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존 매케인이 무명의 새라 페일린(44)을 부통령 후보로 선택했다.
미국 역사상 공화당 부통령 후보에 여성이 선택된 것은 처음이다. 더구나 변방 중에 변방인 알래스카 주지사, 그것도 첫 임기의 2년도 채 채우지 못한 정치 신인이어서 미국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매사추세츠 주지사 미트 롬니, 저명한 연방 상원의원 조 리버만, 초대 국토안보부 장관 톰 릿지, 여성 공화당 정책위 의장 케이 허치슨, 루이지애나의 인도계 최연소 주지사 바비 진달(36) 등 기라성 같은 예상 후보들을 물리치고 '간택'됐다는 점에서 충격을 더했다.
민주당 전당대회가 끝난 직후인 8월 29일(미국 시각) 전격 단행된 매케인의 발표는 오바마에 쏠려 있던 미디어의 관심을 송두리째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전혀 뜻밖의 인물에 준비를 못한 미국 언론들은 매케인의 의도가 무엇인지 파악하느라 여념이 없다.
지금까지 나온 분석 중 가장 유력한 것은 "힐러리를 향했던 여성 표를 공략하려 한다"는 분석이다. 실제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에서 힐러리를 지지한 표는 1800만표에 달한다. 이 중 상당 부분이 여성 표라는 점을 감안할 때 매케인의 전략이 적중한다면 11월 슈퍼화요일의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다. 전통적으로 '강한 미국'을 지향하며 여성 문제에 소홀하던 공화당의 변화를 반기는 무당파들의 지지를 얻을 수도 있는 탁월한 전략이다.
그렇다면 왜 하필 페일린일까? 민주당의 조 바이든의 경우처럼 미 대선에서 부통령 후보는 보통 저명한 연방 상원의원이나 주지사에게 낙점된다. 매케인이 여성을 원했다면 왜 공화당 출신 다른 여성 상원의원이나 주지사를 선택하지 않았을까?
오바마의 '경력 없음'을 공격하던 매케인은 페일린보다 훨씬 정치 경력이 화려한 다른 많은 옵션을 이미 갖고 있었다. 매케인의 '깊은 뜻'은 페일린의 경쟁자들을 하나하나 살펴보면 알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매케인은 '여성 부통령'보다 '방패막이 부통령'을 원한 것 같다.
[케이 허치슨] 탁월한 정치력이 오히려 약점
페일린의 가장 강력한 경쟁자는 아마 연방 상원의원인 케이 허치슨(65)이었을 것이다. 허치슨은 1993년 텍사스 주에서 공화당 상원의원이 된 후 연이은 재선 성공으로 2013년까지 임기가 보장된 상태다. '텍사스 최초의 여성 상원의원'이라는 타이틀에 걸맞게 2006년 선거에서는 민주당 후보를 거의 두배에 가까운 표차로 눌렀다. 현재 미 연방 상원에서 최고참 여성 의원이자 공화당 정책위의장으로 당 서열 4위이다.
알래스카 미인대회 출신의 페일린에 미모로도 뒤지지 않는다. 웬만한 끼와 몸매로는 들어가기 힘든 텍사스 주립대 치어리더 출신이다. 미국 언론들도 매케인의 부통령 후보를 거론할 때 항상 허치슨을 거론하곤 했다.
미국 언론들은 그녀가 최종 낙점을 받을 수 없었던 것은 나이 때문이라고 한다. 72살이라는 자신의 약점을 커버해 줄 수 있는 '젊은 피'를 매케인이 원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보다는 오히려 그녀의 화려한 정치력이 원인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녀는 공화당원이지만 중도 노선을 걸어왔다. 총기 규제, 동성결혼 합법화 등에서는 당론을 따랐지만 낙태 반대에는 골수 당원들의 바람과 달리 적극성을 보이지 않았다. 이것이 그녀가 오랫동안 의원직을 유지할 수 있었던 비결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런 점은 매케인과 너무 흡사했다. '이름만 공화당원'이라 불려온 매케인과 비슷한 점 때문에 허치슨은 공화당내 기독교 보수주의자들 같은 극우파들을 잡기에 부족한 카드였다.
