 만들어야 한다. 입시폐지, 대학평준화. 이는 우리 사회가 단 한 번도 검토하지 않았던 방안, 하지만 반드시 시행해야 할 유일한 대안이다. 이것만이 야만적인 입시지옥과 사교육 부담을 없애고 교육을 정상화할 유일한 대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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