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산층이었다가 철거민으로 죽은 사람들
한 때는 '중산층'에 속하는 어엿한 사장님이었지만, 순식간에 거리로 내몰리게 된 사람들이 있었다. 이들은 턱없이 낮은 철거 보상기준을 받아들일 수 없었기에 저항했다. 그러나 그들의 성난 목소리에 대해 국가는 용역업체와 특공대를 보냄으로써 화답했다.
그 날 용산에서 철거민들은 재산권과 생명권 등의 어떠한 개인적 권리나 법적 보호로부터도 배제되어 있었다. 다시 말해 조기진압을 지시 받은 특공대와 용역업체 직원에게는 모든 것이 '합법적으로' 가능한 새벽이었다.
유독가스와 몽둥이 사이의 퇴로 없는 옥상에서 그들이 호소할 것은 대한민국의 현행법과 국민으로서의 권리가 아니라 용역업체 직원들과 경찰들에게 인간으로서 남아 있을 선의뿐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누군가의 명령에 쫓겼을 그들마저 철거민들에게 너그럽지 않았다. 여섯 명이 유명을 달리했다.
용산에서 벌어진 참사에 대해 우리가 물을 것은 어떻게 국민의 기본권을 보호해야 할 국가가 철거민들의 생명권마저 무시한 잔혹한 진압작전을 수행할 수 있었는가 하는 순진한 질문이 아니다(정도의 차이가 있었지만 언제나 국가는 자신에게 반대하는 사람의 권리에 대해 무관심했다).
오히려 우리는 국가가 어떻게 이들의 권리를 합법적으로 박탈할 수 있었는지, 그들에게 자행된 어떠한 철거계획이나 진압작전도 위법이 아닌 것처럼 보이게 만들었는지를 주의 깊게 생각해봐야 한다. 그래야만 사법부의 판단에 이상하리만치 자신감을 보이는 여당과 청와대도 이해할 수 있고 새로운 저항의 전략도 제대로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게 이명박 때문이다'라고 말하기는 쉽다. 하지만 (빈곤층뿐만 아니라) 멀쩡하게 잘 지내던 중산층 국민이 순식간에 '합법적으로' 자신의 권리를 박탈당하고 법 질서와 기본 권리 바깥으로 내몰릴 수 있다면, 그 상황이 훨씬 깊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으며, 따라서 우리 모두 잠재적으로는 철거민과 같은 처지에 있다면, 어찌 하겠는가? 여기서 우리는 조르조 아감벤을 참조할 필요가 있다.
누구나 잠재적인 철거민이 될 수 있는 호모 사케르의 시대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라는 책을 통해 근대 주권정치의 핵심이 사회 전체의 '수용소'화에 있다고 주장한다. 잘 알려지다시피 수용소에서는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강간, 고문, 생체실험, 가스실 등등). 전쟁 승리나 테러범 체포, 국민 개량과 국가 발전 등 주권의 갖가지 명분에 의해 모든 권리와 질서가 그곳에서 눈을 감기 때문이다.
수용소를 닮은 근대 주권권력 하에서 모든 시민들은 기본 권리와 질서에서 배제될 수 있다. 살해될 수는 있지만 제물로 바쳐질 수는 없는 고대 로마법의 '호모 사케르(homo sacer)'처럼 말이다 (신조차도 호모 사케르를 제물로 받지 않으며, 호모 사케르의 살해범은 심지어 처벌 받지도 않는다. 용산의 경찰에게 살인죄가 성립되지 않는 것처럼).
아감벤에 따르면 문제는 근대 국가의 토대가 자유롭고 자각적인 정치적 주체로서의 인간이 아니라 인간의 벌거벗은 생명, 인간이 국가에서 태어났다는 단순한 사실을 강조하는 데 있다. 근대 국가에서 국민이 질서에 속하고 권리를 보장받는 근거는 나치가 그토록 강조하던 '피(혈통)와 대지(출생지)'에 다름 아니다. 혈통과 출생지를 충족한 국민은 천부인권을 가지고 있고, 국가는 그것을 보장하는 것을 의무로 한다는 것이다.
