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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펑펑 큰 눈이 내린 날, 제가 일하는 동네에서는 작은 잔치가 있었습니다.
펑펑 큰 눈이 내린 날, 제가 일하는 동네에서는 작은 잔치가 있었습니다. ⓒ 김세진

펑펑 큰 눈이 내린 날, 제가 일하는 동네에서는 작은 잔치가 있었습니다. 사실 잔치랄 것도 없지요. 반지하 작은 방에서 동네 할머니 몇 분을 모시고 차와 귤 몇 개 놓고 김치전과 부추전을 지지면서 담소를 나누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제가 일하는 곳에 평소 자주 놀러 오는, 오래전부터 알고 지내는 중고등학생 몇몇 학생에게 함께 준비하고 맞이할 것을 부탁하였습니다. 처음에는 설쳐대는 아이들 때문에 괜히 어르신들을 모셔놓고 불편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했습니다.


하지만 시간이 조금 지나면서 걱정은 걱정일 뿐, 아이들도 각자 제 일을 잘 찾아 했고 또 일이 없는 아이들은 없는 대로 혼자 놀기도 하고, 어르신들 틈에서 음식을 집어먹기도 하면서 자연스레 친척들이 한자리에 모인 것 같은 풍경을 만들어갔습니다.

그렇게 두어 시간 동안 열렸던 작은 잔치는 끝났고 놀러 오셨던 동네 어르신들은 아이들의 도움을 받아 각자의 집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아이들은 남은 뒷정리를 도와준 뒤 이내 친구들과 몇 통의 전화를 주고받더니 새로운 약속을 만들어냈고 제게 넙죽 절하고는 떠나갔습니다.

 

사실, 이런 모습들은 제가 일하는 곳에서는 자주 있는 일입니다. 의도적으로 아이들을 제가 하는 일에 참여시키는 것인데, 물론 부족한 일손을 빌리려 한 것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아이들에게 동네 분들과 자연스러운 만남의 시간을 갖게 하고 싶었습니다.

 

청소년들의 자원봉사활동이 의무화되면서 대부분의 학생들에게 봉사활동은 소중한 ‘나눔의 경험’이라기보다 의무시간을 채워서 확인서를 받기 위한 ‘시간 때우기’로 여겨지는 것이 현실입니다.


아이들에게도 봉사활동은 말 그대로 ‘봉사하는 활동’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오히려 그러한 의무적 활동이 아이들에게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타자화하거나, 나와는 전혀 다른 세상에서 살아가는 사람으로 생각하게 될까 봐 걱정입니다.

 

나눔이란 사람 사이 자연스러운 삶의 법칙이었습니다. 하지만 세상이 변화하면서 한 지역에 오래 머물고 살기가 힘들어졌고, 이웃사람은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사람이라 느낄 수 있는 여유를 가지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웃하는 사람이 누군지를 모르니 사소한 일에도 얼굴 붉히는 일이 잦아지고, 그렇게 동네는 어느새 삭막하게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웃과 소통하고 애정이 흐르는 골목의 문화가 사라져 버렸습니다. 하지만 사람의 본성에는 누구나 나누고자 하는 마음이 씨앗처럼 심어져 있으니, 이를 다시 살려내기 위한 방법 중 하나로 ‘자원봉사활동’이 생겨나서 다행이지만, 언젠가부터 제도로써 아이들에게 강제되는 것이 지금의 안타까운 모습입니다.


그렇기에 나눔이란 더욱더 이웃 사이의 자연스러운 사람살이로써 풀어내야 하는 것이어야 합니다. 홀몸 어르신을 정기적으로 방문하는 ‘활동’도 좋지만 비록 정기적이기는 못할지라도 ‘활동'으로 찾아뵙기보다 어르신 댁 근처를 지나면서 잠깐 들여다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렇기에 아이들에게 부탁하는 과정에서도 ’활동을 같이하자‘가 아니라 동네 어르신들을 모시고 맛있는 것을 함께 먹고 싶은데 ’조금 거들어 달라‘고 했습니다. 함께 모여서 맛있는 음식을 나누는 동안 뜻하지 않은 모습 하나가 만들어졌습니다.

 

씩씩한 중학교 2학년 여학생이 성큼성큼 할머니들 앞으로 나가더니 넙죽 큰절을 올리며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하고 외쳤습니다. 모두 기특하다며 칭찬하시니까 다른 아이들도 줄줄이 세배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세배를 받으시던 할머니 한 분이 여자와 남자의 세배는 서로 다르다며 몸소 시범을 보이시고 자세를 고쳐주셨습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이러한 자리가 얼마나 소중한 지 새삼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동네의 어르신으로서 아이들에게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의무를 하신 것이지요. 그렇게 동네 어른의 역할이 주어짐으로 뿌듯해 하시고, 그러한 것이 그 어르신의 자존심을 살려드리며 존재의 의미를 갖게 해드리는 게 된다는 것입니다.


