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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김대중 대통령 서거로 호남지역은 어느 지역보다 큰 충격과 슬픔에 빠졌다. 납치와 살해위기, 5.18 민중항쟁후 사형선고와 망명, 야당 지도자에서 대통령 당선까지 김대중은 호남이 키운 민족의 지도자였다. 호남의 인물이자 자부심이었다. 호남에서 김대중은 차별 받고 소외당해온 자신들의 모습이었다. 김대중, 이름 석자 말할 수 없는 시절 선생님으로 통했던 바로 그분이 돌아가신 것이다.

호남엔 또 하나의 자부심이 있다. 해태의 뒤를 이은 기아 타이거즈다. 기아는 최근 11연승으로 상승세를 타며 1위 자리를 고수하고 있다. 이대로라면 정규시즌 우승은 물론, 한국시리즈 V10도 가능할 듯하다. 그래서일까? 김대중 대통령 서거 이후 기아의 V10을 염원하는 사람들이 늘어가고 있다. 호남 사람 치고 해태와 김대중에 대한 기억 하나씩 없는 사람이 없으니 그럴 법도 하다.

호남 연고

왜 그렇게 호남사람들은 해태와 김대중에게 열광했는가?

먼저 호남 연고다. 김대중의 고향은 전남 신안군 하의도다. 그가 사업가로 성공하고 1963년 재선에 성공하여 6선 국회의원으로 승승장구하기 시작한 것도 목포에서부터다. 호남은 5.18 내란음모에서 대통령 당선까지 김대중의 정치적 고향이었다. 그러나 김대중의 고향이라는 이유로 호남은 산업화와 국토발전 과정에서 차별과 소외를 받았고 지역주의의 희생양이 되었다. 상경한 전라도 사람들은 먹고 살기 위해 호남차별을 견디며 얼마나 많은 눈물을 삼켰는지 모른다.

 프로야구 8개 구단 중 유일하게 홈페이지에서 김대중 대통령 서거를 애도한 기아 타이거즈(8월 22일)
프로야구 8개 구단 중 유일하게 홈페이지에서 김대중 대통령 서거를 애도한 기아 타이거즈(8월 22일)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캡쳐.

해태의 연고지도 광주전남전북, 호남이었다. 1990년부터 쌍방울 레이더스가 전북을 연고로 하였지만 2000년 SK 창단 이후 무연고로 있다가 2003년 다시 기아로 넘어왔다. 타향살이 하는 호남사람들은 서울에서 해태 경기가 있을 때면 잠실야구장을 가득 메우고 목이 터져라 응원했다.

1982년에 출범한 프로야구는 국민의 민주화와 정치적 관심을 뺏고자 군사정부가 스포츠, 영화, 성을 이용했던 이른바 3S정책이었다. 군부독재는 지역주의로 호남을 정치사회적으로 고립시키고, 스포츠로 정치무관심을 의도했다. 그러나 역으로 야구는 호남연고라는 동질성을 찾게 해 주었다. 지역주의의 정치사회적 작동으로 차별과 소외를 당한 호남사람들은 자신들을 대변하는 해태와 김대중을 만나 열광했던 것이다.

고난 속에서 피어난 꽃

흔히 김대중 대통령을 고난 속에서 피어난 인동초에 비유한다. 김대중 대통령은 군사독재에 의해 납치와 고문, 살해위기 등 죽음의 문턱을 몇 차례 넘어야 했다. 특히 5.18 내란음모의 수괴로 지목되어 사형선고까지 받았고, 망명과 가택연금도 겪었다. 그리고 4번째 도전 끝에 대통령에 당선하였다. 김대중의 인생은 독재의 탄압과 투쟁 속에 만들어진 대한민국 민주주의 역사였다.

해태타이거즈 역시 고난 속에서 출발했다. 고작 선수 14명으로 창단식을 가졌고, 내로라하는 유명 선수도 없었다. 단 6명의 투수는 선발과 중간계투, 마무리 할 것 없이 투입되어 80경기를 소화했다. 아이스크림 팔아서 선수연봉을 준다는 소문이 있을 정도로 가난한 팀이었다. 덕분에 우리는 당시 투수로 10승을 올린 김성한 선수가 타자로 나서 타점왕을 차지하고, 경기 중간에 1루수에서 투수로 마운드에 오르는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해태는 프로야구 2년째인 83년 전기리그 우승에 이어 한국시리즈 우승까지 하였다. 고난 속 첫 우승 후 V9까지 해태의 기록은 한국 프로야구의 역사였다. 특히 군사독재의 탄압과 시민 항쟁이 극에 달했던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한국시리즈 4연패를 이루기도 했다.

