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수원은 역사, 문화적으로 아주 특별한 특징을 지닌 도시라 할 수 있는 곳이지요. 그런 수원을 대표하는 것을 들라면 세계문화유산 화성이라고 생각 됩니다. 이런 화성과 행궁의 특징, 축조과정 및 역사적 배경, 문화 등을 알아 보고자 지난 주 맑고 화창한 가을 어느 날 수원을 찾았습니다. 그곳에서 어떤 순서로 둘러 보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화성박물관을 먼저 보고 화성과 행궁을 둘러 보아야 순서려니 하고는 먼저 화성박물관에 갔습니다.

수원화성박물관

수원시 팔달구 매향동에 자리하고 있는 수원화성박물관은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찾는 방문객에게 정조시대의 문화와 더불어 화성의 우수성을 심도 있게 알려주는 전문 박물관이며 전시공간은 화성의 축성 과정을 알려주는 화성축성실, 화성의 다양한 문화를 보여주는 화성문화실, 수원 화성과 관련된 야외 전시 공간 등 크게 세 곳으로 구성 되어 있습니다. 아울러 어린이 체험실과 영상강의실, 교육실 등의 교육공간도 마련되어 있는 곳입니다.

오전 10시경 박물관 앞에 도착하여 우선 야외 전시 공간을 둘러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강원도 영월에 있는 정조의 태실을 재연한 정조 태실, 화성의 신기술인 거중기와 녹로가 전시 되어 있었고 또한 조선 후기 화성과 연관 있는 관리의 공덕을 칭송하는 비석인 선정비가 전시되어 있었습니다.

거중기는 도르래의 원리를 이용하여 무거운 물건을 쉽게 들어 올릴 수 있도록 고안한 장치로서 화성 축성 시 수레에 큰 돌을 올리는 역할을 한 기구이며, 녹로는 도르래를 이용하여 돌을 높이 들어 올려서 원하는 위치로 옮기는 데 사용한 기구로서 화성 축성 시 두 대를 설치하여 높은 성벽을 쌓았다고 합니다.

박물관 전경
▲ 수원화성박물관 박물관 전경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화성 축조에 사용한 장치
▲ 거중기 화성 축조에 사용한 장치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야외 전시 공간을 둘러 본 후 박물관 내부 관람을 위해 2층으로 된 건물 안으로 들어 섰습니다. 마침 박물관에서는 '정조-예술을 펼치다'라는 주제로 정조에 대한 특별 기획전이 함께 열리고 있었습니다. 표를 끊고는 안내직원의 친절한 안내를 받으며 근 두 시간 가량 특별기획전 및 화성과 관련한 내용의 전시관 내부를 둘러 보았습니다.

오는 12월 6일까지 열리는 특별기획전의 내용을 개략 소개하자면, 1776년 조선의 22대 국왕으로 등극한 정조는 실학사상을 바탕으로 문예부흥의 시대를 열어 문예군주로 평가되고 있는 바 실제 정조는 당대 가장 뛰어난 학자이자 예술가로 수백 점의 시, 서화 작품을 남겼습니다. 정조에게 문예는 정치와 함께 하는 또 하나의 방법이었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며 신하와 백성과 함께 하는 과정에서 시를 짓고 글씨를 씀으로써 화합과 배려의 리더십을 발휘했다 하겠습니다. 전시에서는 특히 정조 예술이 탄생하는 계기와 과정에 주목하였습니다. 전시 내용은 홀로서다(起源), 뿌리를 기억하다(孝親), 사람과 함께 하다(治人), 마음을 다스리다(修己) 라는 주제로 혜경궁 홍씨를 어머니로 사도세자를 아버지로 둔 정조의 성장 배경, 효심 그리고 친교와 소통의 마음 및 자신의 정신 수양을 위해 정진했던 흔적 및 작품 등이 전시되고 있습니다.

