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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숫가 정경
▲ '백조의 호수 II' 호숫가 정경
ⓒ 조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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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 호수'는 클래식 발레의 대명사다. 그런 '백조의 호수'를 조기숙(이화여대 무용과 발레 전공) 교수는 한없이 비튼다. 정형화된 '백조의 호수' 주인공들을 현재의 한국적 상황에 대입시켜 마음대로 바꾸어 설정하고 발레를 빌려 한국적 자본주의의 천박함을 풍자한다. 무대 위에서 피아노와 오보에의 생음악이 연주되는 가하면 카메오 출연을 한 대기업의 CEO들이 실제로 포도주를 마시고 공연 중간에 CEO 한 명은 육성으로 테너를 뽑는다. 공연 사이사이 메시지를 담은 영상들이 등장한다.

소극장의 작은 작품인 '댄스 댄스 타이쿤(Dance Dance Tycoon)'에선 발레리나들이 천장에서 줄을 타고 내려오고 우리나라에선 요즘 비로소 알려지기 시작한 자전거 묘기 스포츠라 할 '익스트림 바이크(Extreme Bike)'가 등장한다. 힙합문화의 주류를 이루는 비보잉, 팝핀, 디제이, 비트박스와 어울려 발레리나들이 춤을 춘다. 고급정통예술인 발레와 거리나 뒷골목의 예술인 힙합의 접목이자 혼성이다.

오늘날 하고많은 춤이 있지만 서양의 가장 대표격인 춤이라면 역시 발레다. 17세기 어느 날, 태양왕 루이 14세가 무용수로서 발레를 직접 춘 이래 오늘날까지 발레는 서양무용에서 지존의 자리를 차지해 왔다. 그러한 전통 까닭에 한 나라에 발레단이 있느냐 없느냐, 몇 개 있느냐가 국력을 나타내는 척도가 되기도 한다. 축구단은 어느 나라에나 있지만 발레단은 없는 나라가 많다.

"춤도 배워서 추나"라는 말이 있듯이 누구나 춤을 출 수 있다. 또한 정형화된 춤들도 조금만 배우면 따라 추거나 흉내 낼 수 있다. 춤에 재능이 있으면 어떤 춤들은 약간의 연습으로 전문가 이상으로 출 수가 있다. 그러나 발레는 그렇지 않다. 발레는 제대로 추려면 긴 기간 힘든 수련 과정이 필요하다. 또한 그 태생의 역사에서 알 수 있듯이 발레는 화려한 대작(大作) 중심으로 발전되어 왔다. 그런 연유로 발레는 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없는 고급예술이 되었고 일반 대중과는 유리된 채로 존재해 왔다.

조기숙은 이와 같은 발레의 비대중성에 반기를 든다. '뉴 발레'의 기치를 앞세우고 이 시대의 한국적 발레를 모색하고 있다. 그녀는 "누구나가 발레를 즐길 수는 없을까", "오늘 이 시점에서 한국의 발레는 어떤 얼굴을 가져야 하는가"라는 의문을 던지며 발레와 함께 대중에게 다가가고 있다. 춤 전공자로는 드물게 대학 시절 민주화운동에 앞장섰던 그녀는 이제 발레에서 개혁을 시도하고 있다. 아마도 한국적 뉴 발레의 혁명을 꿈꾸고 있는지도 모른다.
      
'백조' 비틀기의 충격, '백조의 호수 II'

사랑에 빠진 지그프리트와 오데트
▲ '백조의 호수 II' 사랑에 빠진 지그프리트와 오데트
ⓒ 조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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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2008년 5월, 서강대 메리홀에서 조기숙이 안무한 뉴 발레 '백조의 호수-사랑에 반(反)하다' 공연이 끝난 후, 나는 평(評)에서 예술행위에 있어 '파격(破格)'을 논한 바 있다. 거의 정확한 1년 후 2009년 5월 22-23일, 역시 같은 장소에서 올린 그녀의 후속작 '백조의 호수 II-사랑에 취하다(공연기획: 쏠투스, 후원:이화여대, 서울과학종합대학원)'는 파격을 넘어 충격(衝擊) 그 자체였다.

