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말고도 이 자선병원 곳곳에는 숨은 볼거리가 있습니다. 대가들의 작품이 걸려 있는 자선병원 부속교회를 나오면 치료중인 노인들이 산책을 하고 있는 중정이 눈에 들어옵니다. 2중 구조로 지어져 있는 중정에도 역시, 아슐레호 타일들이 멋지게 장식되어 있습니다. 그 중정복도를 따라 걸으면, 교회 옆으로 마련돼 있는 회의실이 나옵니다. 이 회의실 내부에도 역시 무수한 그림들이 장식되어 있는데, 발데스 레알의 그림처럼 바니타스 사상을 설파하는 내용이 주를 이룹니다.
이 자선병원이 이토록이나 삶의 덧없음에 대해 묵상하도록 끊임없이 요구하는 것은, 이 병원을 지은 미겔 데 마냐라의 삶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그는 누구일까요? 우리나라 여행안내서 중에는 미겔 데 마냐라를 '희대의 탕아 돈 후안의 실제모델'로 소개하는 책도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습니다.
돈 후안만큼이나 극적으로 살았던 사랑의 화신, 미겔 데 마냐라미겔 데 마냐라(1626~1679)는 세비야에 실존했던 귀족인데, 그는 돈 후안의 전설을 최초로 출판한 책 <세비야의 농락자>가 출현한 이후의 사람이기 때문이지요. 한때 오토랑크를 비롯한 몇 몇 돈 후안 연구가들이 마냐라를 돈 후안의 모델로 추정한 적은 있지만, 이는 가설에 불과할 뿐 오늘날에는 신빙성 없는 이야기로 취급되고 있습니다.
하지만 돈 후안의 흔적을 찾지 못해 실망하기엔 이릅니다. 미겔 데 마냐라라는 인물 자체가, 돈 후안만큼이나 극적인 삶을 살았던 사람이니까요. 굉장한 미남이었다는 마냐라는 젊었을 때 방탕한 세비야 귀족이었으나 결혼 후에는 신부를 목숨보다도 더 사랑하는 진실한 남편으로 변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녀가 죽자 거의 실성하여 고통당하던 나머지 그녀의 시체를 안고 산으로 도주했지요.
이후 그는 마음의 위안과 평화를 찾기 위해 수도원에서 은둔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는 다시 세비야로 돌아올 때마다 되살아나는 옛 상처 때문에 끊임없이 망상에 시달리며 괴로워했습니다. 그는 종종 자신이 죽거나 그 자신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꿈을 꾸었고, 거리에 나서면 죽은 아내를 닮은 여인을 보는 환상에 시달렸습니다. 이 망상에서 자유롭고자 그는 종교생활과 고행에 전념했고, 교회에 아낌없이 기부하며 살다가 마침내 말년에는 재산을 쏟아 부어 이 자선병원을 지어 바쳤던 것입니다. (정동섭의 <돈 후안: 치명적인 유혹의 대명사> 참조)
세비야에서의 마지막 관광을 마친 저는 마침내 오후 5시에 출발하는 세비야발 마드리드행 버스에 올랐습니다. 금요일이라 그런지 과연 버스 안은 사람들로 가득했습니다. 저는 가장 뒷 줄에 간신히 남아 있는 한 좌석에 앉아, 마드리드에 도착해서 찾아가야 할 숙소를 손으로 적어놓은 쪽지를 살펴보았습니다.
'마드리드, 칼레 엔카르나시온(엔카르나시온 거리) 12번지', 이게 메모해 놓은 숙소정보의 전부였습니다. 그때까지도 저는 숙소정보는 주소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여행안내센터에 물어보거나, 혹은 늦은 밤에 택시를 타더라도 택시기사에게 주소를 쓴 쪽지를 내밀어 보이기만 하면 잘 찾아서 가 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여태 그래왔는 걸요.
구체적으로 숙소에 가는 방법적 문제를 고찰해보기 시작했을 때에서야 저는, 제가 너무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주소 정도만 알고 있어서는 그 넓은 마드리드에서 소형 민박집을 찾아가는 일이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세계 5위에 드는 대도시 마드리드 안에서 칼레 엔카르나시온이라는 작은 거리를 찾는 것은 그야말로 건초 속에서 바늘 찾기, 혹은 서울에서 김 서방 찾기나 마찬가지였습니다.
여행은 예측불허, 그리하여 그 의미가 있나니한참이나 여행책자에 딸려 있는 마드리드 지도를 펼쳐 놓고 엔카르나시온 거리를 찾던 저는 한숨을 푹 쉬었습니다. 바로 그때, 누군가가 제 팔을 두드리는 느낌이 들어 옆을 쳐다보니, 통로 건너편에 앉아 있던 남미청년이 웃으면서 뭐라고 말을 걸고 있습니다. 마드리드로 가는 거냐고 묻는 거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다시 그 청년이 뭔가 손짓을 합니다. 짐작컨대 그는 아마도 제게 여행 중이냐고 묻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응. 나 여행자야"라고 대충 때려 맞춰서 영어로 말해주니 그는 자기도 "투리씨모(여행자)"라고 스페인어로 대답합니다.