이어서 화성의 축성 과정을 전반적으로 보여주는 공간인 화성축성실을 둘러 보았습니다.
그곳에는 화성행차시 정조가 입었던 황금갑옷, 화성 축성 기록을 남긴 책인 '화성성역의 궤', 전조의 문집인 '홍제전서', 사도세자가 대리청정시 조돈에게 보낸 편지인 '사도세자 영서' 등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다음으로 화성문화실을 둘러 보았습니다. 1795년 화성행차 및 정조가 어머니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사도세자가 잠들어 있는 화성에서 거행함으로써 드러냈던 부모에 대한 효심, 왕조의 권위 회복, 그리고 애민정신 등에 대한 모형 및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었습니다.

박물관 내부와 야외 전시관을 둘러 보면서 과학적인 화성 축조과정 및 내용, 정조와 관련한 화성 문화 및 정조의 효심과 백성 위하는 인간적인 면 등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박물관을 나와 화성 답사를 위해 화성 행궁 앞으로 해서 북문인 장안문 방향으로 바쁘게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세계 문화유산이자 성곽의 꽃인 화성

화성은 조선조 제22대인 정조 당시인 1774년(정조 18년) 1월에 착공하여 2년9개월 후인
1796년(정조 20년) 9월에 완공하였습니다. 정조대왕은 그의 아버지 사도세자의 원침을 양
주 배봉산에서 수원 화산으로 옮기고 부근에 용주사를 세워 부왕의 명복을 빌었습니다. 당
시 화산 아래에 있던 민가를 팔달산 아래로 모두 이전 시키고 수원부를 유수부로 승격시킨
곳이 현재의 수원이라 합니다.

화성의 축성은 역대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성의 시설물은 51개소이며 미복원 시설물은 7개소라 합니다. 210년여 전에 축조 된 화성은 가장 근대적인 규모와 기능을 갖추고 있다 하겠습니다. 또한 행궁과 더불어 지역의 입지적 특성을 살려 건설한 계획 도시라 할 수 있습니다.

화성의 건축물은 성곽의 축조에 석재와 벽돌을 병용 한 것,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와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구조를 갖추고 있다는 점, 용재를 규격화 하여 거중기 등의 기계장치를 활용한 점 등에서 우리나라 성곽건축 사상 가장 독보적인 건축물로 평가 받고 있습니다. 이런 연유로 1997년 12월 4일 이탈리아 나폴리에서 열린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 제21차 총회에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바 있습니다. 이러한 화성은 다음과 같은 주요 구성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4대문
화성을 출입하는 4개의 관문(팔달문/ 장안문/ 화서문/ 창룡문)이며 이중에 팔달문과 장안문이 각각 남북의 정문으로서 석축으로 된 무지개문 2층에 문루가 세워져 있고 벽돌로 쌓은 독특한 형태를 갖고 있습니다.

장대
장대는 모두 2개소(서장대/동장대)가 잇는데 서정대는 팔달산 정상에서 성 주변을 살피면서 군사를 지휘하던 곳입니다. 사방 백리가 한눈에 보이는 이 곳은 화성의 군사지휘본부로 일명 화성 장대라고 합니다.

포루(砲樓)
화성에는 벽돌을 사용하여 모두5개(서포루/ 북동포루/ 동포루/ 북서포루/ 남포루)의 포루를 만들고 3층으로서 지대 위에 혈석(穴石 : 대포 발사를 위해 구멍을 뚫은 돌)을 전면 2개, 좌우 3개씩 놓았으며, 그 위에 벽돌을 쌓았고 안쪽으로 판자를 잇대어 2층으로 구분하였습니다.

포루(鋪樓)
치성(雉城)위에 설치한 누(樓)(동포북루/ 북포루/ 서포루/ 동일포루/ 동이포루)로 군사들을 숨겨두고 적군이 보지 못하게 하는 시설물로 아래쪽은 돌로 쌓고 중간 부분부터 벽돌을 축조하였습니다. 그 위에 집을 짓고 판지를 깔아 문루를 만들고, 좌우에는 활을 쏘는 구멍도 만들었습니다.

