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1년 1월, 태종은 그리도 염원하던 왕위에 오른 뒤 자신의 부인인 민씨를 중전으로 책봉하는 내용의 책문을 발표했고, 이 책문에서 태종은 원경왕후 민씨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너 정빈 민씨 는 유한(幽閑) 정정(貞靜)하고 성일(誠一) 단장(端莊)하여, 결발(結髮)하여 동뢰(同牢)함으로부터 일찍 의가(宜家)의 덕을 나타내었고, 능히 계책을 결단하여 갑옷을 끌어서 종사(宗社)의 공(功)을 도와 이루었도다. 이에 비도(丕圖)를 잇게 된 것이 또한 내조(內助)에 많이 힘입었다"
말이 어렵긴 하지만, 대충 '태종 자신을 잘 내조했다'라는 내용인데 실록에는 이 책문 아래에
'비가 무인년(1차 왕자의 난)의 위급한 때를 당하여 먼저 군사와 무기등을 갖추어 배치하였으니, 응변의 계책과 나라의 사직을 정하는 일의 공에 내조가 많았다. 뒤에 태종이 고려사를 보다가 우리 전하(세종)에게 이르기를, "너의 어머니의 공이 유씨의 제갑(왕건의 부인이 궁예에 맞서 싸우라 왕건에게 갑옷을 입혀주며 독력하던 일)에 비교하면 더욱 중하다." 하였다.
라는 사관의 글이 덧붙여져 있다.
대단한 칭찬이지만 이후 10여 년이 지난 1411년 9월, 태종은 지신사(임금의 비서장인 도승지를 말함) 김여지를 침소로 불러 들여 주위를 물리치고는 정비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지금 정비가 민무구등의 일 때문에 속으로 불평을 품고 여러 번 불손한 말을 하였다. 지난날에 내가 창병이 몹시 크게 났을 때에 민무구등이 가만히 궁인과 결탁하여 병세를 엿보고, 드디어 이무와 더불어 반역을 음모하였으니, 이것이 실로 민무구 의 죄였다. 정비가 이것을 돌아보지 않고 사사로운 분과 한을 품으니, 내가 폐출하여서 후세를 경계하고자 하나, 조강지처임을 생각하여 차마 갑자기 버리지 못하겠다."
그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걸까? 대체 그 10년 동안 무슨 일이 있었기에 정비의 내조를 입이 마르게 칭찬했던 태종의 입에서 내쫓고 싶었다. 라는 말이 나왔을까?
소박
물론 정비가 쫓겨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김여지는 정비가 정실부인이며 국모인 데다 자손까지 많으니 가볍게 움직일 수 없다며 깊이 생각할 것을 청했고, 태종 역시 애초부터 정비를 쫓아내려고 그런말을 했던 것은 아니었다. 태종이 지신사를 부른 것은 내사, 즉 궁안의 일을 잘 보살필 수 있는 새로운 여자를 들이고 싶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이후 태종은 조정의 중신들을 불러 후궁을 들이는 것에 대해 의논했고, 실제로 이틀 후
후궁을 맞이하는 일을 전담할 가례색을 설치하고 처녀들의 혼인을 금지시켰다. 가례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예조는 역대 왕조의 후궁 제도를 상고해 태종에게 보고했고, 그러한 기록에 덧붙여 사관은 정비의 천성이 투기가 심해 사랑이 아래로 이르지 못했기 때문에 임금이 후궁을 뽑으려 하는 것이라고 말하는데, 글쎄….
태종은 대놓고 내사를 잘 보살필 수 있는 여자를 뽑겠다고 했다. 내사란 원래 중전의 몫이고, 중전의 영역이며, 중전의 손 안에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중전을 왕의 대를 이를 아들이나 낳아주고 그림처럼 앉아 자리만 지키고 앉아있는 사람으로 여기는 부분이 많지만, 왕 못지앉게 중전 역시 해야할 일이 많은 사람이다.
궁에는 왕의 지배를 많은 수많은 사람들이 살며, 오고 간다. 그들은 조정의 중요하고 높은 지위의 관리들을 수도 있지만, 말단 관리일 수도 있고, 궁 구석구석을 청소하는 사람들일 수도, 궁안의 온갖 더럽고 냄새나는 쓰레기들을 치우는 사람들일 수도 있다. 그렇게 무수히 많은 자들이 왕의 지배를 받는다고는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겉으로 표현되는 얘기일 뿐, 만가지의 것이라는 왕의 일에서 자잘하고 드러나지 않는 궁궐의 살림이란 부분은 왕의 손에서 조금 벗어나 있는 것이 사실이고 그 부분을 커버하는 것이 바로 깊은 궁궐에 앉아 있는 모습으로 표현되는 중전이다.