죽이고 싶은 자를 죽일 때만 생명에 개입하는 것이 왕권 시대의 권력이었다면, 근대 주권권력은 생명 자체를 정치의 주된 주제로 삼는다. 따라서 아감벤에 따르면 근대정치는 '생명정치(bio politics)'다. 이는 요람에서 무덤까지를 보장하는 복지 국가나, 우생학을 들고 와 인간 개량을 추구하던 나치나 마찬가지다.
그러나 모든 근대 국가가 국민의 생명을 보살피는 것을 의무로 한다는 것은 바꿔 말하면, 그가 국민이 아니면 보호 받지 못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여기서 생명정치는 죽음정치로 전환된다고 아감벤은 말한다.
대단히 평범하고 일반적인 시민조차 난민, 혹은 불법 체류자처럼 법 질서의 바깥으로 내몰릴 수 있다는데 근대 생명정치의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근대 국가의 헌법들이 대부분 비상사태나 공익 추구 등의 사유로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할 수 있다는 조항을 두고 있음을 보라.
이 조항의 존재는 주권권력이 누가 자신이 보호해야 할 국민인지를 끊임없이 판단할 수 있는 힘이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 잠재적으로 모든 시민들은 질서나 사회를 위한다는 명분으로 그 질서의 바깥으로 내쫓길 수 있는 것이다.
왜 선거를 통해 선출된 대통령이 콧수염 독재자를 닮아가는가?아감벤은 근대 주권권력이 질서와 권리가 정지되는 예외상태를 합법화하고 법제화하려는 경향을 갖는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예외상태가 법이 되면 시민들의 벌거벗은 삶은 주권권력과 직접 대면한다. 용산의 철거민들이 그들을 보호해줄 아무런 법의 매개 없이 권력기구의 몽둥이와 컨테이너를 맞닥뜨린 것처럼 말이다.
주권권력이 직접 벌거벗은 생명과 만나는 이상 주권자의 말은 곧 법이 된다. 이 대통령의 말이 입법부와 사법부를 쥐고 흔드는 것을 보라. 근대 주권권력은 이렇게 모든 시민을 호모 사케르로 만드는 생명정치(혹은 죽음정치)의 완성을 향해 달려간다. 물론 그것을 극단적으로 완성시키려 했던 것은 나치다.
그렇다면 아감벤을 통해 우리는 왜 이명박 정권이 사이버모욕죄나 집시법 같은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는 '예외상태'적 법 제정에 집착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선거에 의한 2번째 평화적인 정권교체라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괄목할 만한 발전이 왜 용산 참사나 쇠고기 파동, 미네르바 사태를 낳았는지도.
이명박 정권의 문제가 민주주의나 법치주의의 퇴보라는 단순한 문제가 아닌 근대 정치의 근본적인 문제라는 것도. 무시무시한 경찰국가의 도래와 함께 민주주의와 전체주의가 닮아가는 이 곳에서 아감벤은 '생명정치'라는 근대 정치의 패러다임 자체에 도전하라고 말한다. 비록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그가 대답하고 있지 않더라도.
조르조 아감벤은 '호모 사케르' 연작으로 스타덤에 오른 이탈리아의 미학자, 철학자다. 국내 독자들에게는 2008년 출간된 <호모 사케르>가 처음으로 완역되어 소개된 그의 저작이다.
인기(?)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이 관타나모의 수감자들을 '호모 사케르'라는 그의 개념을 통해 분석하면서 국내 일반 독자들에게도 그 존재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전체주의와 민주주의가 같은 길로 가고 있지 않은가'라는 이제는 조금 식상한 주제를 '수용소'와 '호모 사케르'라는 개념을 통해 독창적으로 분석해 각광받았다.
너무 과장되고 비관적인 전망을 하고 있다며 '우울한 사상가'로 폄하되기도 한다(우리 모두가 잠재적인 호모 사케르라니 어찌 우울하지 않겠는가?).
작년말 <남겨진 시간>이라는 또 다른 저서가 번역 출간되기도 했다. 인터뷰나 생애에 대한 조명 같은 것들이 드물 뿐더러 국내에 소개된 적이 별로 없기 때문에 번역된 두 권의 저작이 그의 사상에 접근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통로다.
1924년 로마 태생으로 로마 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했고, 시몬느 베이유의 정치사상을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고 출판사는 소개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