공심돈
군사가 안으로 들어가서 적을 살필 수 있게 만든 망루의 일종으로 서북공심돈과 동북공심돈이 있으며 동북공심돈은 화성에서 가장 특이한 건물 가운데 하나로 중국 용동지방에 있는 평돈(平燉)을 모방하여 벽돌로 동그랗게 돈대를 쌓아 만들었습니다.

북수문-화홍문
화성을 가로질러 흐르는 수원천의 북쪽에 세운 수문을 말하며, 편액은 화홍문이라 하였습니다. 다양한 기능과 견고함에 멋진 외관까지 함께 갖춘 북수문은 아름다운 경관을 지닌 당대의 대표적 시설물이었습니다.

암문
깊숙하고 후미진 곳에 만들어 적에게 들키지 않게 군수물자를 성안으로 공급 할 수 있도록 만든 군사시설로 유사시에는 문을 닫고 주변에 쌓아 놓은 돌과 흙으로 암문(서남암문/ 북암문/ 동암문/ 서암문)을 메워 폐쇄하도록 하였습니다.

각루
높은 위치에 건물을 세워 주변을 감시 하기도 하고 때로 휴식을 즐길 수 있도록 한곳을 말하며, 화성에는 총 4개소(동북각루/ 서북각루/ 서남각루/ 동남각루)가 설치되어 있는데 이중 동북각루는 방화수류정이라고 합니다.

봉돈
비상상태를 알리는 역할을 하는 통신시설로 봉돈은 성벽 일부를 돌출시켜 벽돌을 쌓고 그 위에 5개의 화두를 쌓았으며, 성벽에 총구멍을 뚫어 적으로부터 방어할 수 있도록 하였습니다.

노대
쇠뇌를 쓰던 방어 시설로 산 정상부에 위치 하였고, 화성에는 2개의 노대(동북노대/ 서노대)가 설치 되어 있습니다.  이중 동북노대는 서노대가 성벽 안쪽에 만들어진 것과는 달리 치성위에 벽돌을 쌓아 만들었습니다.

치(치성)
일정 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으로 튀어 나오도록 한 구조물로서 성벽 가까이 접근하는 적군을 공격하기 위한 시설물로서 서상치/ 서일치/ 서이치/ 용도서치/ 동일치/ 동이치/ 용도동치/ 동상치/ 남치/ 북동치가 있습니다.

적대
성문과 옹성에 접근하는 적을 막기 위해 성문의 좌우에 설치한 방어 시설물로, 적대는 시설물의 반만 외부로 돌출되어 있고 반은 성안으로 돌출 되어 있습니다. 성곽 보다는 높게 축조하여 적군의 동태와 접근을 감시 하였으며 북서적대/ 북동적대가 있습니다.

장안문 앞 관광 안내소에서 관광 안내 자료를 받아 들고 계단을 통해 성벽에 올라가 장안문에 올라 섰습니다. 장안문에 올라 서니 종로 거리 일대가 내려다 보이고 거리에는 달리는 차들로 붐비고 있었습니다.

북문이라고도 하며 화성의 4대문중 하나
▲ 장안문 북문이라고도 하며 화성의 4대문중 하나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장안문 옆의 북동치대 및 북동치로에 가 그곳을 잠시 둘러본 후 성벽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습니다. 그리고는 북동포를 지나 화홍문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는 한 떼의 일본인 관광객들이 도착해 일본어 관광가이드의 설명을 관심 있게 경청하거나 사진을 찍으며 구경에 열중하고들 있었습니다.

화홍문 옆 동북각루(방화수류정)에 올라 서니 멀리로는 팔달산 위의 서장대가 바라다 보이고 잘 단장 되어 있는 수원천이 화홍문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수원천에는 물고기들이 노닐고 있었습니다. 또 누각 바로 아래에는 가지를 늘어 틀인 버드
나무가 서 있는 용연이 깊어가는 가을의 정취와 어울려 한 폭의 그림 같은 모습으로 그윽하게 자리하고 있어 보기 좋았습니다.