‘가느다란 지팡이 하나에 전 생애를 의지하는 어르신들에게
아들이자 친구 같은 존재로 다가간다.
누군가 내게 관심 가져주고 말 걸어준다는 것,
그 자체로 삶은 희망이 되는 것이다.’ - (민들레 국수집, 서영남)


전을 부치기 위해 필요한 프라이팬은 뒷집 허씨 할머니께 빌렸습니다. 소금은 옆집 전씨 할아버지 댁에 부탁했고 접시는 이씨 할머니, 가스버너는 초대하여 잡수시러 오시는 박씨 할머니께서 들고 오셨습니다. 넉넉하게 부친 전들을 잘 나누어 한 접시는 앞집 세탁소 아저씨께, 또 한 접시는 다리가 불편하여 놀러 오지 못한 허씨 할머니께 전했습니다.

할머니들만 모여 있어서 오시기 불편해 하시는 이씨 할아버지께도 가져다 드렸습니다.
오고 가는 빈 접시에는 사탕, 귤 그리고 동네 인심이 담겨있었습니다. 물론, 이전 과정들을 아이들이 펑펑 쏟아지는 눈 사이를 열심히 오고가면서 성실히 잘해냈습니다.

 

아이들에게도 나눔이 특별한 이벤트성 활동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일상이 될 수 있게 하는 귀한 기회였습니다. 봉사활동 확인서를 요구하는 자리도 아니었고, 봉사활동이라 부르지도 않았던 이 날의 작은 잔치는 그저 동네사람들의 일상이었고 그러한 일상 속에서 아이들의 마땅한 섬김이었습니다.


설령 아이들이 당장은 저와 같이 느끼지 못할지라도 이러한 만남이 반복적으로 지속된다면 자연스럽게 느껴지게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아이들에게 이웃과의 만남과 나눔을 봉사활동이라고 개념화시키고, 그에 따른 대가로 서류를 만들어주는 것은 바로 어른들이니까요.


내가 만약 비라면
- 수미트라, 12살

내가 만약 비라면
물이 없는 사람들에게 달려갈 텐데.
달려가 ‘내가 가고 있어요!’하고 외칠 텐데.
그래서 온 세상 사람들이 나오면
깨끗한 빗방울로
사람들의 양동이를 채워 줄 텐데….
- (아이들은 놀기 위해 세상에 온다, 편해문)


이제 아이들의 봉사활동을 주관하는 일을 하는 대표적인 사람들인 사회복지사들부터 조금 더 깊게 고민해야겠습니다. 일을 조금 덜 하더라도 사람 사이의 관계를 살리는 것에 힘써야겠습니다. 사업으로 해야 하는 청소년 봉사활동이라 할지라도 그 중심에 사람이 없으면 차라리 아니한만 못합니다. 어르신을 봉사의 대상으로 여기는 활동은 아이들에게 활동 따로 내 삶 따로라는 잘못된 생각을 심어줄 수 있습니다.


김치 담그면서 이웃집과 나눠 먹는 일, 평소 동네 골목 어귀에서 자주 뵙게 되는 할머니에게 인사하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지 이야기하는 것부터 시작했으면 합니다. 시간이 오래 걸리고 품이 많이 들더라도 긴 호흡으로 멀리 봅시다. 아이들과 어떤 일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함께 상의하는 것부터 시작한다면, 청소년 자원 활동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이날 잔치 뒤에 할머니 댁까지 모셔다 드렸던 아이들 중 몇몇이 할머니의 부탁에 못 이겨 댁에서 따뜻한 차 한 잔과 빵을 대접받고, 다음에도 다시 찾아뵙겠다는 약속까지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다시 만난 할머니께서 들려주신 말씀이, 차 마시러 들어온 아이들에게 식빵에 채소를 넣어 주었더니 맛있게 잘 먹더랍니다. 평소 손님 하나 없는 집이 훈훈하게 느껴져서 참 좋았다고 하셨습니다. 아이들에게도 연락하여 들어보니 그날 할머니께서 주신 빵을 배부르게 잘 먹어서 좋았다며 출출할 때 또 놀러 갈 거라고 합니다.


우연히 길을 걷다 동네 골목에서 할머니와 아이들이 마주친다면 서로 얼마나 반가울까요?

이번 잔치처럼 세대 간, 이웃 간에 소통할 기회를 만들고 이를 통해 관심과 인정이 넘치는 골목의 모습을 되살리는 것이 제가 하는 복지사업의 핵심입니다.

덧붙이는 글 | 월간 <정해복지>에 기고한 글입니다.


#지역사회#동네#골목#복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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