반면 페일린은 다섯 아이의 엄마로 낙태에 극렬히 반대하는 사람이다. 극우파들을 붙잡기에 용이하고 낙태는 여성의 권리라고 보는 여성계의 비난을 대신 받아주기에 더없이 좋은 카드이다.
[올림피아 스노위] "너무 리버럴하다" 평가에 발목 잡혀
언론은 페일린이 여성이기도 하지만 학부모회의(PTA) 회원에 인구 9000여명의 소도시 시장 출신이라는 점이 강점이 됐다고 분석하기도 한다. 매케인이 "보통 사람도 미국의 부통령이 될 수 있다"는 또 하나의 아메리칸 드림으로 표심을 잡으려고 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메인 주 연방 상원의원인 올림피아 스노위(61)에 비하면 페일린의 '보통사람 경력'은 아무것도 아니다.
스노위는 그리스 이민자 출신의 가난한 집 딸로 태어났다. 그녀가 8살 때 어머니가 유방암으로 죽고, 이듬해 아버지도 심장병으로 죽고 만다. 졸지에 고아가 된 스노위는 동생과 떨어진 채 친척집에 맡겨진다. 몇 년 뒤 하나뿐인 동생도 잃고 고학으로 겨우 대학을 졸업한 스노위는 우연히 메인 주 하원의원을 만나 결혼한다.
행복도 잠시, 결혼한 지 5년이 채 안돼 남편이 교통사고로 사망한다. 하지만 이런 불행이 전화위복이 돼 남편의 지역구를 물려받아 주 하원의원이 된 스노위는 이후 승승장구한다. 1983년부터 연방 하원의원을 하면서 만난 새 남편이 메인주 주지사가 되고, 스노위 본인은 1994년부터는 연방 상원의원이 돼 지금까지 이어오고 있다.
어린 시절의 가난과 역경을 이겨낸 스노위는 비교적 무난한 어린 시절을 보낸 페일린보다 매케인의 입맛에 더 맞았을 것이다.
하지만 스노위 역시 "너무 리버럴하다"는 평가가 결정적으로 발목을 잡았다. 스노위는 환경 문제를 중시하고 총기 규제와 낙태에 찬성했다. 1999년 공화당이 사활을 건 클린턴 대통령 탄핵안에 같은 주 같은 당 여성 상원의원 수잔 콜린스와 함께 반대표를 던졌다. 이에 반면 총기 규제에 반대하는 미국 내 최대 이익단체인 총기협회(NRA) 평생회원일 만큼 보수적인 페일린은 매케인의 부족한 부분을 확실히 메워주고 있다.
[엘리자베스 돌] 대통령보다 더 나댈 것 같아서 낙방
노스캐롤라이나 주 연방 상원의원인 엘리자베스 돌(72)의 경력은 페일린은 물론 매케인보다 훨씬 더 화려하다.
하버드 법대 출신으로 1960년대부터 백악관에서 일하며 레이건 정부에서는 교통부 장관을 했고, 아버지 부시 정부에서는 노동부 장관을 했다. 여성으로 두 대통령 밑에서 장관으로 일한 것은 미 역사상 최초의 일이었다. 1996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밥 돌의 아내일 뿐 아니라 본인이 직접 2000년 공화당 대통령 후보 경선에 나서기도 했다. 2003년부터는 고향을 대표하는 연방 상원의원으로 일하고 있다.
그러나 매케인은 이런 돌을 부통령 후보로 지명하지 않았다. 나이 탓도 있지만, 만일 돌이 부통령이 된다면 대통령인 자신을 좌지우지하려 할 거라고 매케인은 판단했을 것이다.
수도 워싱턴 DC에 기반이 약한 애리조나 주 연방 상원의원인 매케인으로서는 자신보다 워싱턴 정계에 발이 더 넓은 돌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미 정치계의 '야생 망아지(maverick)'를 자처하며 인기를 얻은 매케인이 화려한 경력의 돌에게 길들여질 수도 있다. 그렇다면 그가 대통령이 된다고 해도 그가 꿈꾸는 정치를 할 수는 없게 될 것이다.
