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불 좀…"교복 입은 중학생이 김재상(45)씨한테 말을 걸었다. 들고 있던 촛불이 꺼지자, 자신의 초에 불을 붙여 달라는 것. 아빠뻘인데 어려워하는 기색은 없었다. 아내와 중학생 딸, 초등학생 아들과 함께 나온 김재상씨는 "예쁘죠"라는 말로 입을 열었다. "우리도 딸이 제일 먼저 나왔어요. 나보다 낫다니까." 가운데 나 있는 통로를 따라 뒤쪽으로 걸어가니, 김씨처럼 가족이 함께 나온 집이 꽤 많았다.
6・10 촛불대행진에 참가한 사람들은 다양했다. 수녀와 사제들은 끊임없이 카메라 세례를 받았고, 유모차에 탄 아기, 노모 손을 꼭 잡은 아들, 시험 공부하는 대학생, '우리 제자들을 때리지 말라'는 손팻말을 든 전교조 교사들도 눈에 띄었다.
시청 앞 광장 주변에서는 다양한 단체가 선전물을 나눠주고 있었다. 지나가던 사람들이 공기업 민영화 반대 배지를 나눠주기도 전에 집어갔다. 넥타이 부대는 시작하기 30분 전부터 도로 한가운데에 자리를 잡았다. 사회자는 광화문에서 남대문까지 50만명이 모였다고 했다. 함성은 컸지만 잡음은 없었다. 모두가 같은 집회 참가자였다.
김재상씨 가족 옆에 교복을 입은 중학생들이 보였다. '촛불소녀'다. 들고 있는 빨간 바탕 손팻말에 '신문고시', '공기업', '대운하' 같은 말이 쓰여 있다. 신문고시가 뭔지 아느냐고 묻자, 그런 질문을 왜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기자를 쳐다봤다. "저희 다 알아요. 무시하지 마세요."
"왜 나왔어요?"
"우리 문제니까요. 어른들이 안하니까 우리가 하는 거예요."
중학교 3학년인 지수가 또박또박 말했다. 지난달부터 여러 번 촛불집회에 참가했다는 지수는 "이렇게 많이 모인 걸 보니까 좋아요"라고 말하며 주위를 둘러봤다. 안국동 쪽으로 행진한다는 사회자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지수와 친구들이 쓰레기를 치우기 시작했다. 10대들의 '솔선수범'에 김재상씨와 아내, 주위 어른들이 동참했다.
무대 옆으로 빠져나가는 시민들 곁에 오종렬 진보연대 상임대표가 있었다. 그를 알아보거나 신경쓰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오랫동안 '운동'한 그는 이번 시위를 어떻게 볼까. 그는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 심장을 뛰게 하는 감동"이라는 말로 소감을 밝혔다.
'유모차 부대' 평범한 아기 엄마가 앞에 나가 발언했는데 '노(老)운동가' 오 대표에게는 발언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다. 서운하지 않은지 묻자, "민주주의의 새로운 시대가 열리고 있다"고 대답하면서 노운동가는 환하게 웃었다. 그는 한동안 입 벌리고 웃으면서 시위 행렬을 바라보았다.
김재상씨는 아들에게 집회에 대해 설명해 주고 있었다. 아이들이 행진하는 것이 위험하지는 않을까. "에이, 위험하다는 생각 안 해요. 교육적으로 큰 도움 된다고 생각해요. 이런 경험 있는 게 굉장히 다르죠. 이명박이 민주주의 교육시켜 준다니까요."
지수와 친구들은 중앙선에 촛불을 세우고 있었다. "이건 왜요?" "그냥요, 촛불 꺼지지 말라고. 우리 지나가고 아무도 없어도 촛불 타고 있으라구요." 아이들 옆에 촛불을 보태는 중년 남자들. 등에는 '미안하다', 가슴에는 '사랑한다'고 쓰인 천을 붙이고 있었다. '젊은 촛불을 지지하는 87년 6월항쟁 참여자'라고 했다.
"우리가 잘못해서 여기까지 온 거 아니예요? 우리 같은 386 세대들이 나와야지." 따로 단체가 있는 것은 아니지만 10대들의 행동을 보고 자연스레 모이게 됐다고. "그냥 시민의 한 사람"으로 나왔다고 강조하는 그의 표정은 복잡해 보였다. 기자가 보기에는 아이들을 흐뭇하게 바라보면서도 미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것 같았다.
10시 15분. '명박산성'에 막혀 더 이상 갈 수 없었다. 지수와 아이들이 들고 있던 손팻말을 컨테이너에 붙였다. 대운하, 미친 교육, 2MB 포맷 등 구호는 다양했다. '공약, 지킬까봐 겁나는 건 니가 첨이다!!'는 말이 가운데 자리했다. "뭐 상관없어요. 이걸로 막는다고 없던 일이 되는 것도 아니고." 아이들이 그 앞에 동그랗게 앉았다.