제가 스페인어를 못한다고 하자 '그렇구나'라는 듯이 어깨를 으쓱해 보이더니 자긴 영어를 못한다고 의사표시를 합니다. 저는 그것으로 대화가 중단될 줄 알았습니다. 공통언어가 없으니까요. 그런데 그 친구는 온몸으로 몸짓을 해가며 뭔가를 묻고 싶어 합니다.
저 역시 그 쪽의 성의에 부응해주고 싶은 안타까운 마음이 들더군요. 그런데 저는 그가 어디 출신인지 모르지만 어쨌든 그 청년의 모국어를 할 줄 모르고, 그 청년은 영어를 할 줄 몰랐으므로, 할 수 없이 우리 사이의 공통언어는 스페인어밖에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했습니다. 물론 저는 스페인어를 배워본 적이 없었습니다. 고작 여행 시작한 뒤 3~4일 동안 생존본능으로 귀동냥한 단어를 말하는 정도였죠.
그때부터 저는 가이드북 뒤에 실려 있는 여행회화 페이지를 펴들고, 몸짓과 단어조합에 의존해 대화를 진행해 나갔습니다. 그 친구는 한참 손짓을 동원해서 제게 어디서 묵느냐고 물어보았습니다. 아, 마침 잘 됐군요. 이 친구가 어쩌면 마드리드의 거리를 잘 아는지도 모르잖아요. 저는 얼씨구나하고 청년에게 '칼레 엔카르나시온'을 아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그 친구도 고개를 가로젓더니 "마드리드는 너무 넓어서 모르겠다"고 말합니다.
이거 큰일입니다. 택시기사도 이 청년처럼 칼레 엔카르나시온을 모르면 어떡하지요? 버스가 마드리드에 도착하면 밤 12시일 텐데, 그때는 택시 외에는 다른 대중교통수단도 없습니다. 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생각에 잠겨들자, 다시 옆자리의 청년이 팔을 톡톡 두드립니다. 그는 제게 미소 지으면서, 혹시 아까 네가 보고 있던 리브로를 볼 수 있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리브로? 아아, 리브로! 책이라는 뜻이지요! 한국에서 리브로라는 이름의 인터넷 책 사이트를 종종 이용한 덕택에 이 단어를 알아들을 수 있었던 저는, 얼른 제 여행가이드 책자를 꺼내서 그 청년에게 주었습니다.
“왜, 이거 보려구? 그런데 이건 영어가 아니라 한국어라서 당신한테는 별 도움 안될텐데”라고 말하자, 그는 마드리드 부분의 지도를 펼쳐들며 빙그레 웃더니 고개를 가로젓습니다. 자기는 살펴볼 필요가 없다나요. 그 친구는 제가 어디에 묵는지 모르는 것 같아 같이 찾아주려고 그 책을 빌렸던 것입니다.
책을 샅샅이 살펴보던 그는, 도저히 칼레 엔카르나시온을 찾을 수 없었는지 고개를 숙이며 미안하다고 말했습니다. 거기까지만 해도 충분히 고마운 일인데 그 청년이 호주머니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내더니, 어디론가 전화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러고는 뭔가 한참 통화를 한 그는, 제게 자신의 핸드폰을 건네주었습니다. 저는 매우 미심쩍어하며 핸드폰에 귀에 갖다 댔습니다. 대체 왜 저를 바꿔주는 걸까요?
건네받은 핸드폰 수화기에서, 유창한 영어가 흘러나왔습니다.
"안녕? 난 네가 타고 있는 버스 옆자리에 앉아 있는 에두아르도의 사촌이야. 나의 사촌 에두아르도가 네게 인사를 건네 달라는군."
저는 황망한 표정으로 건너편에 앉아 저를 지켜보고 있는 청년을 쳐다봤습니다. 이 젊은이가 미소를 짓는군요. 전화기 너머에서 침착하고 유창한 영어가 다시 들려옵니다.
"나의 사촌 에두아르도가 내게 말하길, 너는 마드리드로 가는 여행객인데 네가 어디에 묵을지 숙소 위치를 모른다고 하더라. 그래서 사촌은 내게 영어로 통역해달라고 전화를 한 거야. 나의 사촌 에두아르도는 너를 굉장히 걱정하고 있어. 네가 대도시 마드리드에서 길을 잃어버리지나 않을까 하고 말이야. 그래서 괜찮다면 내가 너를 도와주고 싶은데, 잠깐 통화할 수 있을까?""오, 그렇고 말구요. 물론! 오, 세상에 이럴 수가,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제가 연신 그렇게 말하자 핸드폰 너머의 낯선 사람은 너털웃음을 터트립니다. 그때부터 에두아르도의 사촌은 친절하게 가는 길을 알려주고는, 만약 모르겠으면 버스 터미널에서 에두아르도와 자신이 길을 가르쳐주겠다는 말까지 해주었습니다.
