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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는 광주민중항쟁 28주년이 되는 해다. <오마이뉴스>는 1980년 5·18 당시 고교생의 신분으로 항쟁에 참여했던 한 '고교생 시민군'의 회상기를 연재한다. 세월이 흘러 '고교생 시민군'들은 성인이 되었지만 그들의 활동에 대한 기록과 평가는 아직 미흡한 상태다. <오마이뉴스>는 이 연재가 '고교생 시민군'의 활동 내용을 통해 5·18을 성찰하는 귀중한 기회가 되기를 소망한다. [편집자말]
 80년 5월, 한 유가족이 가적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80년 5월, 한 유가족이 가적의 주검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마침내 농성동 하숙집에 도착했다. 아저씨와 아주머니, 동료 하숙생들이 반가워서 어쩔 줄 몰랐다. 하숙집 아주머니는 내가 오랫동안 소식이 없자 시골집에 내려간 줄 알았다고 했다. 동급생이자 룸메이트인 최재남이는 내 신상에 무슨 일이 있는 줄 알고 걱정했다고 말했다. 아무튼 무척 반가웠다. 모든 하숙생들이 잘 있었다. 역시 집이 최고였다.

저녁식사 후 학교(서석고) 정문 근처에서 자취하고 있는 친구 윤인호에게 갔다. 인호 자취방에는 이종언·한광희·김홍렬·이승진·이일천 등 친구들이 모여 있었다. 우리는 그동안 겪었던 일들을 자랑삼아 각자 돌아가면서 말했다. 그동안 내가 광주에 없어서인지 친구들은 내 근황을 제일 궁금해 했다.

농성동 하숙집에서의 투쟁 보고(?)

나는 시위대 차에 탑승해서부터 목포 부근 군부대에 잡힌 일, 통통배로 영산강을 건넌 일, 나주에서 경찰서에 끌려가 조사받은 일 등을 실감나게 말했다. 친구들은 내 얘기가 재미있는지 손뼉을 쳐가며 말문을 이어가도록 유도했다.

친구들은 목포와 영광·함평 등 도내 곳곳의 반응이 대단함을 전해 듣고 무척 상기된 얼굴로 광주 문제를 나름대로 전망하기도 했다. 웃음과 긴장과 흥분 속에서도 우리의 이야기는 밤이 늦도록 계속됐다.

광희는 무작정 탑승했던 시위버스가 문화동 광주교도소 앞에서 무차별 총격을 받았던 일을 소개했다. 광희가 탄 시위버스가 다른 시위차들과 어울려 광주참상을 알리기 위해 순천과 담양을 가려고 문화동 교도소 앞을 지날 때였다. 광주교도소를 지키던 계엄군들이 교도소 습격자들로 오인했는지, 아니면 무차별 사격이었는지 모르지만, 기습적으로 총격을 가했다. 시위 차들은 부랴부랴 운전대를 꺾어 시내로 되돌아 왔다고 말했다. 이 과정에서 앞차에 탔던 몇 사람은 죽고, 몇 명은 부상당했다고 했다.

홍렬이는 광주문화방송(MBC) 습격사건을 말했다. 시위대 차를 타고 시내를 돌아다니다가, 광주의 상황을 제대로 보도하지 않아 시민들의 원성이 높았던 광주문화방송에 투석을 하며 '진격'했다. 그런데 퇴각하고 없을 줄 알았던 계엄군들이 방송국 안에서 시위대를 공격했다. 건너편에 있는 전남여고 담장을 뛰어넘어 잽싸게 몸을 피했다. 총격을 피해서 엎드렸다. 눈앞에 은색의 물체가 보였다. 남자 손목시계였다. 웬 횡재냐 싶어 가져왔다고 말하면서 그 시계를 보여줬다.

인호와 종언이는 시위버스를 타고 시내를 누비면서 버스 안에 있는 칼빈총을 한정씩 획득해 자취집에 가져왔다가 잘못 다뤄 오발사고가 발생, 옆집 이층 벽에 총탄 흔적이 있다고 가리켰다. 운이 좋게도 인명사고는 없었다고 했다. 칼빈총을 하루 동안 보관하고 있다가 당시 전남대에 재학 중이던 인호 형이 시위대에 갖다 주라고 해서 되돌려 줬다고 말했다.