이 문 아래로 수원천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 화홍문 이 문 아래로 수원천이 가로질러 흐르고 있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연못과 어울려 그림같이 서 있다.
▲ 용연에서 바라 본 방화수류정 연못과 어울려 그림같이 서 있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북암문을 통과해 용연에 가 연못 주위를 한바퀴 돌며 경치를 감상했습니다. 못에는 몇 마
리의 물오리가 노닐고 있었고 숲 사이로는 까치가 '까작 까작' 하며 먹이를 찾고있는 모습
이 보였습니다. 다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동북포루와 동암문을 지나 연무대로 향했습니다. 연무대 옆 활터를 구경하고는 매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먹으며 잠시 발길을 쉬었습니다.

이곳에서 국궁 체험을 할 수 있다.
▲ 연무대 옆 활터 이곳에서 국궁 체험을 할 수 있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그리고는 연무대를 들러 보고 동북공심돈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열심히 주변 사진을 찍고 있던 60대 중반의 스페인 남성 관광객을 만나 몇 마디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북경을 거쳐 부인과 함께 삼일 전에 한국에 왔어요. 약 일주일간 한국을 둘러 보고
독일로 해서 스페인으로 돌아 갈 예정이지요. 이곳이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된 내용을 잘 알고 있어요. 부인은 다리가 불편해 저 아래 매점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지요. 참 멋진 곳입니다"라는 등 내가 묻는 말에 어눌한 영어로 얘기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내가 보니 그는 은퇴를 한 후 부인과 더불어 세계 이곳 저곳을 여행하고 있었으며 특히나
동양의 문화유적에 관심이 많아 보였습니다. 나 역시 그에게 "작년에 마드리드로 해서 톨레도를 다녀 온 적 있어요"라는 얘기를 해 주었습니다.

바로 옆에 우연히 만난 스페인 관광객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 동북공심돈 바로 옆에 우연히 만난 스페인 관광객이 서 있는 모습이 보인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그와 헤어져 동북노대 방향으로 향했습니다. 걸음을 옮기며 뒤 돌아 보니 그는 동북공심돈을 오르기 위해 안으로 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동북노대 지대 창룡문에 이르렀습니다. 그곳에서는 43번 국도의 도로 건너로 연무대와 활터, 연무대 관광안내소가 내려다 보였습니다.

창룡문을 잠시 둘러본 후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겨 동일포루, 동일치, 동포루 등을 지나쳐 봉돈에 이르렀습니다. 봉돈은 다른 시설물에 비해 우뚝한 모습으로 다섯 개의 봉두 모습을 볼 수 있었습니다. "아, 이곳을 통해 옛 선조들이 연기를 피워 서로 통신을 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곳에서는 오전에 들렀던 화성박물관이 지척에 내려다 보였습니다. 봉돈을 뒤로하고 동이포루와 동상치를 지나 동남각루에 이르렀습니다. 화성의 성곽은 동남각루에서 남문인 팔달문과 바로 연결 되지 않고 맥이 끊겨 있었습니다.

봉화를 올려 통신을 하던 곳이다.
▲ 봉돈 봉화를 올려 통신을 하던 곳이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동남각루 옆의 성벽 계단을 내려서니 수원천이 흐르는 다리가 있었고 그 옆으로는 지동시장이 있었습니다. 지동시장 일대는 행인과 시장상인 그리고 산책을 나와 쉬고 있는 노인들로 북적이고 있었습니다. 피곤한 다리도 쉬고 시장기도 해소 할 겸 해서 그곳 시장의 한 식당에 들러 점심을 들었습니다. 점심을 들고 나니 기운이 나는 것이었습니다. 그리고는 바로 인근의 팔달문 앞에 섰습니다. 역시 장안문과 더불어 화성의 대문다운 모습으로 웅장하게 느껴졌습니다. 그곳을 지나 팔달산으로 오르는 화성의 성곽과 함께 계단길이 나타났습니다.

