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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국판 나비효과

2004년 11월에 개봉된 '나비효과(The Butterfly Effect, 2004)'라는 당시 대중들에게 꽤 인기가 있었던 SF영화가 있다. 영화는 후회스런 과거를 되돌리려는 주인공의 처절한 모습을 다루고 있다. 그러나 과거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심각한 육체적, 정신적 고통이 뒤따른다. 시간을 되돌리려는 노력을 거듭할수록 그 가역성의 크기만큼이나 많은 피를 쏟아내며 쓰러지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영화 나비효과의 영화속 장면 그리고 촛불의 모습은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 영화인가 현실인가? 영화 나비효과의 영화속 장면 그리고 촛불의 모습은 놀랍도록 닮아있었다.
ⓒ 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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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소개한 이유는 지금 우리의 모습이 영화 속 주인공과 정확히 오버랩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민주주의의 후퇴를 목도하면서 독재를 벗어나 적어도 형식적 민주주의와 법치가 살아있던 시간으로 돌아가고자 한다. 그러나 우리의 잘못된 선택과 이미 지나가버린 시간의 힘은 그것을 쉬이 허락하지 않는 듯 하다.

지난 대선 우리는 욕망에 투표했고 그 결과는 독화살이 되어 돌아오고 있다.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영화 나비효과는 작은 초기조건의 변화로 다양한 가능태를 구성하는 플롯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나비효과를 가능하게 할 조건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 영화 나비효과 “나비의 날갯짓이 지구 반대편에서 태풍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영화 나비효과는 작은 초기조건의 변화로 다양한 가능태를 구성하는 플롯을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나비효과를 가능하게 할 조건은 무엇이 될 수 있을까?
ⓒ 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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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무현 정부의 임기가 끝나가자 살기 힘들다며 울부짖던 우리들은 개도국 수준의 성장률과 더욱 두둑해진 지갑을 꿈꾸며 욕망에 투표했다. 그러나 우리에게 돌아온 것은 다름 아닌 곤봉과 물대포 였으며 설상가상으로 울부짖던 사람들은 공안정국 아래 그 울부짖음마저 차단당하고 있다.

자유민주주의의 기본원리인 집회와 청원의 자유는 자취를 감추었으며, 우리의 메일함은 더 이상 프라이버시권을 보장 받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G.T. 마룩스는" 컴퓨터 기술을 사용하여 전체주의적인 통제의 마지막 장벽의 하나가 부서지는 상황에 이르면 감시사회는 도래한다"고 하였다. 미네르바가 석방되었을 때 언론들은 '표현의 자유'가 승리했다고 하였지만 실질적으로 승리한 쪽은 정부임에 틀림없는 것이다.

인터넷 논객의 상징이었던 미네르바의 구속 장면(지금도 그가 진짜 미네르바라고 생각하지 않는다)은 전파를 타고 전국의 네티즌들에게는 외상 후 스트레스장애를 남길 법한 큰 충격을 가져다주었고, 그 후 네티즌들이 인터넷에 글을 올릴 때, 뇌리에 박힌 그의 구속 장면은-석방과는 무관하게- 재 경험(대리경험)됨과 동시에 자기검열의 기제로 작동될 것이기 때문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살려내라 !

우리는 국민이 화를 내면 귀를 기울일 줄 알았으며, 상식과 대화가 통하는 대통령을 가진 적이 있었다. 그 대통령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우리의 가슴속에 함께하고 있다. 故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한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나가 버렸다. 지식인들은 노무현을 끝까지 떠나보내지 않으려던 노란 물결을 분석하는데 분주했으며 극우논객들은 그를 향한 비상식적인 발언으로 일관했지만 그를 향한 추모 열기는 끊이지 않고 있다. 그렇게 MB정부의 강공드라이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노무현의  가치를 새삼 깨달아 가고 있는 중이다.

美헐리웃 영화 M*B에 등장하는 기억을 지우는 장치 neuralyzer. 이것이 실재한다면 청와대는 158만원짜리 커피메이커를 재쳐두고 비품 1순위로 구입하지 않았을까?
▲ 기억을 지우는 장치 M*B neuralyzer 美헐리웃 영화 M*B에 등장하는 기억을 지우는 장치 neuralyzer. 이것이 실재한다면 청와대는 158만원짜리 커피메이커를 재쳐두고 비품 1순위로 구입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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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반MB정서와 추모의 열기가 그에 대한 정확한 평가에 장애가 되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를 하루 빨리 잊어버리자는 것이 아니다. 그가 남긴 업적을 냉철하게 분석하고 평가하는 일은 추모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며 그것이 그가 남겼던 업적과 메시지를 승화시킬 수 있는 발판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를 향한 추모는 어느 누구의 말처럼 3년 상도 좋고 30년 상도 좋다. 국민들이 하루라도 빨리 그를 잊어버리기를 소망(?)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더욱 더 잊지 않을 것이다.

그를 넘어서야 하는 이유
우리의 어깨가 무거워진 이유

인정하기 싫겠지만 노무현 전 대통령은 건강한 소통이 가능했던 (우파) 대통령은 될 수 있겠지만 '서민' 대통령으로 불리는 건 조금 무리가 있다고 판단된다. 전임 대통령이 임기를 마치고 낙향하여 농사를 짓고, 말쑥한 양복이 아닌 촌부의 옷을 입는다 하여 '서민' 대통령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반이명박 정서와 더불어 이전의 군사주의와 권위주의 정권에 핍박받던 경험이 있기에, 상식이 통하고 개혁성향을 가진 탈권위적이었던 노무현 대통령을 그렇게 생각하고 싶었을지 모르겠지만, 엄격한 정책적 시각에서 바라보았을 때 노무현 전 대통령을 '서민' 대통령으로 부르는 것은 그동안 우리의 삶이 얼마나 억눌리고 짓눌린 삶을 살아왔는가를 느낄 수 있는 애절한 소망이 담긴 표현 정도로 정의하고자 한다.

