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그만 아쉬움은 있었을지언정 그럴 듯한 과정과 맺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SBS 드라마 <시티홀>은 첫 방송이 나가던 날 스스로의 기획의도를 고스란히 거스른다. 김은숙-신우철 콤비의 로맨틱 코미디로 사람사는 이야기지 정치만 하는 드라마가 아니라고 거듭 주장하던 <시티홀>. 하지만 1회 방송이 재보선 선거날과 겹치면서 선거 결과를 자막으로 내보내야만 했다.
욕먹는 게 싫어서 거수 투표에 참여하지 않은 미래(김선아 분)의 뻔뻔한 표정 아래로 '지옥의 가장 뜨거운 자리는 정치적 격변기에 중립을 지킨자를 위해 마련되어 있다'는 단테의 말이 화면에서 사라지기가 무섭게, 민심은 한나라당에 '5대0'을 안겼다. 게다가 극중 새순처럼 곱고 선한 새내기 정치인 미래가 외압으로 어려움을 겪는 시점에서 전직 대통령의 투신 자살이라는 어마어마한 사건이 터졌다. 또, 전여옥 한나라당 의원이 이 드라마를 '다운받아' 보았다며 '노무현과 신미래는 전혀 다르다'고 주장하면서 <시티홀>은 제작진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방향에서 주목을 받게 된다.
시커먼 속내를 지닌 야심가이자 전도유망한 정치인인 조국(차승원 분)이 촌구석 시청에 부시장으로 부임하면서 이야기는 시작하는데, 사실 멜로 라인은 매우 단순하다. 조국은 '나한테 이런 여자 니가 처음이야'라는 전형적인 공식에 따라 미래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미래는 '당연히' 잘생기고 잘난 남자 조국을 좋아한다. 처음엔 티격태격 다투다가 어떤 계기로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고 미래는 조국으로 인해 조국은 미래로 인해 좋은 방향으로 변해간다.
오히려 이 드라마의 신선함은 코믹 연기에 둘째가라면 서러울 두 배우가 멜로를 연기했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등장인물의 대부분이 '정치하는 사람들'이라는 데에 있다. 사랑도 갈등도 화해도 모두 정치적 이념의 차이에서 기인한다. 가족도 연인도 그 누구도 갈라놓을 수 있다는 이 정치적 이념이라는 놈이 이 드라마의 주인공인 셈이다.
10급 공무원이자 노처녀인 신미래는 나도 될 수 있고 내 친구 언니가 될 수도 있는 넓은 포용력을 가진 캐릭터다. 맨날 쥐어뜯고 싸우는 정치인들에게 전혀 관심도 흥미도 없던 그녀가 시장 선거에 나가 시장이 되고, 회사 연혁이 한국 근대사라는 대그룹과 BB에 맞서 싸운다. 애인이 대선 후보인 건 그녀가 시장이 된 것에 비하면 오히려 평범한 스펙이다.
이런 의미에서 <시티홀>은 제5공화국 같은 엄숙한 정치 드라마보다도 훨씬 대중에게 가 닿는다. 애초에 잘나게 태어나 잘나게 사는 애들의 잘난 세상 이야기는 나랑 별로 상관이 없다. 나와 비슷한 혹은 비슷한 것 같은 누군가의 정치 입문기야말로 흡사 내 이야기처럼 살갗에 스며오는 것이다. '정치가 나와 멀지 않구나'라는 생각을 할 수 있게 한 것으로 <시티홀>은 제 역할 이상을 했다 할 수도 있겠다.
정치는 마음만 가지고 해서도, 돈과 머리만 가지고 해서도 안된다. 마음 돈 머리 힘 다 있어야 한다. 그러나 대한민국에선 실로 조국이 말한 것 처럼 돈과 머리와 힘만 있으면 정치 할 수 있다. 아니 머리 빼고 돈이랑 힘만 있으면 정치들을 한다. 마음을 가진 정치인은 적어도 이 나라에선 살아남지 못하더라. 그래서 <시티홀>은 판타지인 동시에 처절하게 현실적이다.
인주시라는 가상의 공간에 대한민국의 현실을 적절히 비틀어 끌어넣으면서 남얘기 하는 척 우리네 얘기를 풀어놓은 작가 김은숙은 이번 드라마로 몇 단계 레벨업한 듯 하다. 그녀 스스로도 일생의 역작이라고 평할 만큼 많은 공을 들인 이야기라는 것이 한 회 한 회 느껴졌다. 그에 더해, 연설전문배우로 거듭난 차승원과 이런 시장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싶게 만들었던 김선아의 호연에 힘입어 김은숙은 '로맨틱 코미디는 참 잘한다'는 다소 그늘진 찬사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티켓투더문'을 갖게 되었다(티켓투더문 - 전작 '온에어'에서 자신의 모습을 투영했던 극중 인물인 드라마 작가 서영은이 처음으로 시청률을 따지지 않고 쓴 착한 드라마. 김은숙은 인터뷰에서 '서영은에게 티켓투더문이 있다면 자신에겐 시티홀이 있다'고 말한 바 있다).
아쉬운 점은 물론 있다. 풀고 싶은 것 만큼을 다 풀지 못한 느낌이다. 좀 더 하고 싶은 말이 있는 것 같고, 조국과 미래를 통해 더 보여주고 싶은 게 있는 것 같다. 벌여놓은 이야기를 모두 완벽히 수습하진 못했다. 악역들의 체념이 급작스러웠고 멜로의 타이밍이 이미 구축된 캐릭터의 성격들에 비해 좀 빨랐다. 정치를 다루되 날카롭진 않았다. 정치와 멜로 둘 다, 모두가 부담스럽지 않게 딱 좋은, 거기까지였다.
긴 여름밤, 볼 만한 미드도 안 남았고 애인도 없어 방바닥에 딱 붙어 어영부영 하시는 분들은 이 청량한 드라마를 한 번쯤 보시길 권한다. 2009년 상반기의 몇 안되는 수작이라 할 만 하다. 걸출한 두 배우의 명연기, 쉽게 잘 짜여진 정치판, 거기에 고유의 감성이 돋보이는 작가 특유의 명대사들은 덤이다. 총선에 기호 5번 무소속으로 출마한 조국의 연설은 다시 봐도 짜릿하다. 말만 앞서는 듣보잡이 아니라는 확신이 있다면 그런 연설에 한 표를 던지지 않을 유권자가 어디 있을까.
부작용도 있다. 이 드라마는 너무너무 투표를 하고 싶게 만드는 동시에 너무너무 연애를 하고 싶게 만들기도 한다. 드라마를 보고 나서 다음 선거엔 꼭 애인 손 잡고 투표하러 가야겠다는 결론을 내린다면 당신은 진정, '올곧은' 대인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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