앞뒤가 없었다. 위아래도 없었다. 어디가 중심인지 알 수가 없다. 각자 자기 편한 대로, 앉아 있고 서 있고 노래하고, 제멋대로다. '일사불란'한 모습은 찾을 수 없었다. 아까 본 '미안하다, 사랑한다'를 앞뒤에 붙인 오용석(54) 개방과통합정책연구소장은 촛불집회에 몇 번 참가해 10대들의 모습을 본 뒤 아고라 댓글부대로 활동했다.
기성세대가 잘못했기 때문에 10대들이 나서게 된 것이 미안하다면서, "철저히 원자화 · 분자화한 10대들이 촛불을 들고 나섰기 때문에, 잘못한 기성세대도 참여해 하나될 수 있어서 행복"하다고 말했다. "예뻐요"라고 말하며 흐뭇하게 웃는 그의 눈이 반달모양이 됐다. 등 뒤에서 "저 고2입니다"라는 자유발언 소리가 스피커를 통해 퍼졌다. 여기저기서 박수소리와 함성이 들렸다.
시계는 밤 1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젊은 남성 2명이 서로 끌어안고 있었지만, 눈을 흘기는 사람은 없었다. 무지갯빛으로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성소수자에게서 나온다'라고 쓴 팻말이 보였다. '대한민국의 모든 권력은 비정규직에게서 나온다'는 팻말도 있었다.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의 휠체어 행렬이 도착하자 비정규직 팻말을 든 청년들이 달려가 그들을 안았다. 인도에 앉아 있던 시민들도 환호를 보내며 뒤늦은 손님을 환영했다.
그 사이에서 61살 독일 남성을 만날 수 있었다. "신분상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위치에 있으면서 촛불집회에 5번이나 참가한 이유를 묻자 분위기가 좋아서란다. 시위 참여가 10대들에게 나쁘다고 생각하는지 묻자, "Nein, nein, nein, nein"이라며 고개를 젓는다. 한국인 아내가 통역하지 않아도 무슨 뜻인지 알 수 있었다.
'68세대'인 그는 "그때 학생들이 데모하면 시민들이 '니들은 노동수용소에 보내야 돼'라며 욕했는데, 지금은 시민들이 같이 참여한다"며, 10대 참여가 아주 좋다고 말했다. "68세대 자식들이 너무 정치의식이 없어서 애들을 잘못 키웠나 했는데, 90년대 걸프전 때 학생들이 먼저 (거리로) 나갔다"며, 5월 초에 교복 입은 학생들을 보면서 그 아이들을 떠올린 기억도 풀어놓았다. "학생들이 먼저 나가고 그걸 보고 시민들이 동참하는 게, 살아 있는 민주주의의 상징 같대요." 아내가 들떠 있는 그의 말을 전해 주었다.
옆에서는 풍물소리에 맞춰 한바탕 춤판이 벌어지고 있었다. 앞에 서 있던 젊은 여성 2명이 "우리도 함 추까?" 하더니, 머뭇거리지도 않고 섞여 들어가 멋진 춤사위를 뽐냈다.
신명나는 춤판에 구경꾼이 몰려들어 어느새 100명을 훌쩍 넘어섰다. 꽹과리 소리는 흥겨웠고 둘러선 사람들의 어깨는 들썩거렸다. 집회 현장이라기보다는 한바탕 축제의 장이었다.
표현 방식은 달랐지만, 이 축제의 장에서 만난 '어른'들은 10대들에게 '미안하다, 사랑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이진경 서울산업대 교수는 최근 <한겨레21>에 쓴 글에서 대중은 "지금처럼 중고생의 집회로 시작했다면 유쾌하고 가벼운 물결이 될 것"이라고 했다.
지수는 처음 만나는 또래들과 둘러앉아 어색하게 인사를 나누고 있었다. "어른들이 미안하고 고맙다는데 어떻게 생각해요?" "음…" 또박또박 말 잘하던 지수가 처음으로 망설였다. "그런 건 잘 모르겠어요." 수줍게 웃는 모습이 예쁘다.
"언제 갈 거예요?" "음, 지하철 끊기기 전에는 가야죠." 작별인사를 나누고 헤어지는데 고3 학생이 자유발언을 하고 있었다. 등 뒤에서 아이들이 외쳤다. "0교시 진짜 싫어! 미친 교육!"
12시. 시위대는 다시 광화문으로 향했다. 앞서 가던 남자가 중앙선에 놓인 불 꺼진 초에 불을 댕겼다. 광화문 가는 길, 지수와 아이들이 어른들과 함께 세워둔 촛불은 여전히 밝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