달리는 버스 안에서 파티에 초대되다!나는 전화기 너머의 상대와 옆자리에 앉은 에두아르도라는 청년에게 번갈아가며 거듭 감사하다는 말을 했습니다. "무챠스 그라시아스(대단히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열두 번쯤 한 것 같습니다. 진심어린 도움을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받게 되다니, 역시 여행이란 예측불허로군요. 이제는 에두아르도라고, 이름을 알게 된 그 청년과 다시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뭔가 더 말을 하려고 해도 영어가 안 통해서 둘 다 머쓱한 웃음만 지으며 손짓 발짓을 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갑자기 앞좌석에 앉아 있던 남자가 고개를 쑤욱 내밀며 뒤를 돌아보더니, 유창한 영어로 말을 걸어왔습니다.
"안녕? 아까부터 앞자리에 앉아서 너희 둘 이야기를 듣고 있었는데 말야, 만약 영어가 안통해서 어려운 거라면 내가 영어로 통역해줄까? 나 영어할 줄 알아."
우리는 기꺼이 웃으면서 "올라!"라고 외쳤고 그렇게 해서 우리 셋은 그 자리에서 2개 국어로 대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앞좌석 청년의 이름은 이니고(Inigo). 세비야에 사는 대학생으로, 작년에 영국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왔는데 그 때 사귀게 된 국제적인 친구들이 내일 마드리드에 집결하기로 했답니다. 그래서 자기는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러 마드리드로 올라가는 중이라고 합니다.
저를 도와주었던 에두아르도 군은 브라질에서 스페인으로 일하러 온 노동자입니다. 그동안은 세비야에서 일했는데, 이제 며칠 휴가를 얻어 사촌이 있는 마드리드로 여행 겸 놀러가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이니고를 통해 에두아르도에게 아까부터 궁금했던 것을 물었습니다. "에두아르도야, 너는 어떻게 브라질 사람이면서 스페인어를 그렇게 잘해?"라고 물으니 에두아르도가 이마를 탁 치면서 "이런! 그야 당연히 남미에서는 에스빠뇰을 쓰니까 그렇지!"라고 말합니다.
에두아르도에 따르면, 남미에서는 80% 이상이 스페인어를 쓴다고 합니다. 에두아르도는 "남미랑 스페인은 굉장히 인연이 깊어, 거의 형제의 나라라고 할 수 있지"라며 "난 브라질에서 산타크루즈 거리에 살았었어. 세비야 거리 중에도 산타크루즈가 있잖아. 그런 식으로 비슷한 문화권 안에서 공통점이 수도 없이 많다구. 게다가, 우리나라 국기 색깔은 녹색인데, 세비야의 상징색깔도 녹색이야"라며 설명을 해줍니다(물론 스페인어로). 그러며 "자, 우리 국기 색깔이 이 거라구"라며 팔목에 둘러진 녹색 팔찌를 보여주자 이니고가 "오! 역시 우린 아미고야!"라고 외칩니다.
저는 에두아르도와 이니고가 급격히 친해진 것이 어리둥절해서 물어보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너희 둘이 원래부터 아는 사이였니?" 그러자 이니고가, "아니!"라고 외치더니 "하지만 이제는 서로 알게 됐으니 우린 아미고야!"라고 외칩니다. 에두아르도도 "Si, Si, Amigo!"라고 고개를 끄덕이는군요.
아아, 이 광경을 보니 왠지 지난밤 세비야에서 만났던 다비드씨가 생각납니다. 일단 친해지면 "아미고!", 한국도 아니건만 '우리는 친구 아이가'라는 정서가 여기서도 이렇게 강하다니 신기할 따름입니다.
더구나 남미가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역사적 연관성 때문에 지금도 긴밀한 관계에 있다는 건 알고 있지만, 스페인 사람도 아니고 남미에서 온 이주노동자가 '형제의 나라'라는 말을 하는 것이 놀라웠습니다.
계속해서 이야기하던 중, 이니고는 갑자기 우리 둘을 쳐다보며 눈을 빛냈습니다.
"들어봐. 좋은 생각이 있어. 여기서 만난 것도 인연인데, 둘 다 내일 저녁에 할 일 없으면 파티에 놀러와. 내가 초대할게. 어학연수에서 만났던 친구들이 마드리드의 한 바를 통째로 빌려서 밤새도록 파티를 하거든."달리는 버스 안에서 파티에 초대받다니! 제가 제 친구들과 함께 가도 되냐고 물으니 이니고가 물론이라고 거듭 강조합니다. 한번쯤 현지인들의 파티현장에 꼭 가보고 싶었던 터였는데, 게다가 가장무도회라니 놀랍기만 합니다.
새로 사귄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보니 6시간이나 걸리는 버스여행도 순식간에 끝났습니다. 마드리드 버스터미널에 도착한 이니고와 저는 서로의 전화번호를 나눈 뒤, 내일 다시 만나기로 하며 헤어졌습니다. 한편 저는 에두아르도와 그의 사촌인 고메즈씨를 만나, 두 남미청년들의 도움으로 무사히 제 숙소를 찾아갈 수 있었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여행기는 2007년 2월 13일부터 일주일간 스페인을 여행한 뒤 작성한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