조기숙은 발레에 있어, '백조의 호수'에 있어 한국적인 과감한 실험을 계속하고 있다. 특히 이번 작품에서 연출한 오데트의 자살이 5월 22일의 첫 공연 다음날인 23일, 마치 예언처럼 '개혁 대통령'의 자결이라는 엄청난 현실의 돌풍과 맞물리면서 공연 후 그녀는 한동안 슬픔과 무거운 마음에서 헤어나지 못했다.

이번 '백조의 호수 II'도 원전의 큰 흐름은 유지된 채, 구성은 재창작되었다.

관객이 입장하기 시작할 때 무대는 이미 막이 올라가 열려 있고 카메오로 출연한 남자 CEO 4명이 무대 앞 테이블에서 포도주를 마신다. 그들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 땅의 연약한 여인이자 예술가로 설정된 백조들을 유혹하고 괴롭힐 마왕들이다. 그들은 돈, 권력, 허위, 불신, 무관심, 증오 등 이 사회의 부조리한 현실이자 불편한 유혹을 상징한다. 장면은 영상으로 바뀌어 역시 마왕으로 출연한 CEO 2명이 포도주를 마시다 그중 한명이 발레리나를 상징하는 튀튀를 껴안는 모습을 보여준다.

위와 같은 프롤로그가 펼쳐진 후 1장은 막바로 '호숫가 정경'이 되며 무대 위 좌우로 그랜드 피아노와 피아니스트, 오보이스트(임정희)가 올라와 생음악을 연주하고 백조들이 춤을 춘다. 2장에서 오데트와 백조들이 외로운 춤을 춘다. 처절하기까지 하다. 오데트와 지그프리트가 운명적으로 조우한다. 3장에선 둘의 만남을 축하하는 다양한 춤의 향연이 벌어진다. 마왕들이 등장하여 백조들을 유혹한다. 정장으로 잘 차려입은 마왕(서영태)이 무대 위에서 직접 성악 솜씨를 뽐내기도 하고 낚싯대 끝에 돈을 매달은 마왕이 백조들 사이를 휘젓기도 한다.

4장에서 오데트와 지그프리트는 사랑에 취한다. 성애 장면이 연출되기도 한다. 그러나 행복도 한 순간, 오딜이 나타나 지그프리트를 유혹하고 오데트는 극심한 고통에 빠진다. 오딜역으로는 파격적으로 남자 힙합댄서(김영진)가 출연하여 관객들을 놀라게 한다. '백조의 호수 I'에 레스비아니즘 요소가 있었다면 이번 'II'에선 게이 호모세슈얼리티의 느낌을 주었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조기숙은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고 그저 소수자에 대한 이해와 배려로 보아주었으면 좋겠다"라고 한다.

5장에서 오데트는 죽음을 택한다. 연약한 여인이자 예술가로서 인간과 예술에 대해 숭고한 사랑을 보내는 주체자로 설정된 오데트는 마왕들의 횡포 앞에 결국 죽음으로 항변할 수밖에 없다. 오데트의 죽음은 장면이 영상(영화감독 남선호 제작)으로 바뀌면서 조기숙이 직접 출연하여 마왕 역의 정운식을 상대로 영혼의 춤을 추다 포인트 슈즈를 벗어 목에 걸고 허공에 매달리는 것으로 표현했다. 남은 백조들은 비탄에 빠져 춤을 춘다.

그러나 조기숙의 설정이 늘 그렇듯 오데트만이 주인공이 아니라 백조들 모두가 사랑과 삶의 주인공이다. 공연의 끝인 에필로그에서 어떠한 유혹에도 결코 넘어가지 않고 고고하게 자존심을 지켜낸 백조들은 환희의 춤을 추며 피날레를 장식한다. 놀랍게도 10여분의 커튼콜이 이어졌다는 것은 관객이 모처럼 큰 감동을 받았다는 증거이다.

남성무용수 황영근과 여성무용수 홍세희가 지그프리트와 오데트로 출연해 자유스러운 의상에 한껏 발랄하고 자유스러운 춤으로 파드되(Pas de deux, 발레 2인무)의 또 다른 이미지를 보여줬다.

