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새 용산참사가 일어난 지 1년이 지나고, 이제 이 곳을 나가야 하는 시점이 되니 마음이 무척 복잡해집니다.
제 발로 걸어 나가야 하는데, 그냥 잊고 돌아서야 하는데, 아무리 1월 25일까지 용산 현장을 비워주기로 합의했다고 하지만, 짠한 눈물과 찐한 애정으로 범벅이 돼버린 남일당과 레아를 포기할 수가 없습니다. 저 말고도 레아에서 같이 한솥밥을 먹었던 활동가 친구들도 마찬가지 심정일 겁니다.
몇 차례 밤늦게까지 회의를 하고 고민을 했는데, 뾰족한 수가 보이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미련 없이 정리하자"고 하는데, 어디 사람 마음이 그런가요.
그래서 또 예전 평택 대추리에서 생활할 때가 떠오릅니다. 거기서 제 발로 걸어 나와야 했던 2007년의 봄 말입니다.
935일 동안 이어졌던 팽성 농민들의 촛불행사가 공식적으로 끝났을 때, 대추리 마을에서 함께 살던 지킴이들은 '촛불이 꺼졌다'는 현실 자체를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끼리라도 촛불을 들자고 하고 비공식적인 촛불행사를 밤마다 이어갔던 기억이 납니다. 마을 주민들의 이주가 시작되고, 집들이 하나둘씩 파괴되는 모습을 보면서 마침내 우리도 짐을 싸서 그곳을 나와야 했지만, 우리는 모두 겨우 몸뚱이만 빠져나오고 나머지 모든 것은 마을에 그대로 두고 나왔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2년 후 그 지킴이들과 용산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대추리 마을 한편에 고이 묻어두었던 마음들을 오랜만에 되찾은 것 같았습니다. 피식 웃음이 나옵니다. 넌 또 왜 여기 와 있는 거냐고.
우리는 말하지 않아도 압니다. 그래도, 왜 당사자도 아닌데 철거민도 아니고 유가족도 아닌데, 누가 시킨 것도 아니고 돈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용역깡패와 경찰폭력이 난무하는 재개발 현장에 제 발로 찾아와 생활하려는 것인지 이해가 가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저도 스스로 물어봅니다.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2009년 4월로 돌아간다면 다시 레아로 들어가 생활할 것이냐고.
솔직히 모르겠습니다. 물론, 그 육체적·정신적 고통을 다시 겪으라면 절대로 돌아가지 않겠습니다. 속은 타고, 시간은 촉박하고 하루하루가 끝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달려가는 심정이었습니다.
이상림 열사와 가족 분들이 운영하던 레아 호프를 촛불미디어센터와 촛불방송국으로 바꿔서 새롭게 문을 열었을 때 천주교인권위 김덕진 활동가는 "용산4구역을 서울의 명물거리로 만들겠다"고 포부를 밝혔습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정말 그 포부가 실현된 것 같습니다. 부서진 건물과 흉측한 낙서로 살벌하던 이 곳에 연인원 백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방문해 용산참사의 해결을 위해 힘을 모았으니까요. 남일당과 레아가 없었다면 불가능했을 일입니다. 그렇게 다섯 열사들은 용산을 잊지 않고 끈질기게 현장을 찾아왔던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속에 조금씩 부활했을 것입니다.
매일 밥만 하는 사람들의 조그만 목소리도
처음 레아에 들어왔을 땐 분위기도 험악하고 살벌했지만, 언제 명도소송이 끝나 레아와 주변 4구역 건물들이 철거될지 몰라 불안했습니다. 가까운 미래가 어떻게 전개될지 모른다는 것은 참 사람을 힘들게 합니다. 불안정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모든 사람들의 처지가 십분 공감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언제 나가게 될지 모르니 할 수 있는 것, 해보고 싶은 것을 미루지 말고 지금 다 해보자고 결심했습니다. 일단 하고 싶은 것들을 시도라도 해본다면 쫓겨나도 후회는 없을 것 같았습니다. 널찍한 공간이 새로 생겼으니 조건도 좋았습니다. 1평에 1억이나 한다는 값비싼 곳에서 우리가 언제 다시 미술전을 열고, 거리 공연을 하고, 1인 시위를 하고, 연극과 영화를 보고, 활동가들과 자유롭게 수다를 떨고, 언감생심 낮잠을 자볼 수 있겠습니까.
우선 철거민들의 목소리가 듣고 싶었습니다. 언론을 통해 덧칠된 이미지로서가 아니라 살아 있는, 그래서 고통스런 육신의 소리 그 자체가 소중했습니다. 남을 통해서 대변된 것 말고 자신의 언어로 표현해 가는 일상생활이 궁금했습니다. '행동하는 라디오'를 만들어서 현장의 소리를 가감 없이 전파하고자 했던 건 그런 이유 때문이었습니다.
집회 같은 데에서 마이크 잡고 발언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는 크게 들리지만, 같은 투쟁의 현장에서 마이크 한 번 못 잡아보고 매일 밥만 하는 사람들의 조그만 목소리도 흘러나와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것이 불타는 망루에서 "여기 사람이 있다"고 절규하던 열사들이 바라던 바 아니었을까요.
공감하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도
레아 1층을 근거지로 삼아 라디오를 만들고 있자니 참 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됩니다. 내 자리가 마치 현관 안내 데스크 같아서 사람들은 항상 제게 묻습니다. 누구 어디 갔는지 아는지, 무슨 모임은 몇 시에 하는지, 화장실은 어디에 있는지, 커피를 마실 수 있는지.