팔달문 관광안내소 지나 남치로 향하는 가파른 계단길을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가을볕이 따가워서 인지 땀이 났습니다. 계단길을 올라 남포루에 이르니 수원 출신의 음악가인 홍난파 선생의 노래비가 서 있었습니다. 노래비에는 그의 대표적인 곡인 '고향의 봄'이 악보와 함께 적혀 있었습니다. 노래비를 지나 숨가쁘게 계단을 올라 팔달산 자락에 우뚝한 모습으로 자리하고 있는 서북각루 앞에 섰습니다. 일대는 오랜 된 소나무들이 숲을 이루고 있어 보기 좋은 경치를 자아내고 있었습니다. 서북각루 옆으로는 삼일독립기념탑이 소공원 내에 자리하고 있어 잠시 들려 삼일 운동의 의미를 되새겨 보았습니다.

고향의 봄이 악보와 함께 적혀있다.
▲ 홍난파 노래비 고향의 봄이 악보와 함께 적혀있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방문객이 타종을 해 볼 수 있다.
▲ 효원의 종 방문객이 타종을 해 볼 수 있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다시 성벽을 따라 얼마를 가자니 서암문과 서포루 맞은편 쪽의 서장대 관광안내소 옆으로 효원의 종이 있었습니다. 효원의 종은 효의 도시 수원의 상징적 이미지를 나타내고 종각을 항시 개방하여 관광객이 스스로 타종하면서 부모와 가족, 개인의 소원을 빌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효원의 종을 지나 이내 팔달산 정상의 서장대에 이르렀습니다. 서장대 앞에 서서 일대를 바라보니 짙 푸른 가을 하늘 아래로 광교산 일대가 건너다 보이고 멀리로는 관악산과 청계산 그리고 북한산까지 바라다 보였습니다. 그야말로 안내자료의 설명처럼 사방 백리가 보인다는 말이 실감 났습니다. 아울러 바로 아래로는 화성행궁이 한눈에 내려다 보였습니다. 위에서 내려다 보니 행궁의 구조가 한눈에 들어나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뒤로 서노대가 보인다.
▲ 서장대 뒤로 서노대가 보인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수원 일대와 화성이 한눈에 보인다.
▲ 서장대에서 바라본 수원 시내와 화성 수원 일대와 화성이 한눈에 보인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서장대에서 잠시 일대를 바라보며 쉰 후 바로 옆의 서노대에 올라 보았습니다. 서노대에서
도 광교산과 관악산 일대 그리고 더 먼 곳이 잘 조망 되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에서 우연히 60대 중반의 토목을 전공했다는 성함이 남장윤이라는 분을 만났습니다. 그는 '사단법인 한국현문풍수지리학회'에 정회원으로 있으면서 다른 회원들과 더불어 전국을 다니며 풍수지리를 연구하고 있다 했습니다. 그가 건네 준 '현문회보' 라는 학회보를 받아 들고 서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며 서이치와 서포루 그리고 서북각루를 지나 서북공심돈이 함께 붙어 있는 화서문까지 동행하다 헤어졌습니다.

화서문에서 그와 헤어진 후 장안문 종합안내소 쪽으로 성벽을 내려 와 그곳 공원 일대를 거닐었습니다. 화서문 앞으로는 관광객의 편의를 위해 운행 되는 3량으로 된 화성열차가 연무대를 왕복하며 수시로 지나 다니고 있었습니다. 화성 열차는 앞 부분이 옛 정조 임금이 타던 용머리 형상의 가마형태로 되어 있어 그 모습이 이채롭게 보여 오가는 이들의 눈길을 끄는 것이었습니다. 그곳 공원의 매점에서 물을 사 마시며 잠시 쉬고는 버스를 타고 오후 세시 무렵에 화성행궁으로 향했습니다.

가을 하늘아래 잘 어울려 보이는 모습
▲ 화서문과 서북공심돈 가을 하늘아래 잘 어울려 보이는 모습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용머리 형상의 맨 앞 칸이 이채롭다.
▲ 화성열차 용머리 형상의 맨 앞 칸이 이채롭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화성행궁

장안문종합안내소에서 화성행궁 까지는 지근 거리에 있기에 버스는 이내 행궁 앞 정류장에 도착 했습니다. 종로 거리를 잠시 걸으니 화성행궁 앞 드넓은 광장에 이르렀고 그곳에서는 화성행궁의 정문인 신풍루(新豊樓)가 보호수인 느티나무 사이로 바라다 보였습니다.