중전은 기본적으로 궁궐 안에 있는 모든 여자들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데 이미 이것부터 작은 일이라고 볼 수가 없다. 가지가 많은 나무에 바람 잘날이 없다는 말이 불변이듯, 궁안의 수많은 여자들과 그들의 일들을 제어하는 것은 어렵고 큰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또한 권력이기도 하다.
내사를 만약 다른이에게 빼앗긴다면 중전은 왕의 다른 여자와 전혀 차별화 되지 않게 될 것이고, 이미 공이 크고 왕자를 여럿 낳은 정비라 해도 그녀의 입지는 좁아질 수밖에 없다. 그런데 태종은 정비가 그 일을 맡기에 적합지 않다며 다른 여자에게 맡기겠다고 하고 있다. 그것은 엄밀히 정비에 대한 소박의 제스처에 다름아닌데, 쫓아내지는 않겠으나 그저 방에 틀어박혀 가만히 있으라 라는 말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얘기가 되겠다. 원경왕후가 질투가 심했고 좀 드센 사람이었다는 얘기는 너무 잘 알려진 것이어서 새삼스럽게 느껴지지도 않는다. 그렇다면 남편의 그러한 행동이 그녀가 당연히 받아야 할만한 댓가인 것일까?
그러나 그녀에 대해 남아있는 얘기란 실상, 남편 태종이 옮기는 얘기가 거의 다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그녀라고 하고 싶은 얘기가 없었겠는가, 태종의 얘기에 대해 아니라고 반박하고 싶지 않았겠는가?
이지직과 전가식
후궁을 들이고자 한다는 태종의 말이 나온지 두 달 정도 흐른 후에 태종은 정식으로 가례를 올려 세 명의 후궁을 들였다. 태종과 정비의 문제는 늘 이런 식으로 풀려가곤 했다. 여자, 여자, 그리고 또 여자.
태종이 여자를 좋아했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 축에도 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이 어느정도나 지나친 수준이었는지에 대해서는 감을 잡는게 쉽지 않은데, 중요한 건 지금의 우리 기준에서 판단하는 것은 자제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선시대에 양반들이 부인 외에 첩을 몇 두는 것은 그리 놀라울 것도 크게 흉될 것도 없는 일이라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다. 일반 백성의 범위에서 초월한 존재인 왕이 그보다 못하랴.
그렇다면 정비가 정말 투기가 심했던 여자라는 게 언뜻 드는 생각이다. 왕이 후궁 좀 두는게 뭐가 그리 큰 일이라고 때마다 난리를 치나? 뭐 그런.
"개나 성색은 나의 좋아하는 바가 아니다."
세종 1년, 상왕으로 물러나 있던 태종이 했던 말이다. 왜 이런 말을 했는지에 대한 당시의 사정은 접어두고 일단 17년 전으로 돌아가보자.
1402년 4월 1일, 사간원의 내서사인 이지직과 좌정언 전가식이 국사를 논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상소문에는 군자를 갖추라거나 요동 등으로 도망했던 배반자들을 받아들이지 말라거나 하는 등의 내용이 들어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따로 있었다.
"전하께서는 의복과 어가가 아름답고 화려한 것을 매우 좋아하여 제도를 따르지 아니하시고, 대간의 말이 어쩌다가 뜻에 거슬리면 엄하게 견책을 가하시며, 매와 개를 좋아하고 성색(음악과 여자)을 즐겨 하심이 아직도 여전하십니다. 이것이 곧 신민들이 실망으로 여기는 것이옵니다."
이지직과 전가식이 온 조정의 질타를 받기 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대간의 말이 어쩌다가 뜻에 거슬리면 엄하게 견책을 가하시며' 라는 말은 틀리지 않는 것이었고, 왕의 비위를 맞추느라 여념이 없던 신하들은 그들을 국문하고 귀양 보내라며 소리높였다.
태종은 이지직과 전가식의 상소를 보고 내가 이미 이와 같으니 무엇을 할 수 있으며, 비록 하고자 하더라도 어찌 어진 임금이 될 수 있겠는가. 라며 상한 마음에 대해 얘기하면서 간관이 말한 과실에 대해 죄를 줄 수 없다고 했지만, 왕의 상한 마음을 달래려 애쓰던 신하들은 거듭 이지직과 전가식의 죄를 청했다. 신하들은 이지직과 전가식이 태종이 행하지 않고 일찍이 듣도 못한 일을 지껄였다고 했고, 한달 정도가 지났을 때 태종은 못이기는 척 국론이 이와 같으니 따르지 않을 수 없겠다며 그들의 죄를 묻게 했다.