사실 내가 레아에 들어와 가장 많이 했던 일은 라디오 방송을 진행한 것도, 노래를 만들고 부르는 아니었습니다. 사람을 상대하고 관계를 쌓는 일이었습니다. 미술평론가 김준기는 '여기 예술이 있다'라는 기고글에서 "노래를 지어 부르는 것은 물론, 현장의 주민들과 방문객을 맞이하고 대화하는 것이 그의 일이었다"라고 적고 있더군요.
용산 현장에서 라디오와 노래를 만들 수 있었던 힘이 여기 있었던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많은 사연을 안고 살고 있잖아요. 레아라는 공간에서 만나는 사람들은 초면인데도, 참 반가운 마음이 먼저 앞서는 경우가 많습니다. 전역에서 벌어지는 재개발로 인해 누구나 철거민이 될 수 있다는 생각, 그래서 나 역시 잠재적으로 용산참사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마음을 사람들은 갖고 있습니다.
레아에 있다 보면 그게 보입니다. 제가 '무릎팍도사'라서가 아닙니다. 용산참사라는 극단적인 폭력이 자행되는 시대에 불안하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게다가 참사 현장에서는 여전히 공권력과 자본의 횡포가 기승을 부립니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하고 보낸 355일이 매일 참사의 연속이었고 인권이 부정되는 나날들이었기에, 여기에 공감하는 사람들의 가슴 아픈 사연들이 흘러나온 것 같습니다.
예술은 그런 가슴 아픈 사연들의 표현방식이었습니다. 김준기는 이어서 "용산 참사 현장예술은 지난 1년간 사회적 망각에서 용산 이슈를 지켜내는 유효한 방식이었다"고 씁니다.
'레아'라는 문화전선의 신화
백원담 교수는 '용산이 드리는 선물'이라는 글에서 "진정한 행복이란 더불어 삶을 사는 자들만이 이룰 수 있음을 꼼꼼하게 알려주는 '레아'라는 문화전선의 신화, 그것은 용산이 이 땅 모든 사람에게 드리는 새해 선물이다"라고 말합니다.
어쩐지 제 이야기를 한 것 같아서 약간 쑥스러워집니다. 매일 새벽 4시 30분에 일어나 레아 앞길을 쓸었던 이상림 열사처럼 저도 그냥 정성스럽게 이곳을 가꾸고 싶었습니다. 하고 싶은 것들을 친구들과 하나하나 하다 보니 어느새 레아는 활동가들의 회의실도 되고, 손님들의 수다방도 되고, 기자들의 프레스센터도 되고, 마음껏 커피를 마시는 카페도 되고, 방송국도 되고, 녹음실도 되고, 영화상영공간도 되고, 미술작업실도 되었습니다.
1년 사이에 이렇게 무한히 증식했다는 것이 정말 놀랍기만 합니다. 미디어 활동가 여백은 '레아는 우리에게 무엇이었나'는 라디오 수다 프로그램에서 "레아는 살롱과 같았다"고 고백합니다. 자유로운 담론과 표현과 주장과 논쟁이 벌어지는 곳 그래서 새로운 사회운동의 가능성들이 저수지처럼 모여 있는 곳이라는 의미겠지요. 우리는 용산 레아에서 많은 실험과 놀이와 작당을 했습니다.
레아 활동가 설해는 '용산에 관한 그치지 않는 수다, 레아 사랑방 이야기'라는 글에서 놀라운 고백을 합니다.
"미디어뿐만 아니라 미술가들과 작가들, 음악가들이 레아에서 활동하고 있다 보니 활동가들 간에 경계도 희미해져 미디어활동가가 연극을 하거나 작가가 카메라를 들거나 나 같은 사람이 노래를 하게 되기도 한다. 요즘 나는 누가 요즘 뭐하고 사냐고 물으면 당당하게 '나 요즘 밴드 해'라고 이야기한다. 1인 시위 음악회를 하며 길거리 직접행동의 참맛을 보았다고나 할까. 다양한 활동 영역의 사람들이 만나서 생길 수 있는 시너지 효과가 분명히 있다. 그리고 투쟁 현장에 작업 공간이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뭐라도 해보고 싶은 마음과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마음이 샘솟는 것 같다. (<진보적 미디어 운동 저널 ACT! 제 68 호 / 2010년 01월 05일>)"
길거리 직접 행동의 참맛
길거리 직접행동의 참맛을 보게 해준 레아를 뒤로 하고 이제 우리는 또 다른 일상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발걸음이 좀처럼 떨어지지 않습니다.
용산참사는 1년간 참 많은 사람들을 아프게 했습니다. 하지만 현장의 많은 사람들은 참사의 고통을 그저 고통으로만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짓밟힌 권리를 되찾는 많은 활동을 통해, 또한 남일당과 레아라는 대안적 공간을 만들고 그 안에서 서로 고통을 치유해나가는 적극적인 활동을 통해 가난한 사람들의 연대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체험했습니다.
몸도 마음도 만신창이가 된 것처럼 아픈데, 솔직히 나는 시간을 되돌려 2009년 4월이 되면 다시 레아로 달려가고 싶습니다. 그래서 너무 즉흥적이지 않고 차분한 마음가짐으로 용산을 정겨운 마을로 만들고 싶습니다. 도심텃밭도 제대로 만들어서 투쟁의 현장에서 먹거리를 직접 수확하는 기쁨이 얼마나 큰지 모두와 나누고 싶습니다.
아, 진짜로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2009년 4월이 아니라 그 훨씬 이전으로 가야겠네요. 용산참사가 일어나기 훨씬 전으로 말입니다. 재래시장 우동포차와 박물관 식당과 책대여점과 153 당구장과 삼호복집 등이 공존하며 약간은 촌스러워도 정겨움이 넘치던 따뜻한 공동체로 말입니다. 재개발 같은 것은 전혀 모른 채 그저 하루하루 열심히 땀 흘려 일하고 보람을 느끼던 시절로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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