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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
 
가정에는 ‘가훈(家訓)’이 있듯이 국정원에는 ‘원훈(院訓)’이 있다. “정보는 국력이다.” 이는 1998년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자 당시 초대 국정원장이었던 이종찬씨가 종전의 안기부를 완전히 뒤바꾸어 놓으면서 부 명칭과 함께 이 원훈도 바꾼 것이다.
 
종래의 안기부 부훈(部訓)은 “음지에서 일하고 양지를 지향한다”였다. 좀 쉽게 풀이하면, 죽도록 일해서 국가를 위해 찬란한 공훈을 세우더라도 절대로 자랑해서는 안 되며 업무상 비밀은 무덤까지 가지고 가라는 뜻이다.

 

그런 문구는, 정보기관에 갓 근무하는 초임 직원들에게는 뿌듯한 긍지거리기도 했다. 실제로는 근무하면서 그걸 그대로 지키기란 참 어려운 일이지만 그 부훈이 주는 각성 효과는 늘 잠재되어 있었다. 
 
고위 간부들은 지키지 않는 원훈
 
그런데 지금까지 보면, 정무직으로서 신분 공개가 가능한 차장 이상의 고위 간부들은 그것을 잘 지키지 않았다. 국장 이하의 직원들은 법적, 제도적으로 장치가 되어 있기 때문에 거의 잘 지키지만, 그 윗선에서는 신분 공개가 가능한 점을 악용하여 ‘이름 날리기’에 신경을 쓰는 경우가 가끔 있었다.
 
이번 김만복 원장의 경우도 그 일환이다. 과거에도 원장은 자신의 역할이나 공적을 드러내고 싶어 매스컴에 등장한 적이 더러 있다. 정치인이 아니었던 고영구씨나 김승규씨의 경우를 제외하면 역대 원장들은 거의 언론 카메라 앞에 서기를 좋아했다. 역대 원장들은 대개 정치인으로서 미리부터 매스컴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그걸 지나치다고 의식하지 못한 것뿐이다.
 
그런데 이번 김 원장의 경우는 그 정도가 너무 심했다. 그 이유가 참으로 아이러니하다. 국정원에서 잔뼈가 굵은 국정원맨이기 때문에 도리어 정치적으로는 아마추어의 추태를 보인 것이다. 즉, 미리 정치인이었더라면 그렇지는 않았을 과오를 범한 것이다.
 
그는 원내에서도 국내, 국외, 대북 분야의 실무분야보다는 주로 총무, 기조실 등 지원 분야에서 컸다. 그런 경우 꼼꼼하고 판에 짜인 행정가의 체질이 몸에 밴다. 그가 원장이 되었다고 했을 때, 나는 이제야말로 낙하산이 아니라 정통 국정원맨이 수장으로 탄생되었다면서 내심 다행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하필이면 그인가에 대해서는 실망했다. 지원 분야에서 잔뼈가 굵은 사람은 원내에서 보면 정통은 아니다. 
 
그런 김만복 원장이니 과거 원장들과는 달리 거꾸로 안에서 밖으로 얼굴 알리기를 시도한 것이다. 그가 정치권에 누구와 선을 닿고 얼마나 정치적 야망을 가졌는지 등 구체적 사항은 알지 못하지만 상황으로 보면 평생을 음지 속에서 살아왔던 그가 양지로 나가고 싶어 했던 동기를 정치적이라고 보는 것은 충분히 이유가 있다.
 
설사 이번 북한 방문 대화록 유출이 아니더라도 아프간 인질 사태시의 그의 거동은 역시 그가 명예에 목말라 한 좋은 증표다. 국정원 직원들이 눈에 뜨지 않게 국익을 위해 이루어낸 공로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들은 모두 지금도 입을 다물고 있다. 그런데 김 원장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름 없는 국정원 직원들을 실망시키지 말아야  

 

모르기는 해도 많은 국정원 직원들은 지금 엄청나게 실망하고 있을 것이다. 국정원 직원들이 잡은 마약범도 대외적으로는 그 공로와 명예가 모두 검찰로 돌아간다. 산업스파이를 잡아내고도 그를 잡은 직원은 TV에 얼굴은커녕 신문에 이름 석 자도 보이지 않는다. 그랬는데 원장은 뽐내기 위해 국정원을 망신시켜 버린 것이다.
 
사실, 사람의 명예욕은 식욕, 성욕과 마찬가지로 거의 본능이다. 물론 이 때의 명예는, 형법 명예범 조항의 해석학에서 말하는 '외적 명예'이다. 즉, 스스로 뿌듯하게 여기는 내심의 명예감이 아니라 남들이 보아주는 평가라는 의미의 명예이다. 사람들은 이런 외적 명예를 바라는 본능이 있다. 연예인이 되고 싶어 하고, 길거리에 지나가다가 우연히 TV 카메라에 찍힌 것도 친한 사람에게 호들갑 떨며 자랑하는 것은 남들에게 알려지는 것을 좋아하는 본능 때문이다.
 
김만복 원장의 행동은 인간적으로 보면 이해도 가고 그를 너무 몰아세우는 게 좀 심할지도 모른다. 자신의 이름을 알리고 싶은 명예욕 본능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그러나 이 문제는 아량이나 이해를 보일 사안이 아니다.
 
국정원 직원은 그러면 안 된다. 그 본능을 특별히 자제하는 것이, 미덕이 아니라 사활적인 책무가 되어야 할 사람들이다. 국익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원장 한 사람이 그런 거 터뜨리면 대북 관계 담당 실무 직원은 땅을 치고 한탄을 한다. 권영해 부장의 북풍 조작 때 대북 접촉 채널이 모조리 단절된 예도 있다.
 
물론 억울한 면이 많다. 잘못 되면 거의 다 뒤집어쓰고 쇠고랑을 차지만 잘 한 건 소리 없이 묻혀버리는 게 억울할 것이다. 그러나 국정원 직원은 그런 것을 각오하고 그런 책임을 지기로 하고 일을 택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억울하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걸 억울하게 여기고 명예를 빛내고 싶다면 국정원을 떠나야 한다. 진정한 명예는, 누구도 알아주지 않지만 죽는 날까지 스스로 뿌듯해 할 ‘내적 명예’이다. 
 
이번 김만복 원장의 경우는 너무도 큰 국정원의 불명예가 되었다. 내가 우려하는 것은, 국정원 내부 출신이 원장이 되면 제2, 제3의 김만복이 출현할 가능성이 많다는 이유로 고유한 국가정보를 다루는 기관이 다시 정치인의 논공행상 거리나 정권 하수기관으로 전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일이 없기를 간곡히 바란다. 


태그:#김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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