우리는 밤 11시가 넘도록 서로 무용담을 얘기했다. 나는 21일부터 25일까지 목포 나주 영암 함평 무안 영광 등 전남 서남부 지역에서 시위대활동을 하느라 광주에 없었기 때문에 5일간의 광주상황은 몰랐다. 그래서 광주 상황을 친구들에게 물었고, 친구들도 나에게 전남지역 상황을 궁금해 물었던 것이다.

민주화 대성회

5월 26일. 오늘도 어김없이 하숙집 동쪽에 있는 무등산 위로 해가 떴다. 아침 해는 광주의 아픔을 알고 있는 듯 잿빛구름 사이로 슬그머니 얼굴을 내밀고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하숙생들은 평소보다 늦게 아침식사를 했다. 룸메이트인 최재남이와 나는 시위상황이 궁금해 농성동 로터리에 갔다.

인근의 주민들도 우리처럼 궁금해서인지 하나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멀리 보이는 상무대로 가는 길인 쌍촌동 고개엔 계엄군이 도로를 차단하고 있었다.

국방색 모래차두로 된 바리케이드가 멀리서도 선명하게 보였다. 농성동 로터리는 어느새 수백 명의 시민들로 꽉 찼다. 로터리 부근에 산다는 어떤 시민은 어젯밤 늦게 광주-송정리간 도로에서 여러 대의 탱크가 지나가는 것을 봤다면서 곧 무력진압을 할지도 모른다고 우려 섞인 전망을 했다. 또 다른 시민도 무력진압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맞장구를 치면서 어젯밤 탱크이동은 진압 작전을 위한 연습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시내로 가는 길목인 농촌진흥원(현 상록회관)쪽에서 차 지붕에 스피커를 단 시민군 차가 방송을 하며 왔다. "오늘 오후 2시에 도청 앞 광장에서 시민 궐기대회가 있으니 모든 시민들은 반드시 참석해달라"고 방송했다. 교대로 외치는 남녀 시민군의 목소리가 힘차게 들렸다.

담양이 고향인 재남이와 나는 도청에 가기로 하고 일단 집으로 갔다. 하숙집 아주머니에게 점심밥을 재촉해 먹고, 농성동 로터리에 다시 나갔다. 나는 광주항쟁이 진행된 26일까지도 금남로 4가 근처까지는 갔으나, 도청 앞 광장에는 가지 못했다. 그동안 광주를 떠나 전남지역을 돌아다녔기 때문에 자세한 광주상황이 궁금하기도 했다. 그래서 도청에 가보고 싶었다. 재남이도 마찬가지 생각이었다.

재남이와 함께 도청방향으로 가는 시민군 차를 타고, 금남로 3가 광주은행 본점(현 하나로통신 호남지사) 앞에서 내렸다. 광주의 중심지인 금남로는 계엄군과 시민군이 밀고 밀리는 주전장(主戰場)이었는데도 생각했던 것과 달리 매우 깨끗했다.

시민군들은 거리청소를 하고, 모든 행정기능이 마비된 광주에서 경찰업무도 맡았다. 도로와 건물마다 물청소를 했어도 최루탄 냄새가 여전히 코를 자극했다. 평소에 물을 내뿜으며 시민들에게 볼거리를 제공했던 도청 앞 광장 분수대는 이제 계엄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단상으로 변해 있었다. 민주화대성회를 시작하려는지 수습대책위원회의 안내방송이 들렸다.

재남이와 나는 인파를 헤집고 다니면서 하나라도 더 듣고 더 보려고 노력했다. 전일빌딩의 벽과 내려진 철제문에는 각종 대자보가 시민들의 시선을 멈추게 했다. 벽에 붙어있는 영자 신문에는 미 군함이 항해 중인 사진이 게재되어 있었다. 그 옆에는 검은색 매직펜으로 쓴 '광주시민에게 보내는 호소문', 흰색과 붉은색 스프레이로 쓴 각종 구호, 광주시내 고등학생 일동의 시위 동참 촉구의 글, 끝까지 투쟁하자는 수습대책위원회의 호소문 등이 붙어있었다. 몇몇 사람들은 등사한 유인물을 돌리며 시민들 사이를 누비고 다녔다.