80~90년대는 군부독재에 대항하여 목숨을 내놓고 싸워온 고통의 시간이었다. 그 기나긴 고통의 터널을 지나는 동안 야구경기장에 모인 광주시민들의 뜨거운 승부욕은 김대중에 대한 정치적 탄압에 억눌려 있던 민주화 열망과 결합되었다. 민주화 투쟁 과정에서 김대중과 호남은 하나가 되었다. 해태와 무등경기장이 그 가운데 있었다.

 광주 무등경기장
광주 무등경기장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해태는 5월만 되면 신이 났다. 그 전까지 별다른 성적을 못 내다가도 5월만 되면 연승으로 상위권으로 도약했다. 5월 광주는 그랬다. 매년 5월이 되면 광주사람들은 술렁거렸다. 풀리지 못한 가슴 속 응어리가 꿈틀대기 때문이다. 광주 무등경기장은 그런 광주시민들과 해태가 만나는 장소였다. 해태! 해태! 김대중! 김대중! 함성으로 물결치는 무등경기장은 해방구였다. 목포의 눈물을 합창하는 무등경기장은 호남사람들의 한풀이 장이었다. 전라도의 한이 해태를 만나 폭발한 것이다.

해태가 홈경기에서 지면 무등경기장 앞 포장마차는 목포의 눈물로 밤새 흐느꼈다. 5월에 그런 날이 겹치기라도 하면 그 슬픔은 몇 배로 커진다. 경기장을 나온 일부 시민들은 금남로에서 시위중인 대학생들과 합류하기도 했다. 구호는 도청! 도청! 으로 바뀐다. 5.18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시절, 분노는 김대중을 탄압했던 군부정권과 그들과 손잡은 사람들을 향했다.

승리의 기억

광주는 승리의 경험을 가지고 있다. 80년 5월 광주는 완벽한 시민공동체를 보여줬다. 항쟁지도부를 구성하여 질서를 유지하였고, 항쟁기간 동안 치안사건사고와 매점매석이 없을 정도로 높은 시민의식을 보여주었다. 주먹밥을 만들어 시민군에게 주던 양동시장 아주머니들까지 광주는 대동세상이었다.

또 광주는 80년대 미문화원 방화, 88년 광주청문회, 95년 5.18 특별법 제정 과정까지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의 역사적 승리를 자신들의 투쟁으로 성취했다. 5.18을 국가기념일로 만들어 명예 회복을 당대에 이루어냈다. 그렇게 뭉친 호남사람들의 힘은 98년 대통령 김대중으로 정권교체를 이루는 원동력이 되었다. 2002년 민주당 경선에서는 경상도 출신 노무현을 지지하여 노풍의 진원지가 되기도 했다.

흔히 호남사람들의 정치의식이 높다고 한다. 그것은 고통과 차별 속에서도 정의와 양심으로 꿋꿋하게 살아간 몸부림의 흔적이다. 싸우면서 깨우치고 얻어낸 피와 눈물의 교훈이다. 삶과 투쟁 속에서 만들어진 민주주의와 역사에 대한 진보의식이라고 할 것이다. 그 진보성은 민주당의 아성인 광주전남에서 최근 치러진 재보궐 선거 결과 민주노동당이 선전한 데서도 느낄 수 있다.

이렇듯 삶의 끝자락에서 승리의 경험까지 호남은 김대중과 울고 웃으며 한 시대를 동고동락했다. 민주주의와 진보의 역사를 함께 써내려간 김대중 대통령이 서거했으니, 호남의 슬픔은 말할 수 없다.

 지난 6월 동교동 자택에서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지난 6월 동교동 자택에서 오연호 <오마이뉴스> 대표기자와 인터뷰를 하고 있는 김대중 전 대통령. ⓒ 안홍기
해태의 승리의 역사는 말할 필요도 없다. 해태는 83년, 86~89년, 91년, 93년, 96~97년까지 한국시리즈를 9번이나 우승하였다. 우연의 일치일까? 5.18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김대중의 멍에를 벗기고,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을 위해 광주가 마지막 힘을 기울이던 95년 이후 96~97년 해태는 신이라도 난 듯 2년 연속 정규리그 우승과 한국시리즈 우승을 거머쥐었다.