성에 차지 않는 공화당 여성 주지사들
공화당 출신 여성 상원의원들과 마찬가지로 여성 주지사들 중에도 페일린만큼 매케인 맘에 드는 사람이 없었다.
일단 현 공화당 출신 여성 주지사는 알래스카 주지사인 페일린을 포함해 3명밖에 없다.
하와이 주지사 린다 링글(55)은 하와이 역사상 최초의 유대인이자 공화당 출신 여성 주지사라는 점에서 장점이 있었다. 미국 정·재계를 아우르고 있는 유대인의 지지를 얻을 수 있을 뿐 만 아니라 전통적으로 민주당 우세지역 하와이에서 '공화당 출신 주지사'라는 점이 선전 효과를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두 번의 이혼 경력이 있고 아이도 없을 뿐더러 낙태를 찬성한다는 한계가 있었다. 전통 가족 체제를 중시하는 공화당 극우파들을 잡으려면 의사의 다운증후군 경고에도 불구하고 다섯째 아이를 낳은 페일린 같은 뚝심이 매케인에게는 필요했다.
마찬가지로, 동성커플의 법적 권리를 인정한 코네티컷 주지사 조디 렐(62)은 이들의 지지를 끌어내는 데 큰 결격 사유를 안고 있었다. 매케인이 만일 렐을 부통령 후보로 뽑았다면, 2005년 동성커플에게 입양권, 소득세 감면, 상속권 등을 보장한 '시민결합법'을 발효한 최초의 주지사를 선택했다고 같은 당 내에서 맹공을 받았을 것이다.
1980년 교통사고로 다리를 저는 부인과 강제로 이혼하고 거부의 딸이자 '캘린더 걸(달력에 나오는 모델처럼 예쁜 여자라는 의미이지만 천박하다는 부정적 의미도 내포)' 신디와 재혼했던 경력이 있는 매케인이다. 이들 두 주지사는 매케인에게 치명적일지도 모르는 극우파들의 공격을 막을 만큼 강한 방패가 될 수 없었다.
다섯 아이 출산, 낙태 반대, 총기협회 평생회원... 페일린의 힘
미국 정치는 이미 좌우의 극한 세력이 최고 통수권자가 될 수 있는 단계는 지났다. 많은 정치경제학자들의 분석대로 안정된 사회일수록 중도적인 가치가 인기를 얻을 수밖에 없다.
'리버럴'한 오바마는 이라크전을 찬성했던 조 바이든 상원의원을 부통령 후보로 뽑았다. 마찬가지로 공화당 내 '이단아'였던 매케인은 총기 규제와 낙태에 반대하고, 환경오염을 유발할지도 모르는 미국 연안 석유 시추를 확대하자는 페일린을 선택했다.
매케인은 이를 통해 당내 극우파들의 비판을 면해가려고 한 것 같다. 여성인 페일린을 통해 힐러리의 1800만 사표를 끌어올 수 있다는 것은 매케인에게는 덤에 불과했을 것이다.
오바마의 부인 미쉘과 달리 자신의 부인인 신디에게 철저한 입단속을 시키는 마초 기질이 있는 매케인이다. 대대로 군인 집안에 베트남 전쟁 포로로 국내에서 영웅 대접을 받는 매케인에게는 '또다른 영웅'은 필요 없다. 그저 자신이 하기에 껄끄러운 극우적인 주장을 대신 저돌적으로 해 주고 그에 비례할 비판을 대신 받아줄 인물이면 그만이었을 것이다.
페일린은 8월 29일 부통령 후보 수락 연설에서 "힐러리는 미국에 있는 가장 높고 굳건한 유리 천장(여성에 대한 차별을 상징)에 1800만 개의 금을 냈다"며 "(내가 부통령이 된다면) 우리는 그 천장을 완전히 부숴버릴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했다. 매케인이 페일린이 생각하는 것만큼 포용력이 있는 남자일지 자못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