 80년 5.18 당시 태극기를 들고 민주화시위를 하고 있는 광주시민들.
80년 5.18 당시 태극기를 들고 민주화시위를 하고 있는 광주시민들. ⓒ 5.18기념재단 자료사진
민주화 대성회가 시작됐다. 오늘 집회가 몇 번째 열리는지는 모르지만 민주화를 부르짖는 집회가 또 열린 것이다. 분수대를 중심으로 운집한 시민들은 말 그대로 입추의 여지가 없었다.

재남이와 나는 전일빌딩과 상무관 사이에 있는 경우회 건물(지금은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민주의 종과 시민공원이 조성되어 있음) 담벼락에 기대어 열변을 토하는 연사들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목이 터질듯이 구호도 외치고 노래도 불렀다. ○○동 예비군 중대장, ○○국민학교 교사, 분노한 시민 등 많은 사람들이 차례로 분수대에 설치된 임시연단에 올라 광주시민의 단결과 투쟁을 외쳤다.

시민들도 울분을 토하는 연사들의 외침에 힘찬 박수로 동참했다. 연사들의 힘찬 열변과는 반대로 분수대 중앙에 반기로 꽂아져 있는 대형 태극기는 광주의 슬픔을 대변하듯 축 늘어져 있었다.

수습대책위 간부 한 명이 연단에 올라서서, 현재 계엄군의 동향도 보고했다. 수습위원은 현재 군내에 강경파와 온건파가 시국인식의 차이로 대립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조금만 더 버티면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대회가 끝날 때쯤 사회자가 현 광주상황을 종합하면서 덧붙였다.

"광주 애국시민 여러분! 오늘 밤이 고비입니다. 오늘밤만 무사히 도청을 사수하면 우리들은 승리할 수 있습니다. 오늘밤만 넘기면 내일부터는 광주시내 각 동별로 예비군들이 동원됩니다. 시민군에 합류하실 분들은 남자는 광주YMCA, 여자는 광주YWCA로 집결해주십시오."

집회가 끝나고 운집했던 시민들은 민주화를 촉구하는 가두행진을 시작했다. 대열의 맨 앞에서 수습대책위의 간부들과 광주지역 재야 지도급 인사, 교수 등이 정장차림으로 금남로를 걷기 시작했다.

각종 구호가 적힌 어깨띠를 두르고 걷는 그들의 표정은 비장했다. 광주항쟁을 이끌고 있는 지도급 인사들 뒤로 전남대와 조선대 등 학생들이 구호를 외치며 따르고 있었다. 뒤이어 시민들이 대열을 형성했다. 재남이와 나는 시민들과 함께 걸었다. 일련번호가 붙여진 일부 시민군 차들도 행진대열의 중간 중간에 끼어들어 보조를 맞추었다. 도로변에는 기동타격대라고 흰 스프레이로 쓴 군용지프, 미니버스, 트럭 등이 잠시나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행진대열의 선두가 금남로 5가 유동 3거리(현재는 4거리)를 지날 때는 금남로가 시민들로 가득 찼다. 도청 앞에서부터 금남로가 끝나는 유동 3거리까지 시민들로 대홍수를 이루었다. 민주화를 촉구하는 시가행진은 금남로-유동 3거리-양동시장 입구-돌고개로 이어졌다.

시민들은 자발적으로 여기저기에서 구호를 외치며 노래를 불렀다. 모든 상가는 철시한 상태였다. 행진대열의 선두가 돌고개를 넘어 농성동 로터리 부근 농촌진흥원(현 상록회관) 입구에 왔을 때, 더 이상 진행하지 못하고 멈추었다. 계엄군이 저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계엄군은 농성동 로터리에 바리케이드를 치고 있었다. 어느새 계엄군들은 쌍촌동 고개에서 이곳까지 1㎞ 정도를 더 시내 쪽으로 들어와 있었다. 