해태와 김대중은 80년 5.18 민중항쟁부터 95년 진상규명과 책임자 처벌, 97년 김대중 대통령 당선까지 같은 시대에 승리의 경험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해태타이거즈는 80년 5.18 민중항쟁 이후 정치사회적 소외와 고통을 당해온 호남사람들의 한과 슬픔을 풀어주는 상징체가 되었다.

호남을 연고로 한 해태는 호남사람들의 대변자였던 김대중과 끊을 수 없는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기아가 해태에서 구단을 인수하면서 타이거즈는 버리지 못한 것도 이런 호남사람들의 강한 애착 때문이었다. 프로야구팀 중 유일하게 기아가 홈페이지에서 김대중 전대통령을 추모한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IMF의 명암

그러나 제2의 국난이었던 IMF는 해태와 김대중의 명암을 갈랐다. 김대중 대통령은 1998년 최초의 수평적 정권교체를 이루어냈지만 IMF 경제위기를 맞았다. 그러나 김대중 국민의 정부는 금 모으기 운동 등 온 국민의 힘으로 위기를 극복했다. 정권교체 2년만에 최단 기간에 외환위기를 극복해내 세계를 놀라게 했다. 또 임기중에 우리나라는 건국 이후 최초로 순채권국으로 전환했고, 세계4위의 외환보유국이 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노벨평화상과 분단 이후 최초로 남북정상회담을 성사시켜 성공한 대통령이 되었다.

IMF 위기는 해태에게도 불어닥쳤다. 해태는 모기업이 재정난으로 어려워지자 우수 선수들을 해외와 타구단으로 보내게 된다. 선동렬, 이종범은 일본으로, 임창용과 이강철은 삼성으로, 홍현우는 엘지로 각각 이적했다. 김응용 감독도 "동렬이도 없고, 종범이도 없고"라고 말하다 결국 2000년 시즌을 마지막으로 삼성으로 갔다. 결국 해태는 2001년 하반기 기아로 재창단되었고 역사의 뒤로 쓸쓸히 사라졌다.

IMF 경제위기는 김대중과 해태의 명암을 이렇게 갈라놓았다. 그러나 호남은 기아에게도 해태와 똑같이 응원을 보내 왔다. 우승 한 번 못해도 아쉬운 만큼 언제나 기대와 사랑을 주었다.

 해태와 기아의 로고
해태와 기아의 로고 ⓒ 기아 타이거즈 홈페이지

2009년 말, 목포의 눈물 물결치는 무등경기장 보고 싶어

최근 기아의 선전으로 광주 분위기가 오랜만에 좋다고 한다. 광주사람들은 어젯밤 기아의 경기 이야기로 기분 좋은 하루를 시작한단다. 기아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5월을 기점으로 힘을 내어 상위권으로 올라서고, 파죽의 연승으로 7년만에 단독 1위에 올라섰다. 지난 2002년 9월12일 이후 처음이다.

해태의 마지막 우승은 97년이다. 2001년 해태가 역사속으로 사라진 후 기아는 한번도 우승을 못했다. 그런 기아가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으니, 12년만에 호남사람들의 가슴이 다시 뛰는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기아 타이거즈가 올해 V10을 꼭 이루어주길 바라고 있다. V10으로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을 잃어 유난히 슬퍼하고 있는 호남사람들의 슬픔 마음을 달래주길 원하고 있다.

더불어 김대중 대통령 서거를 계기로 조성되는 화해와 통합의 분위기에 호응하여 도청보존 문제도 잘 해결되기를 내심 바라고 있는 눈치다. 최근 여론조사결과도 62%가 보존을 선호하고 있으니, 다시 한 번 광주사람들의 역사적인 안목을 읽을 수 있는 대목이다.

올해 연말 광주무등경기장에서 목포의 눈물을 목놓아 부를 수 있기를 기대한다. 호남사람들은 자신들과 함께 울고 웃으며 민주주의와 평화를 남기고 가신 김대중 대통령을 기아와 함께 다시 만나기를 염원한다. 벌써부터 가슴이 벅차오르고 눈물이 아른거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김대중#기아#호남#해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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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심코 지나치는 일과 스치는 생각 속에서 나와 우리의 변화와 희망을 위한 상상력이 필요한 곳은 없는지 살펴보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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