뭇 백조들의 리더격인 한혜주와 배지수는 이번 공연에서도 시종 발레의 분위기를 이끌어 갔다. 그 둘은 지난 4월 11-12일, 서울 강남의 춤전용 M극장에서 한혜주가 안무한 창작발레 '달그림자' 공연을 할 때도 새뜻한 하모니를 이루었었다. 기량이 농익어 있는 한혜주는 이번 공연에서도 발레의 다양한 표현을 보여주었다. 국내에서 기량을 닦은 한혜주의 발레에는 동양의 선(禪)적인 분위기와 한국적인 정한(情恨)이 담겨 있다. 그녀가 어떤 춤을 출 때는 발레로 살풀이를 추는 것이 아닌가하는 느낌이 얼핏 들기도 한다. 배지수에게는 사뭇 영롱한 빛을 뿌리고 다니는 요정과 같은 상큼함이 있다. 그녀는 발레를 보는 사람을 순수한 동심의 세계로 인도하는 팅커벨이다.

뭇 백조로 춤을 춘 여민하, 윤상은, 김다애, 김은송, 박승아, 방서영, 안수현, 유수민, 이윤경, 조한나, 한나래는 모두가 삶과 사랑의 주인공으로 고뇌와 환희를 표현했다. 대학원과 대학에 재학 중인 젊은 그들 덕택에 공연은 풋풋하고 싱그러웠다.

비탄에 빠진 백조들
▲ '백조의 호수 II' 비탄에 빠진 백조들
ⓒ 조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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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기숙은 이번에도 발레와 최고경영인들의 예술적 통섭을 시도했다. 그 같은 시도는 발레 인구를 저변화하기 위한 방도이면서 지금까지 내려온 무용계의 잘못된 부정의 관행과 가족만의 잔치를 피하고 관객을 창출하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이기도 하다. 경영 일선에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는 이 시대의 CEO인 윤은기(서울과학종합대 총장/ 영상 출연), 송윤택(윤성텍스타일 대표/ 영상 출연), 홍태희(이폴리머 대표/ 영상 출연), 서영태(현대오일뱅크 대표), 부창열(미래씨앤알 대표), 홍영욱(퀸벨애드 대표), 양재훈(PAK's P&P 대표), 정창권(휴넷 이사)이 카메오로 출연했다.

문화에는 중심과 주변이 있기 마련이다. 발레에 관한 한 유럽과 미국은 중심이고 한국은 주변임을 부인할 수 없다. 중심은 자기들의 것이기에 정형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어도 주변은 함부로 바꿀 수가 없다. 클래식 발레는 다른 예술, 여타의 춤들과 달리 플롯에 있어서나 안무에 있어서나 정형화된 틀을 갖는다. 이미 중심에서 레퍼토리화한 발레에 대한 한국 안무가의 실험은 만만치 않은 위험부담을 감수해야 한다. 고전을 망치는 뻔뻔한 도전이라 하여 자칫 잘못하면 웃음거리가 되고 질타의 대상이 된다.

그러나 영국에서 '백조의 호수'를 남성 중심으로 바꾸어 안무한 매튜 번(Matthew Bourne)이 자기의 작품을 기존의 클래식 '백조의 호수'와 차별화해 한 말을 들어보자.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들으면 누구라도 춤추고 싶다. 그런데 꼭 그런 식으로만 추란 법이 어디 있는가." 그런 매튜 번을 향해서는 "독특하다. 분명 천재이다. 전혀 생각하지 못한 방향으로 해석을 했다." "그만의 스타일로 재해석된 이미지들, 굉장히 신선하다. 그것이 그의 작품을 계속 보고 싶게 하는 매력이다"하는 찬사가 쏟아진다. 

교통, 통신 수단의 혁명적인 발달로 세계는 좁아졌고 문화의 중심과 주변의 관계도 모호해져 가고 있다. 새로운 것을 창작하는 능력이 있는 곳이라면 바로 그곳이 중심이 되는 것이 오늘날의 현실이다. 우리가 발레 '백조의 호수'에 대한 변형과 실험을 시도한다 해서 하나도 이상할 게 없다. 발레도 시대에 맞춰 변할 수 있다. 정치엔 "현상유지와 기존질서의 답습이 가장 무난한 치세이지 개혁을 시도한 위정자는 희생 된다"는 속설이 있다. 그러나 예술은 다르다. 참다운 예술은 시대에 끌려갈 것이 아니라 예술로 새로운 시대를 열어야 한다.