길을 열어달라는 시민들의 함성에 한 군인이 핸드 마이크로 더 이상 행진을 하지 말고 해산하라고 경고했다. 바리케이드 좌우에 모래차두로 만든 임시 초소에서는 계엄군들이 우리를 향해 총구를 겨누고 있었다. 시민들은 야유와 함께 "계엄군은 즉시 광주시 외곽으로 물러가라"고 촉구했다.

시민들은 그 자리에서 연좌시위를 했다. 대치상태가 30여 분 계속되다가 행진을 선도했던 몇 사람이 계엄군 측에 다녀왔다. 그들은 계엄군을 시 외곽으로 물러가도록 협상했으나 실패했다고 보고했다. 어쩔 수 없이 행진대열은 농성동 로터리에서 다시 도청으로 되돌아갔다. 시민들은 민주화 대성회가 끝난 지 한참 지났는데도 귀가하지 않고 도청 앞 주변에 운집해 있었다.

시민군이 되다

재남이와 나는 시신이 안치되어 있는 상무관에 갔다. 도청 맞은편에 위치한 상무관은 평시에는 경찰들과 유도선수들, 그리고 검도선수들이 훈련하는 체육관이었다. 그러나 광주항쟁 기간동안 상무관은 예전의 심신을 단련하던 도장이 아니었다. 더 이상 우리 학교(서석고) 검도부의 연습장이 아니었다. 유도복을 입고 체력을 연마하던 상무관이 아니었다. 상무관은 말 그대로 생지옥이었다.

상무관 입구는 행진을 마치고 돌아온 시민들의 추모 행렬로 장사진을 이뤘다. 평상시 기합소리가 가득했던 상무관은 슬픈 울음소리만 가득했다. 입구 쪽만 스탠드가 설치돼 있던 상무관은 추모 인파로 붐볐다.

아래편 마루에는 장내를 정리하는 수습대책위원들과 유족들이 있었다. 마루에는 가지런히 정돈된 목관이 수십여 개가 있었다. 관 위에는 어이없이 죽은 시민들의 사진이 놓여있었다. 사진 옆에는 꽃이 한 송이씩 놓여있었다. 몇 개의 관에는 아직 구하지 못했는지 망자의 사진은 없고 꽃 한 송이만 덩그러니 놓여있기도 했다.

스탠드 건너편 벽에는 대형 태극기가 걸려있고, 실내는 향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관 위에 놓여있는 사진들을 둘러보니 기가 막혔다. 열 살도 채 안돼 보이는 어린 남자아이, 단정하게 교복을 입은 여고생, 서당 훈장이 연상되는 긴 수염의 할아버지, 이마에 몇 가닥 주름살이 잡힌 초로의 아주머니, 검정색 교복에 교모를 쓴 남고생…. 이렇게도 무차별로 살상할 수가 있단 말인가!

곧이어 약식 추도식이 있다는 장내방송이 들렸다. 추모객들은 묵념을 하고, 애국가를 불렀다. 차마 다문 입이 떨어지지 않은 듯 모두 낮은 목소리로 불렀다. 치밀어 오른 슬픔과 분노를 삭이며 겨우 노래를 마쳤다. 추도식 마지막 순서로 '고향의 봄'이란 노래를 불렀다.

"나의 살던 고향은 꽃피는 산골
복숭아꽃 살구꽃 아기진달래
울긋불긋 꽃 대궐 차린 동네
그 속에서 놀던 때가 그립습니다……"

애국가를 부를 때보다 더욱 처량했다. 여기저기에서 노래와 뒤섞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도 울고 말았다. 하얀 소복을 입은 유족들은 관을 부둥켜안고 울었다. 상무관은 온통 울음바다를 이루었다. 분향을 끝낸 나는 분노와 슬픔을 안고 밖으로 나왔다. 계속해서 많은 시민들이 분향을 하기 위해 상무관으로 들어갔다.

