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라 마싱, 그 아픈 생애2006년 5월, 내게 한국어를 배우는 한 주부가 뮤지컬에 출연한다며 전단지를 내민 적이 있다. 제목은 <소년이 있어>. 나가사키 원폭을 다룬 작품이었다. 일반시민 100명이 출연하는 이 시민 뮤지컬은 당시 일본 내의 헌법개정 움직임을 우려해 일본의 헌법 9조(전쟁을 하지 않겠다는)를 지키자는 뜻을 담고 있었다.
야마나시현 고후시에서 단 1회의 공연이 예정되었다. 그러나 예상외로 관객이 넘치는 바람에 갑작스레 공연을 2회로 늘려야 했다. 낮과 밤 공연을 합쳐 2600명의 관객을 동원하면서 그 해의 시민 뮤지컬은 성황리에 막을 내렸다.
그로부터 2년, 그녀가 또 다시 내게 전단지를 내밀었다. 이번엔 위안부 문제를 다룬 <로라 마싱 이야기>란 뮤지컬이었다. 전부터 의아했다. 이렇게 좁아터지고 별 볼 일 없어보이는 지방에서 어떻게 일반시민 100명을 모아서 뮤지컬을 할 수 있는지, 그것도 일본 내에서 별 관심을 끌지도 못하는 '헌법 9조' 얘기를 가지고 관객을 동원할 수 있는지 말이다. 더욱이 이번에는 오사카, 도쿄, 고후의 3개 도시에서 12회의 공연을 한다니 더욱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08년 5월 24일 위안부 문제와 관련한 강연과 공개 연습에 참석했다. 필리핀에서 줄곧 로라 마싱을 지원해 온 수잔 마카부아그씨가 강연했다. 출연자들과 참가자들은 위안부 문제와 로라 마싱에 대해 이해를 넓히는 기회를 가졌다.
로라 마싱은 일본군 위안부였던 트마사 사리노그 할머니의 애칭이다. 로라 마싱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를 잃었고, 13세에 눈 앞에서 일본군의 칼에 아버지마저 여읜 후 2년간 일본군에 의해 강제로 위안부가 되었다. 일본군에게서 풀려난 이후엔 결혼을 마다하고 재봉으로 생계를 이었다. 1992년 위안부였던 사실을 세상에 밝힌 후 1993년 도쿄지방재판소에 제소하고, 2000년에는 여성국제전범법정에서 증언했다. 또 2001년에는 여성을 위한 아시아 평화국민기금을 거부하는 등 인간존엄과 정의회복을 위해 일본 정부의 사죄와 보상을 요구해 왔다. 2007년 4월 78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시민 100여 명이 보여주는 열정에 감탄 공개 연습을 처음 본 순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100여 명이라는 수에 놀랐고, 이들이 춤추고, 노래하고, 뛰고, 구르는 연습장 마루가 마치 강도 3정도의 지진이 일어난 듯 출렁거린데 놀랐고, 5세아부터 75세 노인, 외국인, 장애우에 이르는 출연자들의 다양함에 놀랐고, 그 많은 출연자들의 진지한 연기와 열정에 놀랐다. 1월의 공개 오디션 후 매 주말 오전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연습에 땀을 흘려온 결과가 거기 있었다. 드디어 본 공연이 열린 6월 8일, 앞서 상연된 오사카(5회 공연), 도쿄(5회 공연)에 이어 고후에서의 전 2회 공연 또한 만원 사례였다. 전 회 매진으로 400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현재 일본 내에서 별 관심을 끌지못하고 있는 헌법 9조를 지키자는 시민 뮤지컬에 이렇게 관객이 몰리다니, 그것도 어른 2500엔, 어린이 1500엔이나 하는 값을 치르고 말이다.
100여 명의 일반시민을 이끌고 헌법 9조 뮤지컬을 만든 사람은 누구일까? 물론 프로 연출가다. 다나카 노보루[田中暢]. <남자는 괴로워>란 시리즈 영화로 유명한 야마다 요지[山田 洋次] 감독 작품을 다수 연출했고, 1993년부터 사이타마에서 <아이 러브 헌법> 뮤지컬을 10년 넘게 만들어왔다. 지금까지 30편 이상의 연극, 뮤지컬의 각본 과 연출을 해왔다. "우유가 일본군의 정액이라는 데 충격 받아" 지난 6월 1일 마무리 연습으로 바쁜 다나카 감독을 만나 시민 뮤지컬과 헌법, 위안부 문제 등에 관해 얘기를 나눴다. - 연습을 지켜보니 출연자들의 열정과 힘이 느껴진다 "시민이 참가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현 일본사회는 이세대 간의 종적 인간관계가 거의 사라졌다. 주로 동세대 간의 횡적 관계가 주류다. 이 뮤지컬엔 5세부터 75세까지 다양한 사람이 현 내의 여러 지역에서 모였다. 이런 종적 모임은 폭발적 힘을 지닌다." - 어떻게 헌법을 다루는 뮤지컬을 하게 되었나?