발레와 힙합의 혼성 '댄스 댄스 타이쿤'

발레와 익스트림 바이크
▲ '댄스 댄스 타이쿤' 발레와 익스트림 바이크
ⓒ 조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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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의 호수 II'가 발레와 전문경영인들인 CEO와의 통섭이라면 '댄스 댄스 타이쿤(Dance Dance Tycoon)'은 정통예술과 거리의 예술과의 혼성이다. '댄스 댄스 타이쿤'은 우선 마냥 즐겁고 흥겹다. 다이나믹하고 싱싱하다. 한 편의 서커스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현대판 마당놀이를 보는 것 같기도 하다. 공연은 6월 28일 신촌 창무포스트 극장에서 오후 3시와 6시, 2번 이루어졌다(무대감독, 진행: 유현지, 후원: 코리아익스트림바이크연맹 양재훈 대표). 

익스트림 바이크의 고수들이 자전거와 함께 높은 공중에서 뒷제비(Air Backflip) 묘기를 부리는 것을 보면 그야말로 하늘을 나는 제비를 연상시킨다. 뭐든 지기 싫어하는 한국인은 어느새 익스트림 바이크도 세계 수준이 되었다.

'댄스 댄스 타이쿤'은 정통발레리나(여민하, 윤상은, 안수현, 이은혜)와 익스트림 바이크의 고수들(권동경, 정명환, 홍성준)이 어우러지고, 비보잉, 팝핀, 디제이(Scratching & Mixing DJ), 비트박스(Beatboxing: 입과 혀의 움직임과 손을 사용하여 강한 악센트의 리듬을 만드는 일, 쉽게 말해 입으로 드럼의 역할을 하는 것)가 섞이는 한판의 난장(亂場)이다.

처음 디제이의 음악과 함께 무대가 밝아지면 익스트림 바이크 3대가 차례로 등장한다. 이어서 무대 천장에서 캐주얼한 복장을 한 발레리나 2명이 암벽 탈 때의 안전장비를 몸에 부착하고 줄을 타고 내려온다. 마치 낙하산을 타고 적의 후방으로 침투하는 공수부대원들 같다. 묘기를 펼친 익스트림 바이크의 3명이 퇴장하면 힙합계열의 프리 스타일 댄서(김영진)와 비보이(심규승)가 등장하고 다시 천장에서 2명의 발레리나가 줄을 타고 내려와 합세한다. 브레이크 댄스가 한바탕 추어지고 4명의 발레리나가 춤으로 흥을 돋운다. 팝핀이 추어지고 발레리나들이 어울려 춤춘다.

무용수들이 객석에서 관객 5명을 무대로 데리고 나와 춤을 배워준 후 같이 춘다. 디제이(최재화)와 비트박스(은준)는 강한 비트의 음악으로 한껏 분위기를 돋우고 힙합댄서와 비보이가 신나게 어우러진다. 다시 익스트림 바이크 3명이 등장하여 모두 함께 피날레를 장식한다. 공연이 끝난 후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이어졌다.

본래 우리의 마당놀이는 무대와 관객이 어우러져 한바탕 신바람 나게 노는 게 전통이다.  우리의 남사당패 놀이와 힙합문화는 흡사한 부분이 많다. '댄스 댄스 타이쿤'을 잘 가다듬어 '난타', '점프', '사랑하면 춤을 춰라'와 같이 또 하나의 한류 공연예술상품으로 개발해 보는 것은 어떨까. 가령 제목도 잘 와닿지 않는 '댄스 댄스 타이쿤' 대신 '발레 뒤집어진다' 쯤으로 바꾸어서. 

오늘날 문화의 다면적, 다차원적인 변화의 국면을 맞이하며 춤 환경도 급격하게 변하고 있다. 고급문화와 대중문화, 예술춤과 힙합문화, 서커스, 체조 등 다양한 장르 간의 습합과 혼성, 융합이 질펀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예술의 실험과 표현은 다양할수록 좋다. 모두가 일률적이라면 재미도 없고 답이 뻔하다면 대화도 필요치 않다. 예술의 실험과 파격이 계속 되어야 하는 소이이다.

발레와 힙합과 비보잉
▲ '댄스 댄스 타이쿤' 발레와 힙합과 비보잉
ⓒ 조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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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뉴 발레, #익스트림 바이크, #백조의 호수, #댄스 댄스 타이쿤, #조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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