시민군 지휘부가 있는 도청에 설치된 스피커에서는 계속 광주시민들의 총궐기를 촉구하고 계엄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방송이 흘러나왔다. 문득 분수대 광장에서 열렸던 민주화 대성회 때 한 연사의 말이 생각났다. '오늘밤만 도청을 지키면 시민군이 승리한다고 했지 않는가.' 조금 전 분향하고 나왔던 상무관의 처참했던 모습이 다시 떠올랐다. '그래, 도청을 사수하자. 아무 죄 없이 먼저 가신 시민들의 원한을 풀어주자.'

마침내 나는 도청 사수를 다짐했다.

"재남아, 오늘밤은 여기서 지내고 내일 집에 가자."

슬픈 표정을 하고 있던 재남에게 말했다.

"좋다! 오늘밤만 지키면 우리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된다고 했지. 있다가 가자."

재남이는 내 말을 기다렸다는 듯이 대답했다. 재남이와 나는 곧바로 전일빌딩 건너편에 있는 광주YMCA로 갔다. 시간은 오후 6시쯤 됐다. 1층 강당에는 우리처럼 자원한 시민들이 200여 명쯤 있었다. (현재 광주 YMCA 1층에는 서점 등이 입주해있고, 2층에 강당이 있다.)
대부분 20대 청년들로 보였고, 나이 지긋한 중년 아저씨도 눈에 띄었다. 재남이와 나처럼 머리를 짧게 한 학생들로 보이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었다.

자원자들이 삼삼오오 강당마루에 앉아 잡담을 하고 있을 때였다. 건장한 체구의 청년이 나타났다. 자원자들에게 모두 한 군데로 모이라고 했다. 그 청년은 175㎝ 정도의 키에 비교적 뚱뚱했고,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으로 보였다.

"죽음을 각오하고 모이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저는 이제부터 여러분을 지휘할 중대장 ○○○입니다. …."

자칭 '시민군 중대장'은 도청사수를 자원한 우리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시작으로 현재 시민군과 계엄군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리고 앞으로 전개될 일들에 대해서도 간단하게 언급했다. 그의 말투로 봐서는 도청에 있는 수습대책위 간부로 보였다. 그는 우리 시민군 자원자들을 9명씩 분대를 편성해서 분대별 임무를 부여했다. 분대장도 선임했다. 분대편성은 임무 부여와 통제하기 좋게 편의상 만들었다. 그러나 소대 편성은 없었다. 분대장은 각 분대에서 연장자나 자원자를 임명했다.

중대장은 우리에게 주소와 성명을 써서 제출하라고 했다. 그는 주소와 성명이 기록된 종이를 보관하고 있어야 혹시 우리들이 죽었을 때 쉽게 신원 확인이 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종이에 주소와 성명을 적어 분대별로 제출했다. 나는 나주의 파출소에서 조사받았을 때처럼 사실대로 적었다.

중대장은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소총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 몇 자루의 칼빈 소총을 가지고 와서 실탄장전과 사격방법 등을 가르쳤다. 나는 학교 교련시간 때 몇 번 총을 만져 본 것이 전부였다. 때문에 총 다루는 법이 서툴렀다. 그래서 열심히 사격방법을 익혔다.

마침내 나는 최단기 군사교육을 '이수하고' 어엿한 시민군이 되었다. 명찰도 계급장도 제복도 없이 그저 광주시민들을 지키기 위해 '자원입대한' 이름 없는 고교생 시민군이 된 것이다.

우리 시민군 자원자들은 소총 사격법을 배운 뒤, 광주YWCA(현재 광주YWCA는 유동으로 이전하고 그 터에 빌딩이 세워져 있음)에서 가져온 김밥과 주먹밥, 빵을 먹고 저녁식사를 해결했다. 광주YWCA는 광주YMCA에서 바라볼 때, 금남로를 가로질러 맞은편에 있는 전일빌딩의 바로 뒤쪽에 있고, 거리는 직선으로 100m 정도 됐다. 당시 광주YWCA에는 여성들이 우리처럼 자원하여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이 회상기를 쓴 임영상은 80년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다. 이후 그는 <광주매일> 기자를 거쳐 행정자치부 장관 정책보좌관과 건설교통부 장관 정책보좌관을 역임했다



#5.18#광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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