화성행궁은 사적 제478호로 1789년(정조 13년) 수원 신읍치 건설 후 팔달산 동쪽에 건립한 행궁으로 수원부 관아와 행궁으로 사용 되다가 1794년(정조 18년)에서 1796년(정조 20년)에 걸쳐서 진행 된 화성 축성 기간에 확대되어 최종 완성 되었다 합니다. 정조는 효성이 지극하여 부친인 장현세자(사도세자)의 원침인 현륭원(현재의 융릉)을 13차례 참배하였으며, 이 기간 중 화성행궁에서 유숙했다 합니다.

건립 당시에는 봉수당(奉壽堂), 복내당(福內堂), 유여택(維與宅), 신풍루(新豊樓), 남북군영(南北軍營), 우화관(于華館), 득중정(得中亭)등 600여 칸으로 정궁(正宮) 형태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행궁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아름다웠으며, 정조대왕께서 모친 혜경궁 홍씨의 친찬연을 열었던 궁이기도 합니다. 낙남헌을 제외한 다른 모든 시설물들은 일제의 민족문화와 역사 말살정책으로 인해 사라져 버렸지만, 1980년대 말 뜻있는 시민들이 복원추진위원회를 구성, 꾸준하고 적극적인 복원운동을 펼친 결과 1996년 복원공사가 시작되어 화성행궁 1단계 복원공사를 완료 해 2003년 10월 일반에게 공개하기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또한 행궁 경내 바로 옆으로는 사적 제115호인 화령전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화령전은 1801년(순조 원년) 정조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화성행궁 옆에 세운 정조의 영전(影殿)입니다. 영전은 보통 제사를 지내기 위해 신위를 모신 사당과는 구별되는 건물로 비록 돌아가신 선왕이지만 선왕의 초상화를 모셔놓고 살아있을 때와 같이 봉안하는 곳이라 합니다.

매표소에서 표를 끊고는 정문으로 입구 옆에 화성행궁이라 써 있는 현판이 세워져 있는 신풍루를 통해 입장해 행궁 경내 이곳 저곳과 화령전을 둘러 보니 깊어가는 가을의 고즈녘 한 분위기 하에 효심이 지극했던 정조의 숨결과 혜경궁 홍씨의 숨결 그리고 행궁에서 일하던 서리 및 상궁 등의 숨결을 곳곳에서 느낄 수 있었습니다. 또한 이곳은 수년 전에 인기리에 방영되던 드라마 대장금이 촬영된 곳으로 곳곳에 촬영 한 곳에 대한 설명문구가 사진과 함께 표시되어 있기도 해 더욱 관심이 가는 것이었습니다.

앞에 보이는 정문이 신풍루이다.
▲ 화성행궁 전경 앞에 보이는 정문이 신풍루이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행궁내 봉수당 안에 혜경궁 홍씨와 더불어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 재현된 정조의 모습 행궁내 봉수당 안에 혜경궁 홍씨와 더불어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정조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다.
▲ 화령전 운남각 정조의 초상화가 봉안되어 있다.
ⓒ 이광희

관련사진보기


아침 열 시부터 시작해 오후 네시 반 무렵까지 조선국왕 정조의 효심과 그의 예술혼을 따라 화성을 부지런히 걸으며 열심히 돌아 보았습니다. 행궁을 돌아 본 후 신풍루를 나서면서 생각해 보니 비록 몸은 피곤 하지만 정조를 위시한 우리 선조들의 효심, 충절 그리고 선각자 적인 지혜와 예술 혼, 과학적인 건축물 등에서 그들의 숨결과 얼을 느껴 볼 수 있었기에 몸의 피로는 아무것도 아니었다고 여겨지는 것이었습니다.


태그:#수원 화성, #2009년10월19일, #지구촌 나그네, #화성행궁, #정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