"나는 원래 러브 스토리에 관심이 많았다. 그래서 사랑을 테마로 많이 다뤄왔다. 그러던 중 1993년 사이타마의 변호사들이 헌법을 주제로 한 뮤지컬을 만들어 달라고 의뢰를 해왔다. 당시는 이라크에 자위대를 파병하는 문제로 시끄러울 때다. 내가 다수를 출연시키는 연극을 주로 하니까 내게 의뢰를 한 것 같다. 그 때부터 헌법 관련 공부를 하게 되었다."’ - 헌법 뮤지컬의 테마로 위안부 문제를 다루게 된 계기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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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샤카나이 히쯔기 우따>[釈迦内柩唄]라는 연극을 일본어로 공연하러 한국에 갔다. 그 때 극장 로비에서 흰치마 저고리를 입은 위안부 할머니들이 로비에 우유를 뿌리는 거였다. 이해할 수 없어서 왜 그러는지 물었다. 할머니들이 이 우유는 일본군의 정액이라는 것이다. 충격이었다. 그일 후 언젠가는 꼭 위안부 문제를 다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이후 광주에 갔을 때 광주항쟁 당시 사진들을 보았다. 잔혹한 장면들이었다. 오래 전에 일본군이 한국인에게 저질렀던 잔혹 행위를 똑같이 한국인이 한국인에게 저지르는 사진들이었다. 폭력, 잔혹행위는 연쇄를 일으킨다. 어디선가 꼭 끊어야한다는 책임감을 느꼈다."’
-왜 로라 마싱인가?
"2007년 로라 마싱의 사망소식을 들었다. 미국, 캐나다, 네덜란드 등의 의회에서도 위안부 문제 해결을 촉구하는 결의안이 의결되고 있었다. 그런데 일본은 오히려 정부에 책임이 없다는 광고를 <워싱턴 포스트>에 싣는 등 어처구니없는 일을 벌였다. 더 늦출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필리핀을 방문해 로라 마싱을 지원해 온 수잔 마카부아그를 만나 얘기를 듣고 조사를 시작했다."’-어린이들도 다수 출연하는데 위안부 문제가 어렵게 느껴지지 않을까?
"어려울 수도 있지만 아이들은 자기들이 이해할 수 있는 만큼 이해하는 것 같다." -출연자들은 헌법이나 위안부 문제에 평소 관심이 있던 사람들인가?
"반반일 것이다. 이번 뮤지컬엔 2006년 <소년이 있어>에 출연한 사람들이 많이 출연했다. 뮤지컬에 출연하게 된 것을 계기로 관심을 갖게 된 사람들도 많다." -100명의 시민 출연자들이 어떻게 오디션을 하나?
"오디션에선 전원 합격시킨다. 대개 120-130명 정도 뽑는데 5~6개월에 걸친 긴 연습일정이기 때문에 여러가지 이유로 대략 100명 정도가 남게 된다."’ -주연 배우는 전문 배우를 기용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는가?
"로라 마싱은 13세 때 눈 앞에서 아버지가 살해되는 것을 목격했고, 2년간 위안부 생활을 강제당했다. 그녀는 평생을 PTSD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를 안고 살아야한 사람이다. 일반 시민에게 5~6개월 간 PTSD를 겪는 주인공을 연기하라는 건 고문이다. 배겨내질 못할 것이다. 전문배우인 아리마 리에[有馬 理恵]도 두 번 정도 전문의를 만나 상담했다. 물론 연기에 필요한 조언을 듣기 위해서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오사카, 도쿄에 이어 야마나시 공연도 만원 사례다. 이런 활기라면 일본 전국에서 시민 뮤지컬을 해달라는 요청이 오지않을까?
"5월 3일이 일본의 헌법 기념일이다. 그래서 4, 5, 6월에 걸쳐서 공연 일정이 잡힌 것이다. 만약 다른 지역에서도 이 시기에 맞춰서 공연을 기획한다면 동시에 여러 지역에서 시민 뮤지컬을 만든다는 건 불가능하다. 일년 내내 헌법의 날 분위기로 간다면 가능할지도 모르겠지만 말이다."’ -한국에서 상연할 계획은 없나?
"하면 좋겠지만, 한국에선 유명 가수들도 CD 판매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들었다. 그런 상황에서 이런 시민 뮤지컬에 유료 관객이 얼마나 와줄지 모르겠다. 현재 일본에서 이런 시민 뮤지컬에 드는 비용, 수익 등은 전부 입장료 수입으로 충당한다." 감독과의 인터뷰는 점심시간을 끼고 이루어졌다. 감독, 배우, 스태프들이 함께 카레, 주먹밥, 된장국 등을 들고 있었다. 8살, 10살의 두 자녀와 함께 이번 뮤지컬에 출연하는 요시쿠라 히로유키, 구미 부부가 자발적으로 준비해 온 것들이다. 10살인 큰아이가 평화를 위해 꼭 참가하고 싶다고 해 가족이 다 출연하게 되었다고.
이 가족 뿐만아니라 대다수 출연자들은 시민 뮤지컬에 대한 애정과 열정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이들은 프로 감독, 안무가, 작곡가 선생님들에게 지도를 받는 생도이자, 무대에 서는 배우이기도 하고, 뮤지컬을 알리는 홍보요원이며, 입장권을 판매하는 일꾼이기도 했다. 시민 뮤지컬의 성공은 이처럼 자발적 시민의 참여에서 비롯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들과 같은 건전한 양심이 일본 전국으로 퍼져가기 위해서라도 '헌법 9조 시민 뮤지컬'이 날로 발전하길 빌어마지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