국문 과정에서 이지직은 "나는 직언하여 꺼리지 않았을 뿐입니다"라고 말했고, 전가식은 "전하께서는 정실의 자손이 번성한데도 또 권씨를 맞이하시니, 이것은 전하께서 호색의 마음을 가지셨기 때문입니다"라는 진술서를 손수 썼다.
국문을 맡은 자들은 이지직과 전가식에게 뒤에서 사주한 자가 있을 것이라며 바른대로 말하라 했고, 전가식이 여흥부원군 민제에게 가서 자신의 생각을 말했더니 '네 말이 옳다'고 했었다는 말을 털어놓았는데, 민제는 바로 정비, 원경왕후의 아버지다.
민제가 벌을 받거나 하진 않았지만, 이지직과 전가식은 파직의 벌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문제는 끝나는 듯했지만 그렇지가 못했다. 후에 관직에 나와 일을 하면서도 이지직과 전가식은 이미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상태였다. 태종은 그들을 괘씸해하고 있었고, 그 외에 다른 관리들 또한 그랬다.
태종은 14년이 지난 1416년에 풍문공사, 즉 소문을 듣고 그 사실을 조사하던 일에 대해 말하면서 반드시 이지직처럼 임금의 허물을 드러내 퍼뜨린 뒤에야 언관의 직책을 다하는 것이 아니라며 아직 앙금이 쌓여 있다는 것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는데, 앞서 세종 1년의 개나 성색을 좋아하지 않는 다는 말은 그런 사연이 있는 것이었다.
세종이 즉위한 후에도 이지직과 전가식은 민제의 사주를 받아서 왕의 없는 과실을 들어 거짓말로 상소했다며 그들의 죄를 청하는 대간들 때문에 또 한번 고신을 빼앗기고 서인으로 폐해지는 벌을 받는다. 나중에 세종 22년 1440년이 되어서 세종은 이지직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지직이 오랫동안 서용되지 못하였는데, 사람들은 모두 극간한 때문이라고 하지만, 사실은 외임을 사면하였던 때문이다." 라고.
세종은 이지직등이 태종에게 상소를 올렸기 때문에 그들이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외직을 사임했기 때문에 쓰임을 받지 못한 것이라 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거의 40여 년 동안 그들에 대해, 그들의 처지가 곤궁해 진것이 감히 태종이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말을 했기 때문이라는 말이 돌고 있었다는 사실을 세종이 명백히 증명했다는 것이다.
강한 부정은 강한 긍정이라고도 했다. 그렇게 긴 세월을 부정하고 또 부정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에는 결코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증거가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태종 2년(1402년) 3월 7일
"정비는 마음에 병을 얻었고, 임금은 수일 동안 정사를 듣지 아니하였다."
나를 잊다
때는 태종이 이지직과 전가식의 상소를 받아보기 한달전쯤이었다. 태종이 성균 악정 권홍의 딸을 후궁을 맞아들였다는 기록이 나온다. 그 기록과 더불어 대부인 송씨(정비의 어머니)가 딸에게 태종의 여자가 너무 많은 것 같아 두렵다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언급되고,
그래서인지 어째서인지 정비의 투기가 점점 심해만 갔다고 덧붙여지고 있는데, 왕이 권씨를 예를 갖추어 맞아들이려(결혼식을 치룬다는) 하자 정비는 태종의 옷을 붙잡고,
"상감께서는 어찌하여 예전의 뜻을 잊으셨습니까? 제가 상감과 더불어 함께 어려움을 지키고 같이 화란을 겪어 국가를 차지하였사온데, 이제 나를 잊음이 어찌 여기에 이르셨습까?"
라며 울기를 그치지 않고 먹지도 않았다고 한다. 태종은 결국 정식으로 결혼식을 치룰 것을 포기하지만, 수일동안 일을 하지 않았고 정비 또한 마음에 병을 얻었다.라고 사관은 기록하고 있다. 이지직과 전가식이 상소에서 언급한 권씨가 바로 이 권홍의 딸을 말하고, 그녀를 의빈 권씨라 한다.
사관은 '정비를 투기가 심하다'라고 했고, 동시에 '마음에 병을 얻었다'라고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투기가 그녀의 마음을 병으로 물들인것이 아니다. 그녀의 마음은 태종으로 인해 병들었다. 태종의 행동, 태종의 말, 태종의 마음들 때문에.
분명 정비의 어머니 송씨는 '왕이 여자가 너무 많다'라고 했다. 정비는 태종이 고작(?) 권씨 한 명을 들이려고 하는 것에 반발한 것이 아니라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졌기 때문에 남편의 옷을 붙잡은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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