그가 '서민' 대통령이 될 수 없음을 이렇게 조금은 불편한 문장을 통해 언급하는 이유는 우리의 노무현을 다시 살려내기 위해서는 그가 남긴 여러 업적들 중 옥석을 가려내고, 우리가 계승해야할 가치 지향점을 명확히 설정해 놓아야 하기 때문이다.

참여정부의 여집합 그리고 현 정권과의 교집합

참여정부는 세계화라는 근대적 문제와 과거사 정리라는 근대적 문제를 동시에 풀려고 노력했다. 그것은 - 감히 수구정권은 태생적으로 실행에 옮길 수 없는- 근대와 전근대의 문제가 동시에 산재해 있는 한국사회의 문제점을 해결하려는 개혁의 의지였을 것이다.

참여정부의 여집합을 살펴보면 근대 한국의 일그러진 과거사 문제와 관련된 역사인식, 대북 화해 협력정책, 탈권위라고 정의하고 싶다. MB정부와 참여정부 사이에 존재하는 교집합의 존재는 불행하게도 우리의 현실이다.

MB정부 그리고 이명박에 대한 해석은 전국민이 2MB의 심리와 철학(?), 과거의 행적, 앞으로의 전망에 대한 지식과 집중탐구가 석박사 수준에 이르렀다고 생각하고 생략하고 넘어가려고 한다. 결론적으로 두 대통령의 정책을 종합해보면 '신자유주의'라는 교집합이 자리 잡고 있다.

07년 11월 노동자대회- 시청 앞 광장에 물대포가 시민을 향해 서있다.
▲ 07년 11월 노동자대회에 등장한 물대포가 시민을 향해있다. 07년 11월 노동자대회- 시청 앞 광장에 물대포가 시민을 향해 서있다.
ⓒ 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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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칭 좌파정부였던 국민-참여정부시절 10년 동안 경제정책은 큰 어려움 없이 신자유주의정책으로 수렴되었으며, 정리해고법과 비정규직법이 통과되었고 당시 파업의 대다수가 불법파업으로 간주되어 수구 언론의 뭇매를 맞고 경찰의 물리력으로 진압되기가 부지기수였다. 서민들을 위한 복지정책을 내놓았다고 하지만 구색을 갖추는데 그쳤을 뿐 허술한 복지정책은 현 정권의 복지정책과 큰 차이점을 찾아 볼 수가 없음은 물론이다. 결국 서민들과 노동자들은 2등 시민화 되어가던 국민없는 국민의 정부였고, 참여없는 참여정부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방 토호와 토건 세력의 유착, 토건국가의 원조격인 일본을 능가하는 하이퍼 토건 국가형 발전전략은 한국의 성장동력을 의심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정리하자면-소위 먹고사는 문제-경제 정책에 있어서만큼은 이명박 정권과의 큰 차이점을 찾을 수가 없는 것이다. 다만 참여정부는 현 정권에 비해 그 강도가 약하고 사회 약자를 위한 구색이라도 맞추려고 시도했다는 점이 차이라면 차이일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을 넘어서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는 인권변호사 노무현, 민주주의의 투사 노무현, 탈권위 노무현, 사람 사는 세상을 희망했던 바보 노무현의 가치는 반드시 이어가야 할 것이다.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김영삼의 뜻을 거르고 3당 합당에 반대했던 노무현의 가치는 지금도 유효하다.
▲ 3당 합당에 반대하는 노무현 자신의 정치적 스승이었던 김영삼의 뜻을 거르고 3당 합당에 반대했던 노무현의 가치는 지금도 유효하다.
ⓒ 김동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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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우파 신자유주의-대통령 노무현은 우리가 넘어야 할 쉽지 않은 과제로 남게되었음을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대통령으로서의 노무현을 넘지 못한다면 제2, 제3의 2MB은 언제든 탄생할 수 있음을 알아야 한다.

포스트 민주주의를 위해서는 대통령 노무현 넘을 수 있어야...

파시즘은 무엇으로 먹고 사는가? 바로 국민들의 생계불안과 무관심 그리고 끊임없는 욕망을 자양분으로 한다. 신자유주의는 파시즘이라는 씨앗의 발아를 위한 쾌적한(?) 환경조성을 위한 적절한 정책임이 분명하다. 한국의 비정규직 비율이 전체 인구의 절반에 조금 모자라는 수치로 달려가고 있는 상황에서(OECD 1위) 생계불안과 그에 따르는 정치적 무관심은 불보듯 뻔하며 황폐해지고 결핍된 삶은 또다시 욕망에 투표하는 동인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불과 2년도 채 되지 않아 절차적 민주주의가 일순간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는 광경을 목격했다. 바보 노무현을 기억하고 진정으로 그를 넘을 수 있을 때 우리는 포스트 민주주의의 도래를 맞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바보 노무현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 노무현 전 대통령과 손녀의 모습 바보 노무현 당신을 영원히 잊지 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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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란 관심을 기울이는 것"이라는 말이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완성하지 못한 참여정부의 '참여' 정신과  인간 노무현이 꿈꾸었던 '사람 사는 세상'은 이제 우리가 완성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보 노무현'을 기억하고 '대통령 노무현'을 뛰어 넘을 수 있어야 하지 않을까?


태그:#우파신자유주의, #노무현, #나비효과, #이명박, #비정규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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